<<라몽시>> 박상우 소제목 : 내가 맨 처음 발견한건.. 내가 맨처음 발견한 건 허공에 떠 있는 손이었다. 마디가 길고 유 난히 희게 보이는 손이 문득 시선 끝에 닿은 것이었다. 직감적으로 여자의 손이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내가 선 자리에서는 그 손의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손의 움직임이 특이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유 난스레 희고 예쁘게 보여서 눈길이 머문 것이었다. 수천명의 사람들 이 우글거리는 시장바닥에서, 그것도 단 하나의 손에 매료당해 시선 을 멈춘다는 것 -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웃기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 다. 일렬횡대로 늘어선 리어카 판매대, 그 중에서도 화려한 색상의 스카프를 파는 곳에서 그 손은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분홍, 연 두, 노랑, 빨강, 녹색, 하양, 보라의 물결이 5월, 가벼운 봄바람에 잔물결처럼 살랑이고 있었다. 손은 내가 선 지점에서 대략 삼사 미 터쯤 앞에 있었는데, 손의 주인이 보이지 않은 건 전적으로 그 옆을 가리고 선 뚱보 아줌마 때문이었다. 턱이 두 겹 세 겹으로 쳐지는 건 고사하고, 몸피가 아름드리 같은 데다 키까지 컸으니 장애물로는 그 이상이 없을 성싶었다. “살 거요, 안 살 거요?” 퍼뜩 정신을 차리자 내 손에 권총이 들려 있었다. 내 앞의 리어카 진열판 위에도 각양각색의 권총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손님은 나 하나뿐이었고, 모자를 눌러쓴 상인은 핏대오른 표정으로 내 손에 들 린 권총을 노려보고 있었다. 악세사리, 스카프, 티셔츠, 스타킹 따위를 파는 주변의 다른 리어 카 판매대에는 개미떼처럼 손님이 들끓고 있었지만 권총을 파는 그 리어카 앞에는 유독 나 혼자만 서 있었다.장사가 안 돼서 저러는 건 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권총이 아니라 권총 모양의 라이터를 진열 판 위에다 내려놓고 나서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손이 하얀 스카프 앞에 멎어 있었다. 뚱보 아줌마는 자신이 고른 스카프를 상인에게 건네고 돈을 내고 있었다. 상인이 돈을 건네받고 허리에 두른 전대에서 마악 거스름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흰 손이 순간적으로 허공에서 사선을 그었다. 즐비하게 걸린 여러 장의 스카프 중에서 오직 하얀 것 한 장, 그것이 흰 손의 손놀림에 의해 한 순간의 멈춤도 없이 곧장 밑으로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5 ? 싱그러운 봄볕 속에서 찰라처럼 일어난 백색의 증발! 뚱보아줌마 옆에서 눈부신 빨강이 튀어나왔다.하양을 빨아들이고 금방 빨강으로 변신하는 기이한 색상 마술을 보는 것 같았다. 거스 름돈을 건네받은 뚱보 아줌마가 미처 리어카 앞에서 물러나기도 전 에, 제 스스로 어미몸을 벗어나는 앙징맞은 새끼처럼 흰 손의 주인 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었다. 소제목 : 빨간 잠바를 입은 손의 주인.. 빨간 잠바를 입은 손의 주인,그녀가 사람들을 헤치고 내가 서 있는 방향으로 걸어내려왔다. 앞을 열어놓은 빨간 잠바 속에 샛노란 티셔 츠를 걸치고, 밑에는 바지 대신 검정 타이츠를 입고 있었다. 어깨에 걸린 헐렁한 가방, 그곳으로 하얀 스카프가 빨려들어갔다는 걸 이내 알 수 있었다.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어느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경쾌하게 다가오는 그녀의 어깨 위에서 5월의 부신 햇살이 난반사를 일으키는 것 같았다. 난반사된 빛이 튀어오르며, 찰랑거리는 단발머 리에 부딪쳐 다시 한번 난반사가 일어나는 것 같았다. 5월의 봄볕마저 무색하게 만드는 그녀가 내 곁을 스쳐갔다. 재빨리 등을 돌리고 그녀를 따라걷기 시작했다.권총 모양의 라이터를 사 둘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샀으면 재미 있는 장난을 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녀 를 따라 걸으며 나의 상상은 기구처럼 드높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꼼짝 마! 그녀의 등 뒤로 바투 다가가 권총을 들이밀며 다짜고짜 그렇게 말 해 버린다. 그녀, 보나마나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출 것이다. 뒤를 돌아보지 못하게 한 채 영화에서처럼 묵비권 행사와 변호사를 선임 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꼭 잡아가야 하나요? 어쩌면 애 원을 할지도 모를 일이다. 애원을 무시한 채 그녀를 뒤돌아서게 한 다. 스물다섯밖에 안된 내 외모를 보고 대뜸 형사가 아니라는 걸 그 녀는 알게 될 것이다. 왜 이러는 거죠? 거세게 따지고 들지도 모르 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거나 물러서는 기색을 보여선 안 될 것이다. 오직 한 마디, 아주 냉정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그녀에게 건네면 엉뚱한 행운이 시작될지도 모를 일 아닌가. 지금부터 넌 내 포로야. 너무나도 선명한 빨간 잠바, 어느새 시장을 벗어나 인도로 접어들 고 있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곳이라 해도 잠바의 색상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표적처럼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측으로 꺾어져 백화점 앞으로 가는 걸로 보아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마 냥 이런 식으로 쫓아갈 수만은 없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걸음을 최 대한 빨리했다. 어쨌거나 잡고 보자는 생각 이외엔 별달리 떠오르는 것도 없었으니까. 백화점 앞을 마악 지나치는 지점, 거기서 나는 그녀의 등 뒤로 바 투 다가설 수 있었다. 권총이 없는 게 다소 아쉽긴 했지만 어쩌랴, 그녀의 등을 손가락으로 살짝 찔러보았다. 걸음을 옮겨놓으며 뭔가, 하는 표정으로 그녀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뭔가를 준비해야 할 순간이라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했지만, 나의 예상을 비켜나가 상황 은 전혀 다른 식으로 전개되었다. 다시 앞을 보고 아무일도 없었다 는 듯 그녀,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계속 걸음을 옮겨놓는 게 아닌 가. 히야,이것봐라. 소제목 : 왼쪽 검지를 곧게 뻗어... 왼쪽 검지를 곧게 뻗어 다시 한번, 좀전보다 확실히 세게 그녀의 등을 찔렀다. 우뚝, 가던 걸음을 멈추며 날렵하게 그녀가 등을 돌렸 다. 예상을 못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탄력적인 동작에서 순간적인 소용돌이가 생겨나는 것 같아 흠칫 나는 놀랐다. “뭐죠?” 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며 그녀가 나를 보았다. 너무나도 당당하게, 그러니까 시장에서 스카프를 훔쳤다는 사실마저도 그녀는 이미 까맣 게 잊고 있는 것 같았다. 몽롱한 눈빛으로 나는 그녀를 보았다. 너 무 당황해서가 아니라 전혀 다 ?이유로 나는 그녀에게 빨려들고 있 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대단히 정밀한 느낌이 빈틈없이 나를 에워싸는 것 같았다. 그녀의 이마에서 튕겨나오는 햇살이 눈에 부셔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녀의 가방 속으로 빨려들어간 흰 스카 프처럼, 아주 까마득한 미궁 속으로 내 자신이 잦아드는 것 같았다. 처음엔 그게 나만의 문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걸 음을 멈춘 직후에는 대단히 도전적인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던 그녀 도 어느새 나와 비슷한 상태로 접어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 駭? 팽팽하던 표정에서 차츰 생기가 스러지고, 대단히 몽롱한 눈빛이 되 어 사무치게 나를 바라보는 게 아닌가. “스카프 때문에 따라왔어요.” 그녀와 나를 동시에 에워싸는 미묘한 힘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더이상 그런 상태를 지속해선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스카프 ......?” 처음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보았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악,소리를 내며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온 모 양이었다. “그럼, 스카프 파는 아저씨하고 동업하는 거예요?”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힐끔한 시선으로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소리를 안 내서 그렇지, 겁을 잔뜩 집어먹고 끼깅거리는 강아지의 표정과 대단히 흡사해보였다. 그 표정과 자세가 너무 재밌고 앙증맞 아서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동업? 그런 건 아녜요.” 아랫배에 힘을 잔뜩 주고 나는 말했다. “그럼요?” “난 그저 봤어요. 하얀손의 마술사를 봤을 뿐이라구요. 그래서 따 라온 거예요.” “그럼 아무것도 아니예요?” “아무......것?” 꽤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는 그녀를 노려보았다.그러자 다시 끼깅,하 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그냥 스카프 훔치는 걸 본 것뿐이냐구요?” “보기도 하고,그것에 대해 생각도 했지.” “근데, 왜 반말을 하지......요?” 소제목 : 간신히 할 말은 하고 있었지만... 간신히 할 말은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애매모호한 눈빛으 로 나를 보고 있었다. 도둑질을 했는데 느닷없이 정체불명의 인간이 나타나 이런 식으로 애간장을 태운다면 얼마나 속이 답답하랴. 그걸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왠지 모르게 그녀를 좀더 곯려주고 싶다는 생 각이 들어 나는 정색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잡힌 도둑한테 존댓말 하는 사람도 있나요?” “지금, 하고 있잖아요.” 애교스런 표정으로 그녀가 되받아쳤는데, 거기서 그만 웃음이 터지 고 말았다. 힝,하는 콧소리도 우스웠지만, 좀 봐 달라는 식의 표정 과 재치에 넘어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버린 것이었다. “따분했는데, 정말 재밌었어요. 없던 걸로 할 테니 커피 한잔 사 요. 여기까지 따라온 정성도 있으니까.” 한참을 웃고 나서 나는 그렇게 말했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잠 시 서 있던 그녀, 약이 올라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좋아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첫째, 커피 마시는 동안 절대 나 한테 반말하지 말 것! 둘째, 약점 잡아서 사람 약 올리지 말 것! 세째,커피값은 각자 낼 것! 됐어요?” 허리에 손을 얹고, 완전히 생기를 되찾은 모습으로 당당하게 그녀 는 말했다.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어 나는 수락의 의사를 전했다. 시장에서 시작된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이젠 밑져야 본전인 장사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창한 5월, 스물다섯의 따분한 청춘 ------ 여자를 만나 밑질 일이 도대체 뭐랴. 그녀는 오렌지 쥬스, 나는 커피를 주문했다. 백화점 5층의 커피숍, 평일 오후라서인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실내에 마주앉아 보니 그녀 가 더욱 화사해보였다. 그런 기분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그녀로부터 느껴지는 이상한 힘이 나의 시선 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것 같아 미묘한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 었다. 나의 태도와는 달리 그녀는 양손으로 턱을 괴고 보란 듯이 나를 응 시하고 있었다. 단정한 이목구비, 군더더기가 전혀 없어 보이는 얼 굴이었다. 미인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왠지 모르게 나에게 깊이 와 닿는 정다움이 그 얼굴에는 담뿍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큰 여자보다는 작은 여자를, 규격화된 미인보다는 귀여운 여자를 훨 씬 좋아하는 나의 기호 때문일까. 그녀는 정말 귀엽고 깜찍한 얼굴 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에 빈틈없이 나는 사로잡히고 있었다. 희고 예쁜 손이나 스카프 때문이 아니라, 그녀를 보던 첫순간에 이미 그 와 같은 사로잡힘이 있었다는 걸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소제목 : 몇 살이예요? “몇 살이예요?” 쥬스와 커피가 날라져온 뒤에 그녀가 자세를 고쳐앉으며 물었다. “스물다섯.” “뭐해요?” “직업?” 나의 되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이는 표정으로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 있어요.” “백수?” “노동부 집계엔 안 잡혀 있을 거예요. 자발적인 실업자니까.” “먹고 사는 덴 지장이 없나보죠?” 빨대를 입에 문 채 그녀가 물었다. “스물일곱까지는 보장돼 있어요.” “우와, 그거 좋겠 ?” 그녀가 입을 벌리며 과장스런 표정을 지었다. “근데 옷이 왜 그렇죠?” 기린처럼 길게 목을 빼고, 타이츠를 입고 있는 그녀의 하체를 나는 내려다보았다. “옷? ....... 뭐가 어때서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공연연습 하다가 도망 나온 무용수 복장 같아서요.” “아, 타이츠!” 알았다는 듯 검지를 자신의 이마에 대고 나서 그녀가 나를 보았다. “쪼기, 스타 스페이스 아세요? 나, 거기 수강생이예요.” 그녀가 말하는 <스타 스페이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합 연기 학원이었다. 그곳은 전국에서 스타 지망생들이 몰려들어 시험까지 치르며 수강생을 선발하는 학원이었다. 영화배우나 탤런트,무용수나 모델이 되고 싶어하는 애들이 구름같이 그곳으로 몰려드는 이유가 그곳 출신들에 대한 연예계의 선호도 때문이라는 얘기를 나는 들은 적이 있었다. 굉장히 엄격한 지도를 하기 때문에 그곳 출신들은 비 교적 쉽게 연예계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스타 스페이스, 아주 잘 알죠. 난 그 뒤에 있는 학교를 다녔거든 요. ? “옴머, 정말요? 와우전문대 말하는 거예요?” 두 눈을 휘둥그렇게 치뜨며 그녀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거기. 근데 왜 그렇게 놀라죠?” “우와, 우와 ...... 모르겠어요?” 너무 재밌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연해 우와, 우와, 하는 소리를 냈 다. “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우와, 우 와 - 그것은 와우전문대(瓦于專門大)를 다니고 있거나 다녔던 사람 들의 입에만 붙어 있는 독특한 의성어였다. 놀람과 기쁨, 혹은 함성 이 필요할 ? 일종의 학교 전통이라도 되는 양 내남할 것 없이 매 번 그런 소리를 입에 올리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그런 의성어가 나왔다는 건 곧 그녀가 거기 출신이라는 얘기였다. “무슨 학과예요?” “창작문학과.” “우와, 우와, 너무 반갑다. 난 연극영화과예요.” 느닷없이 손을 내밀며 그녀가 악수를 청했다. 반갑다는 뜻인 줄 알 고 얼결에 그걸 잡았지만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손을 잡고 흔들 며 그녀가 이렇게 입을 열었다. “저기 있죠, 우리 내일 다시 만나요. 약속이 있어서 지금 가야하 니까 내일 꼭 다시 만나요, 네? 오후 세 시에 학원 끝나고 곧장 이 리로 올게요.” 잡았던 손을 놓고 그녀는 옆에 놓아 두었던 가방을 열었다. 곧이어 흰 스카프가 그녀의 손에 이끌려 나왔고, 대단히 숙련된 손놀림으로 그녀는 그것을 목에다 맸다. 동작이 완료된 뒤에 그녀가 다시 나를 보았다. “어때요, 예뻐요?” 소제목 : 낙양빌딩 지하의 커피숍에서... 낙양빌딩 지하의 커피숍에서 다소 들뜬 기분으로 오장주 (吳長注) 형에게 전화를 했다. 그 형한테 전화를 한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들뜬 건 결코 아니었다. 술만 입에 댔다 하면 진드기로 변하는 그 형, 심심해서 찾아온 거지 늘어지게 술판 벌이자고 찾아온 게 결코 아니라서였다. 그러니까 기분이 들뜬 건 전혀 다른 사람, 장주 형을 만나러 오는 길에 만난 그녀 때문이라고 해야 할 터였다. 본인의 주 장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장주 형이 근무하는 ‘개똥 같은 출판사’로 전화를 걸면서도 나는 내내 그녀에 관한 생 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게 부드러운 사로잡힘, 어떻게 말로 형 용할 수 있으랴. “새꺄, 지금 몇 시냐?” 장주 형, 나의 목소리를 확인하고 나서 대뜸 핏대부터 올렸다. 세 시경에 오겠다고 했는데 벌써 네 시가 지났으니 그럴 만도 한 건가. “미안하우, 형. 하지만 서울 살면서 한 시간쯤 늦으면 그래도 양 호한 거 아뇨?” “이게 업자 생활하더니 선배고 나발이고 완전히 인생의 경계가 없 어졌구만.” “내려와, 형. 커피숍에 있을게.” “알았어, 새꺄. 기다려.” 전화를 끊고 나서 어슬렁어슬렁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허름하게 차 려입은 나이든 아저씨 둘, 화장을 짙게 하고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사십대 중반쯤의 아줌마 하나, 손님이라곤 그렇게 셋이 전부였다. 제일 끝쪽의 자리로 가 앉자 다홍빛 원피스를 입은 아가 씨가 물잔을 들고 따라와 심드렁한 표정으로 뭘로 할래요, 하고 물 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녀 는 이내 등을 돌리고 가 버렸다. 기다리려면 기다리고, 나가려면 나 가고, 네 맘대로 해라 이놈아, 하는 표정 같았다. 나른한 봄날 오후 라서인가. 심심해서 탁자 위에 놓인 광고 성냥갑에서 성냥 한 개비를 꺼내 입 에 물고 눈을 감았다. 그걸 질겅질겅 씹기도 하고 요리조리 돌려보 기도 하면서 그녀, 또다시 하얀 손의 주인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했 다. 재미 있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장주 형도, 시간의 흐름 도 나로 하여금 까맣게 잊게 했다. 백수건달인 나는 보았네 하얀 손이 하얀 스카프를 훔치는 백주------ 오롯이 말과 사물이 증류되는 것 같 怒嗤? 단언코 그런 게 시가 되리라는 자신감과 나는 아주 먼 거리에 있었다. 내가 정말 시를, 시 같은 걸 쓸 수 있을까. 소제목 : 정신 차려, 새꺄!... “정신 차려, 새꺄! 이젠 선배 보고 인사도 안해?” 화들짝 놀라 눈을 뜨자, 어느새 검은 플라스틱 테의 안경을 코끝에 걸친 장 주 형이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깜짝이야 ....... 다 날아가 버렸네.” 입에 물었던 성냥개비를 뱉아내며 혼잣말처럼 나는 투덜거렸다. “뭐가 날아가?” “되게 꼬치꼬치 따지네 ....... 있어, 그냥, 그런 거.” 성냥개비를 재떨이에 던지고 나서 나는 자세를 고쳐앉았다. “백수 경력 느니까 시건방도 느누만. 잡소리 말고 뭐 좀 먹으러 가자. 배 고 ?미치겠다. 그리고 미리 말하겠는데, 난 오늘 술 못 마셔.” “형이 술을 못 마시면 누가 마셔?” “새꺄, 어제 새벽 네 시까지 펐어. 아침 점심 다 굶었단 말야.” “자업자득 아뇨?” 면도도 하지 않고 머리카락도 제멋대로 헝크러진 그를 보며 나는 계속 약을 올렸다. “빌게.” 상황은 짧게, 그가 만들어낸 우스꽝스런 동작 하나로 간단히 종료 됐다. 합장하듯 손을 모아 비는 시늉을 하고 나서 그가 먼저 자리에 서 일어났다. 도리없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어슬렁어 ? 렁 그를 따라갔다. 고작 열 걸음쯤 걸었을까. 커피숍 옆의 국수 전 문점으로 허겁지겁, 뒤따라가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그는 뛰어들 어갔다. 조금만 더 약을 올렸더라면 나를 잡아먹었을런지도 모르겠 단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살아?” 땀을 뻘뻘 흘리며 우동을 집어삼키는 그를 내려다보며 내가 물었 다. 우동은 그 혼자만 시키고, 나는 물컵을 손에 들고 있었다. “쌔꺄, 너 인생이 ...... 씨팔, 먹는 데 말 시키지 마. 우동 먹다 체하면 구충약 먹어야 돼.” “낙양의 지가를 올리겠다는 출판사는?” “응, 그거? 여전히 개똥 같애. 이번엔 사상의학에 관한 책을 만들 었는데 ...... 하나 줄까? 네가 달라면 사장 모르게 한 권 훔쳐올 게.” 코끝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올리고 나서 후루룩, 카아, 소리를 내며 그는 우동 국물을 마셨다. “어휴, 정말 이해를 못하겠군.”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소제목 : 너, 아직도 시 쓰겠다는... “너, 아직도 시 쓰겠다는 지랄법석이냐?” 탁, 소리나게 우동그릇을 내려놓고 상체를 뒤로 벌렁 젖히며 그가 물었다. “지랄법석? ......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는 그를 보았다. “야, 꼭 길길이 날뛰고 발광을 해야 지랄법석인 줄 아냐? 요즘 같 은 세상엔 시를 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지랄법석 이 되는 거야. 알간?” “그럼 지랄법석은 내내 형이 부린 거네 뭐.” “내가 아직도 시 같은 것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줄 아냐? 그건 임 마, 전설 따라 삼천 ?〕?나오는 얘기야. 너도 정신 차리고------ 흠, 굳이 뭐든 쓰고 싶으면 차라리 소설을 써라, 소설.” “시나 소설이 뭐 골라 잡아 오천원짜리 싸구려 물건인가? 난 시인 이 되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과연 시를 쓸 수 있을까, 그런 것 때문 에 더 짜증이 나는 거라구.” 실망스런 표정으로 나는 인상을 썼다. “그럼 더 잘됐네. 해골 복잡해지기 전에 포기할 수 있으니까 얼마 나 좋아? 창작문학과 ...... 거기 다니면서 교수들한테 들은 얘기, 애들 사 이에서 저 잘났다고 떠들던 얘기 ...... 사 ?나와봐라 임마, 창문 과, 하이고, 창문이 안보인다, 창문이 안 보여.사방이 캄캄한 벽이 란 말야, 알것냐?” “젠장, 모처럼 조언 좀 받으려 했더니 조언은 커녕 완전히 똥탕 튀기는구만, 똥탕 튀겨.” "이렇게 말하는 내 기분 좋겠냐? 이런 게 현실이라는 거야, 현실” 벌겋게 부풀어오른 입을 냅킨으로 닦으며 그가 나를 보려보았다. “현실이니까 가서 발 닦고 자라, 시를 쓰겠다는 놈하곤 술도 안 마시겠다, 그거요?” “시는 있다, 없다, 있다, 없다, 있다,없다 ...... 그런 거야. 나 한테 시비 걸지 마.” “거 참, 어제 마신 술이 아직 안 깬 거유?” “안 깬 게 아니라 열 받는 소리 자꾸 하니까 다시 취하는 거다, 왜?” “알았어. 그만 꺼질게, 형도 꺼져.” 소제목 : 해질 무렵, 혼자서 터덜터덜... 해질 무렵, 혼자서 터덜터덜 시내 대형서점으로 갔다. 장주 형의 악담에도 불구하고 시집 코너엔 엄청나게 많은 시집들이 더미더미 쌓여 있었다. 누가 저렇게 많은 시를 쓰고, 누가 저 많은 시집들을 사다 읽을까. 길을 오가는 어떤 애들도 시집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 는 걸 본 적이 없다는 사실과 장주 형의 비관이 거기서 묘하게 연결 고리를 형성하는 것 같았다. 그럼 저 많은 시집들이 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좋은 임자 만나서 시집을 가면 다행이지만, 아무도 데려가 지 않으면 오래오래 외롭게 세상 떠돌다 결국엔 난지도로 보낼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어느 시집에도 선뜻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런 시를 내가쓰겠다는 건가, 지금? 어슬렁어슬렁 이번엔 소설 코너로 갔다. 시집보다 더 많은 소설들 이 저마다 자신을 선택해 달라는 듯 시집과는 비교도 안될 장도로 화려한 장정을 과시하고 있었다. 얼핏 고기를 넣어두는 정육점 진열 창의 진분홍 불빛이 떠오르고, 그 다음엔 그와 똑같은 불빛 속에 앉 아서 무한정 손님을 기다리는 창녀들의 모습이 뇌리를 스쳐갔다. 울 컥, 욕지기가 치밀 ?더이상 거기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문득 천애 고아가 된 것 같고, 정말 세상 살맛 안 난다는 생각이 들어 나 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거리는 거였다. 스물다섯, 그렇잖아도 나날이 막막한데 도대체 뭘로 남겨진 인생을 버티라는 거지? 허청허청 밖으로 나오며 장주 형 개새끼, 하고 욕했다. 자기가 글 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후배한테까지 그렇게 귀신 씨나 락 까먹는 소릴 한다는 게 도무지 말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서였다. 시는 있다, 없다, 있다, 없다, 있다, 없다 .....고? 뉘엿뉘 엿 해 떨어지는 서편 하늘에서 갑작스럽게 우박이라도 쏟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한번 씨팔, 하는 소리를 뱉아냈다. 이번에는 장주 형을 향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나도 모를 막연한 무 엇,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인가를 향해서였다. 터덜터덜 인도를 따라 걷다가 레코드숍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시 끄러운 랩송이 흘러나오는 그곳에 서서 잠시 송가희(宋佳熙)를 생각 했다. 그녀라면 혹시, 지금과 같은 내 기분에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장주 형과는 달리, 그녀는 학교를 졸업한 직 후부터 지금까지 취직도 하지 않고 오직 소설만 써온 독종이었다. 재학시절에도 소설을 가르치는 모든 교수들이 그녀가 제출한 소설에 대해 마르고 닳도록 칭찬을 했었다. 우리 동기들 중의 어느 누구도 가희의 재능을 의심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재능에 대한 자신감으로 인해 그녀의 주변엔 친구가 별로 없 었다.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도 그래서 나에겐 부담이 될 수밖 에 없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만한 재능이 없는 것 같았 고, 그런 내 앞에서 그녀는 언제나 투사와 같은 어조로 문학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곤 했기 때문이었다. 술을 마시고 한번, 그녀와 같이 잘 뻔한 적이 있었다. 둘 다 억병 으로 취한 뒤에 내가 먼저 물었다. 너 오늘 나하고 같이 잘래? 그녀 가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말하는 문학은, 임마, 섹 스 같은 것도 얼마든지 초월할 수 있는 거야. 그녀의 말을 듣고 나 서 나는 모든 걸 포기해 버렸다. 포기하고 약을 올리듯 이렇게 말했 다. 넌 남자하고 그거 할 때도 문학 얘기 할 기집애야, 알아? 송가희 같은 자세는 필요하 嗤? 송가희 같은 여자는 별로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득 어떤 교수에게서 들은 말 한 마디 가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 문학은 자기 인생을 썩혀서 다른 것들 의 거름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송가희는 아직 썩지 않 았을 것이고, 썩지 않았으면 여전히 전투적인 자세로 나를 곤욕스럽 게 할 터였다. 이런 날 그런 애 만나서 곤욕을 치르느니, 차라리 집 에 가서 혼자 오징어 다리 씹으며 소주를 마시는 게 훨씬 나을 거라 는 결론이었다. 마음을 정하고 등을 돌리자 내일, 나에겐 하얀 손의 주인을 만날 수 있는 내일이 있다는 생각이 구원의 빛처럼 번뜩 뇌리를 스쳐갔 다.오 내일, 사랑의 가능성처럼 온전하게 비워진 예감의 텃밭이여! 소제목 : 마법에 걸린 게야... 세 시 정각이었지만 흰 손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귀찮은 목격 자를 떨쳐내기 위해 잔꾀를 부린 건가,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얼떨결에 만난 어제, 그녀와 나는 서로의 이름도 확인하지 못하고 헤 어진 사이였다. 약속에 대한 부담감이나 의무감 따위, 그녀의 입장에 선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을 터였다. 자신이 시장바 닥에서 도둑질 하는 걸 목격한 남자------ 과연 만나러 오고 싶을까. 갑자기 내 자신이 너무너무 웃기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 히 말하면 지난밤 누워서도 나는 내내 그녀 생각에 사로잡 혀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과 함께 떠오르는 이미지------ 오월의 부신 햇살을 받으며 그녀가 쉼없이 허공에서 깡총거리고 있었다. 찰 랑거리는 단발머리, 흰 손과 화사한 얼굴을 올려다보며 알 수 없는 안타까움에 아주 여러 번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른 아침, 돋을볕 속에서 미끄러져내리는 이슬방울을 바라볼 때처럼 턱없이 가슴 조리 게 하는 그녀------ 팽팽한 긴장감과 알 수 없는 조바심 때문에 나 는 오래 오래 잠들 수 없었다. 약속 시간이 읜� 세 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나는 서둘렀다. 입고 나갈 청바지를 고르고, 랜드로바를 크리너로 닦고, 위에 걸칠 옷 을 고르느라 꽤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결국 흰 바탕에 푸른 체크무 늬 남방을 고르고 나서 정성스레 그것을 다렸다. 목욕을 하고 벽에 달라붙어 물구나무서기를 하기도 했지만 시간은 족쇄를 달아놓은 것 처럼 더디 흘렀다. 아침도 거르고 점심을 빵과 커피로 때운 뒤, 도저 히 더는 못 견디겠다는 생각으로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세 시의 약속을 위해 어이없게도 정오 무렵에 집을 나선 것이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늘상 가던 곳으로 갔다. <스타 스페이스>라는 종 합연기학원이 건너다보이고, 그 뒤쪽으로 와우전문대가 올려다보이는 곳__그녀가 스카프를 훔치던 화류시장이 바로 나의 행선지였다. 거기, 지상의 모든 물건들이 결집돼 있는 듯한 화류시장은 와우전문대를 다 니던 시절부터 나에게는 또다른 배움의 터전이 돼 있었다. 놀이의 터 전, 배회의 터전, 방황의 터전------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거기서 그녀를 만났다는 사실 한 가지만을 되새기며 나는 어슬렁어슬렁 시장 바닥을 뭬틈冒域�. 기다리는 시간, 정해진 약속,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되새길 때마다 어김없이 부풀어오르는 행복감------ 마법에 걸린 게야, 혼자 비죽이 웃으며 그렇게 중얼거리기도 했다. 두어 번 여자애를 사귄 적은 있었지만 이처럼 마음 떨리고 조바심을 쳐본 적이 일찌기 내겐 없었다. 시큰둥하다가 삐그덕, 삐그덕거리다 와르르, 그러면 모든 게 끝이었다. 내쪽에서도 여자애쪽에서도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콘크리트 벽에다 보통못을 박으려 한다는 게 얼마 나 어리석은 짓인가. 송가희 � 그렇게 삐그덕거리다 와르르, 미련없이 망치질을 포기한 인물 중 하나였다. 그녀가 못이었건 내가 망치였건, 내가 못이었건 그 녀가 망치였건,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가 되는 건 언 제나 벽일 뿐이었다. 벽을 허물기 위해선 이념이 같아져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었지만, 그렇게 거창한 문제를 놓고 장구한 시간 동안 삐그덕거릴 필요가 뭔 가. 송가희와 나는 미련없이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잦은 만남 에 종지부를 찍음으로써 다시 편안한 친구 관계가 된 것이었다. 그러 니까 ‘사랑과 우정 사이’가 뭔지를 아직 나는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소제목 : 옴머, 남자가 손수건을... 아. 입을 벌리고 나도 모르게 번쩍 손을 들었다. 백화점 4층에서 5층으 로 올라서는 지점, 거기서 나를 발견하고 가볍게 손을 들어올리는 그 녀를 향해서였다. 애써 웃음을 지었지만, 갑작스럽게 긴장감이 풀려 온몸이 나른해지 는 것 같았다. 경쾌한 걸음으로 커피숍을 향해 다가오는 그녀, 꽉 끼 는 청바지에 토끼 그림이 찍힌 흰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어깨엔 어제의 그 가방을 메고 있었지만, 얼핏 보기에 토끼 한 마리가 깡총 깡총 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는 것 같았다. “넘넘 미안 萬�. 많이 기다렸죠?” 자리를 잡고 앉으며 정말 미안하다는 듯 그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얼굴이 발그레하게 상기되고 이마와 콧등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돋아 있었다. 아침에 정성스레 다려 청바지 뒤에 찔러넣은 손수건을 꺼내 나는 그녀에게 건넸다. “오래되지 않았어요. 이제 이십분인 걸요.” “옴머, 남자가 손수건을------ 너무 감동적이다.” 손수건을 건네받고 말끄러미,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그녀가 나를 보 았다. “무안하게------ 뭐 마실래요?” 유니폼을 입은 아가씨가 岺�을 받으러 오는 걸 보며 내가 물었다. 망설이지 않고 오렌지 쥬스, 하고 말한 뒤에 그녀는 손수건으로 이마 와 콧등을 눌렀다. 별다른 망설임 없이 나도 그녀와 같은 걸 달라고 했다. “어쩜 내가 안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하고 있었죠?” 두 잔의 쥬스가 날라져 온 뒤에 그녀가 물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약속을 했으니까------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든 거죠. 우린 아직 이름도 모르잖아요.” 내면의 떨림을 노출하지 않 � 위해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나는 대답 했다. “아, 이름------ 좋아요. 그럼 그거부터 해결해요. 제 이름은 ------ 음, 듣고 나서 절대 웃으면 안돼요. 제 이름은 라몽이예요. 라, 몽.” “라------ 몽?” 손에 들고 있던 쥬스잔을 내려놓고 나는 자세를 고쳐앉았다. “어때요, 괜찮죠?” “나몽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녜요? 북한에서처럼 두음법칙을 적용 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고개를 갸웃하며 나는 물었다. “무슨 상관? 난 내 식으로 하는 거예요. 라몽------ 뭔가 신비감 이 느껴지지 않아요? 기회가 오면 그걸 예명으로도 쓸 거다, 그거예 요.” 윙크를 하듯 한쪽 눈을 찡긋하고 나서 그녀는 쥬스잔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물었다. “북한에 가면 인민배우 할 이름인데------ 누가 지었죠?” “울엄마.” “꿈 많은 여자, 뭐 그런 뜻인가요?” 나의 물음에 그녀는 빨대를 입에 문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소제목 : 그럼, 오라버니라고 불러? “아 참, 생각난 게 있다. 오면서 생각했는데...... 학교 선배이고 나보다 나이도 두살 더 많으니까 지금부터 편하게 말 놔요. 괜찮죠?” “스물 셋...... 흠, 그것도 나쁘진 않겠네. 내 이름은...... 좋아, 나도 조건을 달 테니까 듣고 나서 절대 웃으면 안돼.” 이상한 친근감을 느끼며 나는 거리낌 없이 반말을 시작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렇게 쉽게 반말을 건넨 적이 없었는데 어쩐 일인가. 정 말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런 이상함이 어색한 예절보다 훨씬 편안하 게 느껴지는 게 더욱 이상했다. “절대, 안 웃을게.”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쥬스잔 바닥에 담겨 있던 얼음 한 조각을 꺼 내 입에 넣었다. 웃지 않기 위해 저러는 것인가 하는 생각보다도, 그 녀의 말투가 나와 똑같아졌다는 사실 때문에 아주 잠시 나는 당황하 지 않을 수 없었다. 꽤심해서가 아니라 시간을 앞질러가는 듯한 친근 감을 도대체 어떻게 갈무리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 이름은 영어로 하면 에러야,에러.” “에러?...... 실수?” “뭐 그런 것과 엇비슷한 뜻이야. 오, 류.” “류?...... 우와, 이름 너무 멋있다!” 말을 하고 나서 아그작, 그녀는 입안에 넣고 있던 얼음을 깨물었다. “그 이름 지어준 사람 원망만 하며 살아왔는데, 멋 있다고?” “류! 거짓말 아냐, 정말 멋있어. 오빠라고 해야 하나 선배라고 해야 하나, 오면서 은근히 고민했었는데...... 지금 금방 그게 해결됐어.” “어떻게?” 다시 한번 자세를 고쳐앉으며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는 그녀를 보 았다. “류...... 이렇게 이름을 부르는 거야. 건방지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 그 이름이 너무 좋아서 그러는 거니까 이해해야 돼. 선 배이고 오빠라는 거 다 인정해줄 테니까 이름을 부르게 해 줘, 응?” 고개를 갸웃, 눈을 찡긋, 애교스런 표정으로 그녀가 턱을 들고 말했 다. “흠, 말도 놓고 이름까지 부르겠다...... 그러니까 결국 나하고 맞먹겠다 그거네?” “그럼, 오라버니라고 불러?” 입을 삐죽 내밀며 그녀가 눈을 흘겼다. “좋아, 편한 대로 해. 류와 몽...... 어차피 벗어던질 수 없는 게 이름이니까.” 나의 말에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그녀는 손목시계를 보 年�. 어제처럼 서둘러 가버리려는 것인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는 그녀를 보았다. “우리 지금 여기서 나가야 돼.” “왜?” 가방을 어깨에 걸치는 그녀에게 놀란 목소리로 나는 물었다. 장난을 칠 때처럼 헤죽이 웃는 얼굴로 그녀, 상체를 앞쪽으로 내밀며 붕어처 럼 입을 뻐끔거렸다. 뭔가, 할 말이 있다는 시늉이었다. 귀를 그녀의 입 앞으로 갖다대자 딱 한마디, 온몸이 저릴 정도의 귓속말로 그녀가 이렇게 속삭였다. “왜냐하면, 어제처럼 류 같은 사람이 또 따라올까봐.......” 소제목 : 미국식으로 엿먹어라 라몽이 나를 데려간 곳은 <시네마 파라다이스>라는 극장이었다. 그곳은 젊은 남녀들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운청동의 중심부에 자리잡 은 복합 영화관이었다. 몇 번인가 그곳에서 개봉 영화를 본 적이 있 었지만 그녀가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리라곤 정말이지 꿈에서도 상상 을 할 수 없었다. 그곳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왈, 지난주부터 보려고 한 영화라서 어 쩔 수 없었다는 말을 그녀는 내게 했다. 말을 듣고 나서 화가 난 듯 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자 또다시 끼깅, 어깨를 움츠리며 어제와 똑 같은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그 표정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서 일부 러 인상을 쓴 거라고 말하자 갑작스럽게 오른손 중지, 그걸 곧게 펴 서 내 눈앞에다 갖다댔다. 미국식으로 엿 먹어라, 그런 시늉인 것 같 았다. “뭘 보자는 거지?” 극장 건물 입구에 나란히 달라붙은 세 장의 포스터와 스틸 사진들을 보며 나는 물었다. “트루 로맨스.” 가볍게 대답하고 나서 그녀는 매표소 앞으로 갔다. 금요일 오후, 매 표소 앞은 한산했고 시간도 절묘했다. 4회 상영 시간으로부터 15분 전. “시간 잘 맞춰왔지?” 끊어온 입장권을 흔들며 그녀가 다가왔다. “시간을 잘 맞춘 게 아니라 도망을 잘 온 거 아냐?” 어제처럼 류 같은 사람이 또 따라올까봐------ 그녀의 귓속말이 생 각나서 건넨 질문이었다. “무슨 얘기야?”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가 나를 보았다. “화류시장------ 모르겠어?” 다그치는 눈빛으로 나는 그녀의 가방을 흔들었다. “아이, 참! 장난으로 한 말이야. 내가 뭐 전문인 줄 아나------.” 골이 난 것처럼 뾰로통하게 입을 내밀며 그녀가 나를 흘겨보았다. “전문------ 아닌가?” 빙그레 웃으며 약을 올리듯 나는 말했다. “씨이------ 나 갈래!” 탁,탁,탁, 소리나게 발을 구르며 그녀가 내게서 등을 돌렸다. 정말 갈 것 같은 기세였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나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하아, 농담이야, 농담. 정말 농담이었다니까?” “한번만 더 그런 농담하면 끝장이야. 각오해.” 짐짓 독이 오른 표정으로 선언하듯 그녀가 말했다. 알았다는 뜻으로 그 즉시 나는 그녀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기다렸다는 듯 그녀,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권총 모 瑛� 만들어 뱅, 뱅, 하고 나를 쏘는 시늉을 했 다. 으윽, 하고 죽는 시늉을 하며 나는 그녀쪽으로 쓰러졌다. 물론, 날 렵하게 그녀가 피하는 바람에 중심을 잡기 위해 매표소 앞까지 달려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까르르, 까르르, 고소하다는 듯 그녀가 배를 잡 고 웃었다. 소제목 : 류, 혹시 나 훔치고 싶지 않아? 이층 상영관으로 올라가 그녀와 나는 매점으로 갔다. 그녀는 팝콘 한 봉을 샀고, 나는 자동판매기에서 캔커피 하나를 뽑았다. 대기실 좌 석을 잡고 앉은 뒤, 문득 생각났다는 듯 그녀가 검표대로 가 영화 팸 플릿 한 장을 가져왔다. 검표대 옆에서는 영화음악 CD와 카세트 테 이프를 팔고 있었다. 머리를 맞대고 <트루 로맨스> 팸플릿을 들여다 보며 그녀는 팝콘을 먹고 나는 캔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__사랑은 분노하는 자의 것, 폭풍 속을 질주하는 초강력 스피드 파 워! __액션의 무한궤도 진입, 뗍嗤렝막?한탕하고 멕시코로 뜨자! __어차피 인생은 도박, 젊음은 거칠수록 좋다! 주연배우 크리스챤 슬레이터가 권총을 손에 들고 묘하게 웃으며 라 몽과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품에 표범무늬의 반코트를 입은 여자가 안개꽃과 분홍 카네이션이 조화를 이룬 꽃 한다발을 들고 안 겨 있었다. 그걸 내려다보며 아주 은밀하고 낮은 목소리로 나는 입을 열었다. “하얀 스카프에 대해 말해 줄 수 있어?” “왜 훔쳤냐고?” 자세를 전혀 바꾸지 않고 골똘하게 팸플릿을 들여다보며 그녀도 역 시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음, 간단해. 갑자기 내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가 끔 그럴 때 있잖아? 짜릿한 스릴을 느끼면서 뭔가를 확인해보고 싶을 때. 알아?”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그녀가 나를 보았다. 내 표정을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뭔가가 막막하게 느껴져서 나는 아무런 반응도 나타낼 수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배시시 웃던 그녀, 아까처럼 다시 입을 내 귀에다 갖다댔다. 온몸을 저리게 만드는 그 속삭임에 아뜩, 나도 모르 게 정신이 가무러지는 것 같았다. “류------ 혹시 나 훔치고 싶지 않아?” 소제목 : 난 엘비스하고 잤을 거야... <트루 로맨스>__클레런스와 알라바마의 사랑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현실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엘비스 프레슬리와 홍콩영화 의 액션배우들을 우상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클레런스의 생일이다. 혼 자 술집에 앉아 술을 마시며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해 이렇게 주 절거린다. “<교도소 록(Jailhouse Rock)>에서 그는 재즈의 열정을 보여줬어. 야하고 도도하고 뻔뻔스러워. 그 영화에서 그는 아무 거리낌없이 로 큰롤과 빨리 살다죽는 젊음과 매력만 남겼어. 난 시골 주민 같은 그 처럼 되고 싶어. 엘비스는 잘 생겼어. 난 호모는 아니지만 엘비스는 여자들보다 더 예뻐. 난 늘 이렇게 말해. 남자하고 꼭 자야 된다면, 그래서 인생을 걸어야 한다면 난 엘비스하고 잤을 거야.” 장면이 바뀌고, 디트로이트 시티를 배경으로 알라바마의 독백이 흐 른다. __난 플로리다의 텔라하세에서 고속도로와 샛길을 달려 진실한 사랑 을 찾게 된 디티로이트로 왔다. 백만년을 생각했더라도 디트로이트에 진정한 사랑이 있다는 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나에게 일어난 사건 들은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다. 하 嗤?이 꿈은 현실이었고 우리 인 생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클레런스에게 난 물어봤다. 왜 세상은 몰락 해가고 모든 게 엉망이 돼 가냐고. 그는 그게 정해진 길이지만 다른 길도 있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길이다. 정해진 길이 있지만 가끔은 다른 길로도 가는 것이다. 언제나 생일이 되면 영화를 보는 클레런스, 그날도 예외없이 홍콩영 화를 보러간다. 텅 빈 극장에 앉아 혼자 영화를 보는 그에게 팝콘을 엎지르며 알라바마가 접근한다. 어느새 친해져버린 두 사람, 영화를 보고 밖으로 나와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다. 알라바마 : 난 영화를 본 다음에 항상 파이를 먹어요. 당신도 영화를 본 다음에 파이를 먹나요? 클레런스 : 나도 영화를 본 후 꼭 먹죠. 알라바마 : 같이 먹으러 갈래요? 클레런스 : 꼭 먹고 싶군요. 소제목 : 플로리다 백인 갈보라지만.. 라는 식당. 또다시 엘비스 얘기를 늘어놓은 뒤에 클레런스 는 비로소 알라바마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직업, 고향, 좋아하는 색 깔, 좋아하는 배우, 좋아하는 음악------ 그리고 애인이 있느냐에 대 해. 다소 쑥스러워하면서도 알라바마는 차례대로 대답한다. 직업은 ‘기억 안나요’, 고향은 ‘몰라요’, 좋아하는 색깔은 ‘글쎄요, 검 정?’,좋아하는 배우는 ‘버트 레이놀즈’, 좋아하는 음악은 ‘<폭탄 같은 사나이>를 부른 여자 그룹’, 호감이 가는 형은 ‘설탕처럼 멋 진 인생을 즐길 줄 아는 謙?루크 같은 남자’, 싫어하는 형은 ‘중 동사람들’------ 그리고 남자친구가 있냐는 질문에 대해선 이따 물 어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극장이 텅텅 비어 있었는데 왜 자기 옆자 리로 왔냐는 클레런스의 질문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이 좋은 남자 같아서------ 일부러 팝콘을 쏟았어요. 돈은 내가 낼게요. 이제 어디로 가죠?” 클레런스의 직장이자 거처가 있는 실내. 둘이 섹스를 하는 동안 <상 처받은 새(wounded bird)>라는 노래가 애잔하게 흘러나온다. ‘우리 가 상처 받은 두 마리의 새라고 상상해보세요. 함께 있는데도 외로워 요------.’ 깜빡 잠들었던 클레런스가 눈을 떴을 때, 알라바마는 몸 에 담요를 두르고 옥상의 광고탑 앞에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울고 있다. 그녀에게 다가간 클레런스, 왜 우냐고,자신이 잘못한 게 있냐고 묻는다. 그러자 알라바마, 극장에서의 일이 우연이 아니었으며 자신이 콜걸이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클레런스의 사장이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클레런스와 자 줄 여자를 전화로 주문했다는 것. 그래서 극장으 로 가 의도적으로 클레런스에게 접근을 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의외의 반전이 시작된다. 알라바마 : 화났어요? 클레런스 : 아니, 내 생애 최고의 밤이었소. 뭔가 좀 이상했죠. 당신 이 날 너무 좋아했으니까. 당신이 옷 벗고 남자가 아닌 걸 보고 그제 서야 안심했어요. 알라바마 : 차분하게 좀 굴지 말아요. 집에 가서 텔레비전이나 보라 구요. 난 ‘클레런스에게’란 말밖에 쓸 수가 없었어요. 나, 알라바마 는 진실을 말한다. 그에게 진실을 말해서 드렉슬에게 돌아가라고 화 내면 가서 죽자고! 클레런스 : 드렉슬이 뭐죠? 羌錯摸?: 입 좀 닥쳐요! 난 콜걸이 된 지 사일째인데 당신은 세 번 째 손님이예요. 난 파손품이 아니라구요. 플로리다 백인 갈보라지만 난 정말 좋은 여자예요. 그래서 난 관계를 할 땐 철두철미하죠. 철저 한 일부일처주의고요. 클레런스 : 한 남자하고만? 알라바마 : 그래요, 당신과 사귄다면 난 오직 당신만을 원해요. 이제 이 말을 해야겠어요. 아까 생애 최고의 밤이었다는 말은 육체적인 걸 뜻하나요? 클레런스 : 지난밤은 전체가 최고였죠. 당신하고 보낸 것처럼 재밌어 본 여자가 없었소. 사 퓽結? 당신은 엘비스 같고, 제니스 같고, 쿵후 영화 같고------. 알라바마 : 클레런스, 이런 말 하는 게 웃길 거예요. 난 당신을 하룻 밤 알았고 지금은 다시 콜걸이지만 당신을 사랑하나봐요. 클레런스 : 잠깐. 난 지금까지 일을 올바로 투시하려고 노력했소. 당 신이 날 사랑한다고 해서 나도 사랑한다고 말하면 당신 거짓말에 난 죽을 거요. 알라바마 : 거짓말이 아녜요. 지금 이 순간부터 맹세코 다신 거짓말 을 안 하겠어요. 소제목 : 너무 로맨틱 했어요. 다음날, 클레런스와 알라바마는 결혼한다. 알라바마의 만류에도 불구 하고 클레런스는 포주 드렉슬의 소굴로 알라바마의 가방을 찾으러 간 다. 그곳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드렉슬과 그의 부하를 권총으로 죽 인다. 가방을 찾아온 클레런스에게 눈물 젖은 얼굴로 연신 키스를 퍼 부으며 알라바마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한 일은------ 너무 로맨틱했어요.” 거기서부터 영화는 전형적인 헐리우드 스타일로 전개된다. 알라바마 의 소지품이 들어 있는 줄 알고 클레런스가 찾아온 가방에 마약이 하 나 가득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드렉슬의 배후에 있던 마피아가 클레 런스와 알라바마를 잡으러 나서고, 그것을 처분하기 위해 두 사람은 로스앤젤레스로 도망친다. 영화배우가 되기를 꿈꾸는 클레런스의 친 구에게 20만불에 마약을 처분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우여곡절을 겪 으면서 클레런스와 알라바마는 마약 밀매업자인 영화감독을 만나 거래를 성사시키게 된다. 하지만 그 순간, 대기하고 있던 마피아와 경찰, 밀매업자 간의 끔찍 스런 총격전 속에서 클레런스는 눈에 총을 맞게 되고 알라바마는 죽 지 말라고 울부짖는다. 총상을 입은 클레런스를 부축하고 돈가방까지 챙겨 밖으로 빠져나온 알라바마, 클레런스를 차에 태우고 멀리멀리 도망친다. 장면이 바뀌면 태양이 떠오르는 해변, 아내와 남편과 아이가 행복하 게 어울리고 있다. 영화가 시작될 때처럼 알라바마의 독백이 다시 흐 른다. __지옥 같은 날이었다. 지금도 총소리가 들려오고 폭력의 냄새가 진 동한다. 내 영혼이 맑고 진실했음을 난 똑똑히 기억한다. 그 일은 내 기억에 서 지워버려야 한다.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지만 그는 너무너무 멋졌다. 그는 가끔 내게 물어본다. 그때 총알이 심장을 뚫어 자신이 죽었다면? 그러나 난 항상 웃으며 죽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 다. 고통스럽게도 누구나 새벽의 별처럼 사라지게 되고, 세상일은 다 그런 것 같다. 그랬다면 아마도 난 엘비스라는 아들을 못 가졌을 것 이다. 끝. 소제목 : 나, 배고파 ... 관람실에서 나온 직후,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게 맡기고 라몽 은 화장실로 갔다. 그동안 나는 검표대 옆에서 <트루 로맨스>의 영화음 악 CD를 샀다. 겉면, 영화 제목 위에 ‘very cool music’이라는 문구 가 붙어 있었다. 영화의 자막에서처럼 대단히 ‘멋있는’ 음악이라는 뜻 인지, ‘서늘한’ 음악이라는 뜻인지, 그도저도 아니면 ‘썰렁한’ 음악 이라는 뜻인지를 모르겠어서 혼자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거, 샀어?” 발그레하게 뺨이 달아오른 라몽, 화장실에서 뭬틸?내 어깨에 걸린 가방을 벗겨내며 물었다. “음, ‘상처 받은 새’...... 생각나? 좋은 거 같아서 샀어.” 빙그레 웃으며 나는 그녀를 보았다. 영화를 보는 동안의 집중력 때문 인지 그녀의 표정은 다소 몽롱해져 있는 것 같았다. 뭔가 말을 꺼내야 할것 같았지만, 기분이 몽롱하기는 사실 나도 마찬가지라서 퍼뜩 떠오르 는 말이 없었다. 단순하게 영화관을 빠져나가는 것 말고, 다른 식의 제안 이나 권유, 혹은 허황된 계획일지라도. “나, 배고파......” 어깨를 늘어뜨리고, 아주 조금 입을 빼물며 그녀가 나를 보았다. 그녀 의 말을 듣고 나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느덧 저녁 여섯시가 지 났는데 둘다 아직까지 점심도 못 먹었으니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 도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우선 먹는 일, 그것밖에 없을 터였다.스피노 자가 심던 사과나무?..그것도 밥먹고 난 뒤의 금강산 경치일 수밖에 없다 는 결론! 그녀와 나는 서둘러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5월, 훈훈한 저녁무렵의 공 기가 도발을 부추기는 자극처럼 은밀하게 가슴 속으로 밀려들었다. 금요 일 저물 窩繭撰?寬? 운청동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영 화관 맞은편의 <우드스톡>이라는 대형 레스토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저기 카페와 레스토랑을 고르기 위해 시간 을 허비할 게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으로 들어가자는 표정 같았다. 그곳, <우드스톡>은 전면 전체가 통유리로 처리된 이층 레스토랑이었다. 일층에는 별로 자리가 없어 그녀와 나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마침 창 쪽 끝자리가 비어 있었다. 앉은 자리에서 편안하게 영화관 앞길을 내려다 볼 수 있는 美?눼? 내 맞은편에 앉은 그녀, 가방을 풀어놓고 아주 잠 시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턱밑까지 팽팽하게 뻗 어올라간 그녀의 목선에서 강렬한 흡인력 같은 게 느껴져서 나는 얼 른 시선을 돌렸다. 보아서는 안될 걸 본 듯한 섬뜩한 떨림, 그리고 막연 한 두려움 같은 게 왠지 모르게 가슴을 저리게 한 때문이었다. 소제목 : 바보 ... 그것두 몰라? “아, 뭐든 마구마구 먹었음 좋겠다. 왜 이렇게 배가 고프지?” 문득 자세를 고쳐앉으며 그녀가 엉뚱한 표정을 지었다. 스스로 생각해 도 이상하단 듯 자신의 배를 손가락으로 톡, 톡, 두드리고 나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피자하고 생맥주 마시면 어떨까?” “피자하고 생맥주...... 그래, 괜찮아.” 대답을 하고난 직후 퍼뜩 뇌리를스쳐가는 뭔가가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그때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왔다. 콤비네이션 피자와 생맥주 두 잔을 주문하고 나서 나는 다시 입을 열었 ? “생각해봐. 결과적으론 영화하고 똑같아졌어. 알라바마처럼 영화보고 난 뒤엔 항상 파이를 먹어?” “아, 나두 잠시 그런 생각 했었는데...... 아냐. 다른 게 있어. 그게 뭔지 맞춰봐.” 양손으로 턱을 괴고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가 나를 보았다. “다른 거?” 의아하단 표정으로 나는 그녀를 보았다. 대답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가 꼼짝하지 않고 그 자세, 그 표정 그대로 있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쳐갔다. “그러니까 클레런스와 알라바마가 영화 보고 나서 파이를 먹으러 간 부분까지만 말하는 거야. 거기까지 잘라서 지금의 우리와 다른 게 뭔지 그걸 맞춰 보라는 거야. 못 맞추면 멍추.” 약을 올리듯 그녀, 여전히 양손으로 턱을 괸 채 혀를 날름 내밀었다. “글쎄, 모르겠는데?” “바보...... 그것두 몰라?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잘 들어봐. 걔네들 하고 우리가 뭐가 다르냐, 하면......” 자세를 고쳐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짓고 나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걔네들은 만나던 첫날 영화 보고 파이를 먹으러 갔지만, 우리는 두번 째 만난 날 영화 보고 파이를 먹으러 왔다는 거야. 요걸 몰랐지?” “맙소사.......”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공교롭게도 그때 피 자와 생맥주가 날라져왔다. 기다렸다는 듯 그녀는 손뼉을 쳤고, 그것으로 나는 만회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보기좋게 한 방, 그녀에게 카운 터 펀치를 맞은 셈이었다. 소제목 : 아, 정말 기분 좋아 “암튼, 먹고 보자.” 생맥주잔을 들어 나는 그녀에게 건배를 제안했다. 아차, 하는 표정 으로 그녀도 잔을 들어 나의 그것에 맞부딪쳤다. 건배를 한 직후부 터 대충 십 분쯤, 그녀와 나는 단 한 마디의 말도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오직 먹는 일에만 몰두한 때문이었다. 두 번째 만난 사이로서 음식을 먹으며 느끼게 되는 어색함? 그런 것도 전혀 없었다. 연년생 오누이처럼, 국민학교 동창생처럼, 동네친구처 럼,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전우처럼, 그녀와 나는 정신없이 먹고 마 缺?뿐이었다. 단 십분만에 피자 한 판을 말끔히 먹어 치우고 나서 그녀와 나는 아주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멀뚱거림에 서로 어이가 없어서, 그러다가 느닷없이 그녀와 나는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 다. 주변의 다른 손님들이 무슨 일인가, 혹은 밥맛이야, 하는 표정 으로 이쪽을 봤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그녀와 나는 가슴이 후련해질 만큼 웃어버렸다. “아, 정말 기분 좋아. 너무너무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 건배!” 아주 조금 남은 생맥주잔을 들어 이번에는 그녀가 건배를 제안했 다. 그녀와 나의 웃음소리가 너무 컸던지, 그때 아래층에서 웨이터 가 올라와 슬금슬금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기다렸다는 듯 그녀, 산 뜻하게 웃음이 가신 표정으로 웨이터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있죠, 생맥주 두 잔만 더 주세요.” 웨이터가 다시 두 잔의 생맥주를 가져올 때까지 그녀와 나는 말없 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미묘한 떨림과 파장, 아니면 이상한 전류 같 은 게 서로를 관류하고 있다는 걸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온몸이 나른하게 가라앉으며 정신까지 몽롱 蠻測?것 같았다. 그녀와 처음 마주 서던 그때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강렬한 어떤 응집력, 그런 것이 그녀와 나를 기이한 상태로 합류시키고 있 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류......” 그녀와 나 사이에 두 개의 생맥주잔이 슬그머니 들이밀어진 직후, 아주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가 내 이름을 불렀다. 대답없 이, 잠잠한 표정으로 나는 그녀를 응시했다. “류는 눈빛이 참 좋아. 선하면서도 깊고..... 그곳에 남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할 아주 비밀스런 생각이 숨어 있는 것 같애.” “글쎄...... 그런 말은 처음 들어.” 소제목 : 그게 약이거든 “창작문학과 나왔으면 소설가나 시인이 되겠네?”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가 나를 보았다. “아니...... 나왔다고 다 되는 건 아니잖아.” “그럼 되려고는 해?” “되려고 한다기보다...... 그래, 되고싶어 한다고 대답하는 게 차 라리 낫겠다. 시를 전공했는데...... 도통 모르겠어. 그런 걸 알만한 나이가 아직 못됐나봐. 학교 다니면서 남들처럼 열심히 글을 쓴 것도 아냐. 애정은 있지만 어느 곳을 어떻게 비집고 들어가야 할지를 잘 모 르겠어.” “음...... 시인. 근데 류는 담배 ?피워?” 문득 생각났다는 듯 그녀가 나를 보았다. “술은 그럭저럭 되는데, 이상하게 그건 잘 안돼. 어릴 때 기관지 가 안 좋았다는데...... 그래서 그런 지도 모르겠어.” “나도 담배는 못 피는데..... 맥주 하나는 물처럼 잘 마셔. 그게 약이거든.” “약?” 놀란 표정으로 나는 물었다. “신장이 안좋아. 그러니까 이뇨 작용이 잘 되는 게 나한테 무조건 약이야. ”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느닷없이 에이, 하는 표정으로 그녀는 스스 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주 잠시 그녀와 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녀를 만난 이후, 그처럼 뭔가가 석연찮은 침묵은 처음이었다. 묻고 싶었지만 직감적으로 그래선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나의 표정을 읽고난 그녀, 분위기를 새롭게 바꾸고 싶다는 듯 지극히 히 밝은 표정으로 돌아오며 나를 보았다. “류, 내가 한 가지 제안 할까?” “어떤?” “음...... 오늘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금요일이고, 내일과 모레는 학원에 안 가는 날이니까......” 아주 잠시 사이를 두며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끝을 망痔方? 렸다. 지극히 짧은 동안 그러다가 문득 결정을 내렸다는 듯 엄지와 중지를 튕겨 딱, 소리가 나게 하며 이렇게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맥주 사 가지고 낙원장으로 가자!” 소제목 : 지금 여관으로 가자는 거야? 성좌동. 운청동에서 택시를 타고 라몽이 기사에게 일러준 목적지가 바로 그 곳이었다. 그 동네는 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맥주 사가지고 낙원장으로 가자! __<우드스톡>에서 그녀가 던 진 그 한 마디 말에 느닷없이 비수를 맞은 사람처럼 헉, 하고 나는 입을 벌리고 말았다. 간단히 요약을 하자면 놀람과 의혹과 신비와 경이로움 같은 것들 때문이었다. 더욱 많은 것들, 그러니까 그 순간 섬광처럼 나의 뇌리를 스쳐간 복잡한 생각은 무변광대한 우주 ?신 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낙원장이 어디야?” 택시 안에서 나는 물었다. “성좌동에 있는 여관.” 헤죽헤죽 웃으며 그녀가 대답했다. “지금..... 여관으로 가자는 거야?” 아주 불길하고 불쾌한 감정을 거의 동시에 느끼며 나는 물었다. 두 번째 만난 남자에게 자발적으로, 그것도 거의 멀쩡한 정신으로 여관 으로 가자는 여자를 도대체 어떻게 해석할 수 있으랴. 솔직히 말해 두 가지 중의 하나에 속하는 족속일 거라는 생각을 나는 도무지 떨 쳐낼 수 없었다. 마루나 방바닥을 닦을 때 쓰는 물건과 동일시되는 여자, 아니면 길에서 남자에게 쉬었다 가라고 말하는 여자. “응, 낙원장으로 가자는 거야.” 너무나도 선선한 그녀의 대답에 팍, 택시기사가 양미간을 찌푸리는 게 룸미러로 보였다. 어떤 식으로도 나는 더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 다. 그걸 즐기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낙원장이 우리집 이름인데 왜 그래?”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하아, 하고 입을 벌렸고 택시 기사는 풋, 하고 김빠지는 소리를 냈다. 남자놈들의 상상력이란------ 하고 ? 탄하는 기색들. “근데...... 날 집으로 데려가는 이유가 뭐야?” 아무리 여관집 딸이라지만 이제 두 번째 만난 사람을 다짜고짜 자 기 집으로 데려가는 이유가 뭔가. 솔직히 말해 그 순간, 이건 순전 히 영화를 많이 본 데서 생겨난 악영향이겠지만, 거의 본능적으로 나는 [델리카트슨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황폐한 세상, 사람 고기를 먹고 사는 기묘한 시대의 타락한 건물..... 집주인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가련한 전직 서커스 단원 있었 잖은가. 소제목 : 우엑, 델리카트슨? “정식으로 초대하는 거야.” “날..... 집으로?” “응.” “초대...... 그것도 맥주를 사 가지고? ” “집에 맥주가 다 떨어졌으니까.” 택시가 성좌동으로 꺾어져 들어가고, 버스 정류장 옆의 편의점 앞 에서 멎을 때까지 나는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가 앞장 서서 편의점으로 들어가고, 바구니에다 캔맥주와 안주거리를 담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 순간인가, 편의점 옆에서 단정한 정장 차 림의 여자가 몇 송이의 노란 장미를 사들고 나오는 게 보였다. 얼핏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이 있어 나는 재빨리 라몽을 돌아보았다. 냉동 진열대 앞에서 그녀는 치즈를 손에 들고 유통기한을 확인하려는지 이리저리 그것의 포장을 살펴보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바로 옆의 꽃집으로 들어가며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만원권 지폐를 꺼내 삼십 대초반쯤의 주인여자에게 건네며 다급한 목소리로 장미 한 송이 주 세요, 하고 나는 말했다. 꽃의 종류, 분량, 포장 방법 따위에 관해 유유자적하게 주인여자와 상의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서였 ?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짓는 주인여자에게 그냥 빨간 장미 한 송이, 비닐에 말아 주세요,라는 말을 다시 한번 되풀이했다. “어디 갔었어?” 계산을 마치고 편의점을 나서던 라몽, 마악 그곳으로 들어가려는 나에게 다소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도망갈까 하다가...... 다시 왔어.” 장미를 등 뒤로 숨기고 엉뚱한 표정으로 나는 말했다. “도망?” “응, 좀 무서운 영화 생각이 나서.” “무슨 얘기야?”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그녀, 입술을 뾰족하게 오므리고 고개를 갸우 輪杉? “낙원장...... 혹시 델리카트슨 사람들이 사는 집 아닌가 해 서......” “우엑, 델리카트슨?”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무릎을 반쯤 접었다 펴고 나서 퍽, 자신의 손 에 들려 있던 비닐봉지를 그녀는 세차게 내 가슴에다 쑤셔박았다. 반사적으로 그걸 받아들자 그녀의 얼굴 앞으로 불쑥 장미 한 송이가 떠올랐다. 그걸 보며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 아주 천천히 오른손 검지로 내 턱을 들어올리며 깡패를 흉내내듯 이 렇게 다시 입을 열었다. “잔말 말고 따 璨?짜샤......” << 내일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소제목 : 여기가 라몽방인가? 라몽의 얘기는 거짓말이면서 거짓말이 아니었다. 편의점에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고, 맞은편 골목 끄트머리에 있는 <낙원장>이란 여 관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나는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여 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서 그녀가 내실을 향해 다녀왔습니다, 하 고 말할 때까지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실 창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내미는 오십줄의 아주머니가 라몽의 모친인 줄 알고 꾸벅 인사까지 했으니 더이상 무슨 군말이 필요하 랴. 이층, 제일 구석진 201호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榕底? 직후에 나 는 비로소 뭔가가 이상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여관 주인집 딸이 어째서 손님용 객실을 자기 방으로 쓰고 있는 걸까, 하는 의구심 때 문? 물론 그런 이유도 포함돼 있었지만, 내 자신이 그녀에게 단단히 속았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된 건 전적으로 방안의 풍경 때문이었다. 스치듯 둘러보기에도 그것은 절대 가족의 일원이 사는 방일 수 없었 다. 부모와 한지붕 밑에 살면서 커피 포트와 전기밥솥, 몇 가지의 그릇과 수저통 따위를 자기 방에 두고 따로 밥을 해먹고 사는 딸이 있을까. 여관에서 사는 여자. 라몽에 대해 나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이유는 물론 알 수 없었지 만 어느모로 훑어봐도 그것은 사실일 수밖에 없었다. 벽에는 [베티 블루], [프리티 우먼], [크라잉 게임], [늑대와 춤을], [그대 안의 블루], [비오는 날의 수채화] 같은 영화 포스터들과 아네트 베닝, 위노나 라이더, 이자벨 아자니, 킴 베신저, 조디 포스터, 강수연 등 의 여배우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빽빽하게 봄옷이 걸린 철제 행어 가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론 큼직한 박스가 여러 개 쌓여 있었다. 벽쪽에 붙여 놓은 낮은 목제 책상 위에는 몇 권의 책과 노트, 패션 전문잡지와 여성지, CD와 테이프 겸용의 녹음기 한 대가 올려져 있 었다. 몇 가지의 주방 용기는 그 옆의 작은 다탁 위에 올려져 있었 지만 얼핏 보기에도 사용을 별로 안하는 것처럼 보였다. 창쪽에 놓 인 침대와 소형 냉장고는 물론 그녀의 것이 아니라 여관방에 원래 비치되어 있던 것이지 싶었다. 여기가 라몽방인가. 분명 그곳이 라몽방이었다. 그녀에 대한 감정의 흐름에 안타까운 단절이 생겨나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또한 속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녀가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 입는 동안, 아주 이상한 혼란을 느끼며 나는 시종 무릎을 세우고 앉 아 있었다. 너무 여러 가지의 생각이 뒤죽박죽으로 뒤섞여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가 유리궁전에서 사는 여 자일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지만, 그녀가 이렇게 어수선하고 불안정한 여관방을 자신의 거처로 삼고 있으리란 생각도 나는 전혀 해 본 적이 없었다. 소제목 :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의 전부 “이상하지?” 욕실에서 나온 그녀, 촉촉하게 젖은 얼굴로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나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러고나선 별로 신경도 쓰이지 않는 다는 표정으로 비닐봉지에서 맥주와 안주를 꺼내 방바닥에 내려놓았 다. “정말 이상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무릎을 내리며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나는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되긴....... 여기가 라몽방이야. 그리고 류가 여기, 내 방 에 초대받은 첫 손님이야. 영광이란 거 알아?” “정말 낯선 영광이군.” 캔맥주를 몇 모금 떽?뒤,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는 중얼거렸 다. 마악 캔맥주를 따려던 그녀, 나의 말을 듣고 맥빠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잠시, 그녀를 만난 이후 두번 째의 석연찮은 침묵이 흘렀다. 파르르르, 형광불빛이 미묘한 떨림으로 허공을 부유하는 것 같았다. “류가 그렇게 심드렁해야 할 이유가 뭐야? 여긴 내 방이고, 내가 여기 사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야. 난 정말 큰맘 먹고 류를 초대한 건데...... 왜 그래?” 갑자기 얼굴이 상기되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얼굴로 그녀가 나를 보았다. 단순했던 자신의 호의를 내가 이상한 식으로 왜곡하고 있다 는 생각을 한 건가. 은백양 잎새에서 미끄러져내리는 아침이슬처럼, 굵은 눈물 방울이 그녀의 왼뺨을 타고 빠르게 흘러내렸다. 난처한 표 정으로 앉아 있는 내게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내가 여관에 사니까 아무 남자나 막 불러들이는 거 같애? 그 래서 기분 나빠진 거야? 이제 겨우 두 번 만났는데...... 근데 여관으로 오자고 했다고? 가고 싶으면 아무 때나 부담 없이 돌아가. 난, 류에 게...... 정말 이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의 전부라고 생각했어. 그것 뿐이야. 근데...... ” 말을 끝맺지도 못한 채 킹, 하고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난 감한 순간, 그녀의 어깨가 들먹이는 걸 보며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기분 나빴다면 진심으로 사과할게. 여관에 사는 거...... 그 런 거 가지고 비웃거나 그럴 생각은 정말 아니었어. 그냥, 좀 당황했 고......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에 잠시 혼란스러웠던 것뿐이야. 날 이곳으로 초대하는 데 용기 가 필요했을 거라는 거......이제 알 것 같애. 정말 내가 바보 같았어.” “그래, 정말 바보 같았어. 알아?” 코에다 티슈를 대고 웅웅거리는 소리로 말하고 나서 팽, 그녀는 세 차게 코를 풀었다. “근데, 언제부터 여기서 살았어?” 눈 주위와 코끝이 발그레해진 그녀, 물에서 방금 솟아오른 듯한 얼 굴을 보며 나는 물었다. 티슈를 쓰레기통에 넣고 캔맥주를 두어 모금 마신 뒤, 비로소 안정을 되찾은 표정으로 그녀는 입을 열었다. “아직 두 달 안 됐어. 일주일쯤 남았을 거야.” “궁금해. 얘기 좀 해줄래?” 이런 궁금증을 잘못 드러냈다가 또다시 그녀의 마음을 건드리면 어 쩌나, 지극히 조심스런 표정으로 나는 물었다. 소제목 : 아냐, 난 할 수 있어. “얘기가 좀 복잡해. 여기 오기 전에 무정동에서 자취를 했었는 데...... 거긴 할머니 혼자 사시는 집이라서 참 좋았어. 그 할머니가 나 한테 밥도 해 주고, 어떤 땐 빨래까지 해줘서 정말 친할머니 같았어. 근데 어느날 아침에 아무리 기다려도 할머니가 안 일어나셔서 방안으 로 들어가보니까...... 눈을 멍하니 뜬 채로 정신을 잃고 계신 거야. 막 울면서 병원으로 옮겼는데...... 그날 낮에 돌아가셨어. 돌아가시기 전 에 꼭 한번 정신이 돌아오셨었는데...... 내 손을 꼭 잡고 몽아, 몽 아...... 자꾸만 이름을 부르시는 거야. 그래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그날의 상황이 지금 다시 재현되기라도 하듯 그녀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자식이 없는 할머니야?” “아니 서울에 있는 집을 팔지 않으려고 할머니 혼자 남겨두고 지방 으로 이사를 갔대. 아들이 건어물 도매상을 하는데...... 할머니 돌아가 시구 삼일만에 나타나서 그 다음날 화장을 했어. 근데 내 전세금은 자기한테 당장 돈도 없고 자기가 계약한 것도 아니니까 나중에 집이 팔리면 주겠대. 그 할머니 생각 땜에 거기서 살 수도 없고...... 그래서 무작정 거기서 나온 거야.” “그럼 돈을 안받겠단 거야?” “그럼 어떻해? 밤마다 무서워서 하루도 못 견디겠는 걸......” 쿨적, 손으로 콧등을 한번 문지르고 나서 그녀는 막막한 눈빛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부모님들한테 연락을 하지 그랬어?” 너무나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는 물었다. “부모?...... 우리 부모는 올 수가 없어. 미국에 있거든. 그리고 내가 이렇게 됐다는 걸 알리고 싶지도 않고......아마 안다고 해도 올 수 없 을 거야.” 어깨를 늘어뜨리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녀는 맥주를 마셨다. “부모님이...... 왜?” 자식이 이렇게 곤경에 처해 있는데, 그걸 알고도 안 올 부모? 왠지 모르게 가슴이 바직바직 타들어가는 것 같아 나는 다시 두어 모금의 맥주를 재빨리 들이켰다. “우리 부모한테 난...... 그냥 버려진 한 마리의 애완견이야. 치아와 나 푸들...... 뭐 그런 거.......그런 게 아니면 자식이 아니라 자신들의 불행을 잊기 위해 만들어낸 놀이개...... 우리 엄마는 마흔살에 날 낳았 어. 그때 아빠는 마흔다섯이었고 둘 다 재혼이었어. 엄마에게도 아빠 에게도 첫 결혼에서 얻은 자식들이 하나씩 있었는데 양쪽 모두 미국 에서 살아.” “그럼 부모님들이 그 사람들한테 가 계시다는 거야?” “응, 2년 전에 엄마 아빠가 갈라서고 난 뒤에 각자 자기 자식들한 테 간 거야. 아빠는 아들에게, 엄마는 딸에게...... 정식으로 이혼 절차 는 밟지 않았지만, 아빠와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 받게 될 유산 때문 에 미국에 있는 자식들끼리 여러 번 싸우기도 했대.” “그래서 혼자...... 이렇게 남겨진 거야?” “첫결혼에서 遲? 자식들과 난 남남이잖아. 죽어도 안가겠다는 말 은 내가 한 거야. 그리고 그 사람들은 유산 문제 때문에 내가 끼이는 걸 양쪽 모두 싫어해. 애완견한테까지 재산을 나눠주긴 싫다는 거지 뭐. 엄마 아빠야 마음이 괴롭겠지만...... 이젠 나이가 많으셔서 이러지 도 저러지도 못해. 내 생활비조로 엄마가 매달 송금해 주는 돈도 언 제 끊어질지 알 수 없어.” “그럼 언제까지나 이런 식으로 살겠다는 거야?” 나도 모르게 컥, 뭔가가 목구멍으로 치밀어오르는 걸 느끼면서도 굳 이 나는 물었다. 갼틂? 난 할 수 있어. 그리고 지금이 훨씬 맘 편하고 좋아. 한심한 애완견처럼 부대끼거나 끼어서 사는 건 싫어. 그냥 하고 싶은 일 하 고, 내가 나라는 걸 느끼고 살 수 있는 지금이 훨씬 좋단 말야.” 소제목 : 아주 먼 골짜기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 아주 오랫동안 나는 입을 열 수 없었다. 5월 의 부신 햇살 속에서 그토록 경쾌하게 움직이던 그녀, 그 가슴 저린 화사함의 이면에 이런 내력이 숨어 있었다는 게 나로서는 도무지 믿 어지지 않았다. 봄인데, 햇살이 지천으로 널리는 5월인데, 아주 먼 골 짜기 어느 곳에선가 소리없이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 막막한 연상이 었지만 아주 뚜렷하게 나는 그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주 오래 전 부터 아주 오랜 후까지, 세상의 이면에서 소리없이 켜를 이루는 슬픔 의 적설 같은 것. “언젠가, 아마 내가 고등학교 졸업반 때였을 거야. 엄마 아빠를 보 러 미국에 있는 자식들이 우리집에 온 적이 있었는데...... 미국에서 대 학을 다니고 거기서 살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주 이상한 느낌 을 그 사람들한테서 받았었어. 마주 대하면서도 날 멸시하고 혐오하 는 눈치......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간이 추하게, 그것도 늙은 엄마 의 몸에서 나왔다는 걸 드러내놓고 밥맛이라고...... 그런 느낌을 노골 적으로 나한테 전하려는 것 같았어.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그리 고 반드시 그 사람 茸錤?내가 누구인지 보여주겠다는 결심을 했어. 내가 나라는 걸 보여주겠다고, 그들이 나를 부러워할 만한 사람이 되 겠다고...... 엄마는 자신이 나이 들어 나를 낳았기 때문에 내가 신장도 나쁘고 키도 미국에 있는 자식보다 작아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건 다 괜찮아.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게 이겨나갈 수 있단 말야.”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희고 작은 손을 다져쥐며 결연한 표정으로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난 반드시 내가 원하는 무엇인가가 될 거야.” “스타?” 그 析?다니는 종합연기학원 <스타 스페이스>를 염두에 두고 나는 물었다. “내가 나라는 거...... 내가 누구인지를 세상 사람 모두에게 확인시켜 주고 싶어.” 자신이 치아와나 푸들 같은 애완견이 아님을, 그리고 태어나지 말았 어야 할 존재가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싶다는 말을 그녀는 생략 하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에게 내가 건네야 할 어떤 말이 있다는 생 각을 했지만 의도적으로 나는 그것을 자제했다.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었지만, 왠지 이 밤은 내가 느끼는 감정을 아주 원만하고 안온한 것 으로 다듬어 그녀를 편안하게 해주는 일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 각 때문이었다. 조용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나는 영화관에서 산 <트루 로맨스>의 영화음악 CD를 그녀의 카세트에 넣었다. 상큼한 마림바 연주로 시작 되는 첫 곡이 흘러나오자 다시 영화관에서의 궁금증이 되살아났다. 앨범 겉면의 이라는 문구에 대한 궁금증에 덧붙 여 테마음악으로 흘러나오는 그 첫곡의 제목이 또한 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cool’이 도대체 어떤 의미로 쓰인 건가, 그것을 생각하며 나는 캔 맥주를 들어 그녀에게 건배를 제안했다. 아주 조금 서로에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녀와 나는 맥주를 마셨다. 그녀와 나의 시선에 집중력 이 생겨나는 걸 느끼며, 캔맥주를 내려놓고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장 미 한 송이를 나는 그녀에게 건넸다. 웃으며 그것을 건네받은 그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그만두고 말끄러미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소제목 : 크,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 붉은 장미 한 송이. 그때 대단히 빠르고 경쾌한 랩 스타일의 댄스곡이 흘러나오기 시작 했다. 장미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그녀, 문득 고개를 들어올리며 이 노래의 제목이 뭐야, 하고 물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앨범을 들어올렸다가 갑작스럽게 나는 으, 하는 표정이 되고 말았다. 말을 해 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고 있을 때 궁금해서 못 견디겠단 듯 뭔 데, 하고 그녀가 재촉을 했다. “I want your baby......” “크,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 손에 들고 있던 빨간 장미 한 송이를 자신의 배에다 갖다대고 까르 르, 그녀가 머리를 뒤로 젖히며 웃었다. 자지러지듯 웃는 그녀를 보며, 섬뜩할 정도로 빨간 장미 한 송이가 묘한 상징처럼 여겨져서 나도 모 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댄스곡이 끝난 뒤에 바로 그 노래, 클레런스와 알라바마가 섹스를 할 때 배경 음악으로 흐르던 <상처받은 새>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상처 받은 두 마리 새라고 상상해 보세요. 함께 있는데도 외로워요......’ 맥주를 마시며 노래를 듣고, 노래를 들으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지만, 그녀와 ご?잠잠한 침묵 속에서도 전혀 다른 차원의 공간감을 또렷 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느낌 같으면서도 의외로 미묘한 느낌 같았고, 익히 알고 있던 상태 같으면서도 전혀 새로운 상태 같았 고, 경험의 범주에 속하는 것 같으면서도 온전하게 미답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cool’에 대해, 열두 곡의 노래를 다 듣고 나서 나는 내 나름대로 의 결론을 내렸다. 젊음의 반항과 좌절, 비상과 추락, 방황과 고독의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는 음반__ ‘very cool music’이라는 단어 를 사용한 사람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것이 내게는 그렇게 느껴진 것 이었다. 어쩌면 ‘진실한 사랑(true romance)’의 과정이 반항과 좌 절, 비상과 추락, 방황과 고독으로 점철되는 고행의 여로일지도 모른 다는 생각까지 아주 막연하게 뇌리를 스쳐갔으리라. “이제 나 가봐야 하지 않을까?” 어느덧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장미를 코에 대고 말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그녀, 자세를 고쳐앉으며 난감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류......” “왜?” “꼭...... 가야돼?”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럼 같이 있어 줘. 오늘은...... 정말 혼자 있기 싫어.” 그녀의 표정이 견딜 수 없이 가슴을 아리게 해서 나는 힘없이 고개 를 떨궜다.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만한 힘이 이미 내게는, 아니 처음 부터 내게는 주어지지 않은 것 같다는 불가항력적인 느낌__그런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소제목 : 류, 내 이름을 불러줘 자정이 지난 뒤에 대충 방을 치우고 그녀와 나는 옷을 입은 채 침대 에 누웠다. 손을 뻗어 벽에 부착된 전원 스위치를 내리며 불편하면 옷 을 벗고 자도 괜찮다고 그녀가 말했지만, 옷을 벗고 자는 게 더 불편 할 것 같다고 얼버무리며 아주 은밀하게 나는 심호흡을 했다. 여자와 자 본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닌데, 정말 알 수 없는 떨림이 어둠 속에서 금방이라도 푸른 섬광으로 팍,팍, 튀어오를 것 같아 턱없이 가슴이 떨 렸다. “정말 영화처럼 됐네, 오늘?” 어둠 속에서, 내 어깨에다 이마를 갖다대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말에 퍼뜩 뇌리를 스쳐가는 게 있어 재빨리 나는 입을 열었다. “아니 다른 게 하나 있어.” “뭔데?” “말할 수 없어.” “흠, 알 것 같은데?” “말해봐.” “섹...... 스?” “정답이네.” “긴장돼?” “아니, 괜찮아...... 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둠 속에서 가느다랗고 밝은 길이 떠오르는 것 같아 막막한 시선으로 나는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길은 길인데 아무리 빛으로 열린 길이라 해도 그것은 어차피 어둠 속의 길일 수밖에 없었 다. 조용히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그 길에 대한 예감으로 아주 오랜만에 나는 기도하는 심정이 되었다. 그 가느다란 길, 빛으로 점차 드넓게 열리며 그녀와 내 주변의 어둠을 말끔히 걷어내 주기를, 나 정 말 오랜만에 순은(純銀)과 같은 마음으로 간절히 기원한 것이었다. 그 때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손바닥으로 내 턱을 쓰다듬으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유치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 류한테 아주 이상한 감정 이 느껴져.” “어떤?” “처음 보던 날부터 그랬던 거 같애. 무조건 편하고 좋은...... 너무 잘 맞는 거 같은 느낌 있잖아. 아이 참, 소설 같은 데선 이런 말 너무너 무 멋있게 표현하던데...... 난 왜 요 모양이지?” “그거...... 소설에서는 작가들이 비현실적인 말들을 쓰면서 교묘하게 자기 기만을 하는 거래. 그래서 소설은 온통 죽어 있는 말들의 묘지라 고...... 학교 다닐 때 어떤 교수가 그랬어.” “류는 어때?” “뭐?” “나에 대한 감정.” “음, 난...... 나도 똑같애. 첨 봤을 때 몸이 이상해지는 거 같았어. 너 무 오랫동안 잊고 지내 ?사람이 갑자기 나타난 듯한 기분......” “그랬구나, 류도...... 이렇게 어깨에다 이마를 대고 영원히 있었으면 좋겠어.” “영원히......” “류.” “왜?” “내 이름을 불러줘.” “몽?” “아니, 그렇게 말구......” “라...... 몽?” “응, 그렇게 부르면 내 꿈이 실현돼 있는거 같아서 좋아. 근데......” “왜?” “인제...... 잠이 와. 요기, 내 이마에다 뽀뽀해 줘.” “그래...... 자.” 어둠 속에서, 그녀의 이마에다 나는 입을 맞춰 주었다. 柳石? 더이 상 입을 열지 않았고, 잠시 뒤부터 낮고 고른 그녀의 숨소리만 새근새 근 내 귓전으로 밀려들었다. 길은 여전히 어둠의 한가운데, 처음의 그 상태로 열려 있었다. 아주 먼 길을 떠나야 할 사람처럼, 오랫동안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는 생각을 하며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이마 위로, 깊고 먼 골짜기에서 내리던 눈이 점(點), 점(點), 점(點)...... 어둠에 아로새겨지 는 각인처럼 무겁고 둔중하게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소제목 : 얼굴이 찐빵 귀신이 됐네? 아침 8시 경, 거의 같은 순간에 라몽과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내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작은 새우처럼 등을 굽히고 나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내가 몸을 돌려 그녀 쪽으로 향하자 그녀가 고개를 들고 아웅, 하는 표정으로 눈을 떴다. 조금 웃어보이며 그녀를 보자 그녀가 길게 기지 개를 켜며 안녕,하고 입을 열었다. 잠에서 깨어나 처음 터뜨리는 그 말, 그 목소리가 잠잠하게 가라앉아 있던 내 가슴을 묘하게 건드렸다. 돋을볕을 받으며 갓 피어나는 꽃, 그것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아마 저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고나면 언제나 목소리가 그래?” 편안한 눈길로 그녀를 들여다보며 내가 물었다. “왜...... 이상하게 들려?” “아니, 좋아서.” 손가락 하나를 곧게 펴 그녀의 뺨에 갖다대며 나는 웃었다. 아침마 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끝내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쑥스러움. “그럼 또 잘까?” 방긋 웃고 나서 그녀가 다시 한번 아웅, 하는 표정으로 길게 기지개 를 켰다. 몸을 일으켜세우자 창을 넘어온 햇살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 의 얼굴을 덮었다. 미동 없이 누운 채, 햇살로 분칠한 그녀의 얼굴을 나는 망연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손바닥으로 내 눈을 쓸어내렸다. 쑥스러우니까 눈을 감고 있으라는 뜻인 것 같았다. “옴마야, 얼굴이 찐빵 귀신이 됐네?” 눈을 감고 있는 나의 귓전으로 느닷없이 그녀의 비명이 밀려들었다.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자 출입문 옆의 거울 앞에 등을 보이고 선 그 녀가 보였다. 무슨 말인가, 상체를 세우며 내가 물었다. “찐빵귀신?” “그래, 얼굴이 찐빵 귀신처럼 부풀어올랐단 말야.” 그녀의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 픽, 소리를 내며 나는 웃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귀신 얘긴 많이 들었지만, 찐빵 귀신이란 말은 난생 처음이 었다. 그때 그녀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돌아섰다. “어젯밤에 맥주 마시고 바로 자서 그런가 봐. 그래서 얼굴이 부었 단 말야.” “맥주가 약이라며?” “약도 되지만 신장이 안 좋으니까 얼굴이 자주 부어.” 어쩌나, 어쩌나를 연발하며 그녀는 욕실로 들어갔다. 침대에서 내려 와 나는 카세트의 첨뮌� 보턴을 눌렀다. 지난밤에 듣던 <트루 로맨 스>를 다시 듣기 위해서였다. 지난 밤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 오는 음악을 들으며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잠시 뭔가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금요일이 가고 토요일 아침이 시작된 것이었다. 소제목 : 잠깐만 엎드려 있어줘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어쨌거나 새로운 하루를 위해 뭔가를 준비해야 한다는 마음의 재촉 이 의외로 나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몇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것 을 모조리 수용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마음 이 나도 모르게 한쪽으로 치우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마음에 꺼림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으나, 어쨌거나 가장 익숙한 것을 선택하는 게 그녀를 위한 일이지 싶기도 했다. 마림바의 상큼한 선율을 들으며 그래 그거야, 하는 표정으로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들여다보던 거울에서 햇살이 반사돼 순간적으 로 눈을 찔렀다. 고개를 모로 돌리자 여러 개의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 밤의 궁 금증이 되살아나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으로 다가갔다. 맨 위에 놓인 것을 열자 아이보리색 겨울 코트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 쌓인 것들이 옷을 넣어두는 박스, 그러니까 제철이 아닌 옷들의 보관함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 욕실 안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류, 지금 뭐하고 있어?” “나?” 화들짝 놀라 나는 얼른 박스를 덮고 다시 침대로 돌아와 앉았 �. “응, 뭐하고 있냐구......” “그냥 앉아 있는데, 왜?” 욕실 안에서 나를 내다보기라도 한 건가, 다소 켕기는 목소리로 나 는 물었다. “미안한데......” 어떤 동작을 진행 중인 듯,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만 침대 위로 올라가서 엎드려 있을 테야?” “엎드려 있으라구?”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는 욕실문을 보았다. “응, 나 지금 옷을 벗은 채로 나가야 하는데...... 잠깐만 엎드려 있 어줘. 알았지?” “이런......” 탄식하듯 나는 중얼거렸다. 문득 그녀의 살갗, 그것의 매끄러운 감촉 이 연상을 자극하는 것같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위로 올라갔 다. 그때 재촉하듯 그녀가 다시 물었다. “됐어?” “되긴 됐는데...... 눈을 감고 있어도 다 보일 것 같애” 눈을 감은 채 나는 그렇게 소리쳤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부신 아침 햇살 속에 서 있는 그녀의 탄력적인 알몸이 정말, 고스란히 보이는 듯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잠 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나의 동 ㅐ� 살피고 있는 모양이었다. 소제목 : 아침 햇살, 알몸, 젖은 머리카락 젖은 얼굴과 젖은 상반신을 연상하고 있을 때 힝, 하는 그녀의 콧소 리가 들렸다. 방바닥을 밟는 젖은 발소리가 들리고 다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밖으로 완전히 나선 걸까.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조바 심을 치고 있을 때, 의외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가 허공 에서 떨어졌다. “보고싶어?” “......” 숨을 죽인 채 나는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괜찮아, 말해봐. 보고싶어?” 속삭이듯 그녀가 내 귓전에다 입을 대고 물었다. “내가 무슨 부처인 줄 알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보란 말야.”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허공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래, 보고싶어.” “좋아, 그럼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봐.” 그녀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은 채 아주 천천히 나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동작이 완료되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계속 눈을 감은 채 내쪽으로 방향을 바꿔.” 그녀의 말대로 방향을 바꾸는 동안 향긋한 비누냄새가 코끝으로 밀 려들었다. 아침 햇살, 알몸, 젖은 머리카락 따위를 연상하며 나는 동 작을 완료하고 그녀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됐어, 이제 눈을 떠.”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 아주 조심스럽게 나는 눈을 떴다. 숨막히게 연상을 자극하던 어둠의 세계로 엄청난 광량이 밀려들었다. 아, 놀라 움에 입을 벌리며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까르르르, 자지러지는 듯한 그녀의 웃음 소리가 알몸보다 훨씬 먼저 이마를 후려쳤다. 풀썩, 혼절하듯 나는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녀, 알몸인 줄 알았던 몸에 입고 들어갔던 옷이 고스란히 걸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탈진 한 사람처럼 침대 위에 첸沮� 채 사기꾼,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기 다렸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며, 굵직한 남자 목소리를 흉내내며 그녀 가 이렇게 되받아쳤다. “왜 그러나, 도둑놈?” 소제목 : 꿈의 베이스 캠프 라몽과 내가 <낙원장>을 벗어난 건 아홉시가 거의 다 되어서였다. 그곳, 골목 끄트머리에 있는 여관 건물이 그녀의 아픈 내력을 담고 있는 동굴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곳을 나서 기 전, <트루 로맨스> CD를 그녀에게 주고싶다고 했으나 그녀는 끝 내 그것을 사양했다. 쓸데없는 선심은 노 땡큐? 인상적이었던 건 골 목을 벗어났을 때, 다시 한번 뒤를 돌아봄으로써 새롭게 발견한 일종 의 상징 같은 풍경이었다.지난 밤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전체적 풍경 으로 <낙원장>과 그 뒤쪽 � 높은 경사지대에 자리잡은 화려한 저택 들이 의미심장하게 대비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낙원장>은 골목이 끝나는 지점에 있었고, 거기서는 뒤쪽의 화려한 저택지대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었다. 성좌동, 그 화려한 저 택지대에 상당수의 내노라하는 연예인들이 살고 있다는 건 전혀 새로 운 사실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베벌리 힐스라는 별칭이 생겨날 정 도였으니 말해 무엇하랴. 라몽이 그 아래쪽의 골목 끄트머리, 그러니 까 <낙원장>의 좁고 눅눅한 방에서 기거하고 있다는 게 나로 하여금 이해할 만한 연민을 느끼게 했다. 그곳으로 오르고 싶어하는 꿈의 베 이스 캠프__<낙원장>이 내게는 그런 의미로 읽혀진 것이었다. 지난밤 캔맥주와 안주를 산 편의점 부근의 약국에서 그녀는 녹색 알 약 한 판을 구입했다. 밖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다가 그게 뭐냐고, 약 국을 나서는 그녀에게 나는 물었다. 응, 신장약이야, 하고 그녀는 어 설픈 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았다. 햇살 속에 선 그녀, 아랫부분에 주 름이 잡혀 하늘거리는 검정 니트에 검정 앵클부츠를 신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왠지 처음 보는 사람처럼 아뜩 構� 부각되는 것 같아 멍하 니, 초첨이 흐려진 눈빛으로 나는 그녀를 보았다. “근데 뭘 먹지?” 약을 가방에 넣고 나서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글쎄, 저기 저 식당 아침에도 하나?” 눈에 띄는 아래쪽의 식당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내가 물었다. “으...... 저긴 안돼. 저건 소머리국밥 전문이야.” “소머리국밥?” “응, 소머리국밥을 먹느니 소대가리국밥을 먹지. 무슨 음식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 몰라.” “흠, 음식 이름치곤 꽤 살벌하다. 소, 머리, 국밥...... 정말 瀏립�.” 소제목 : 라면과 김밥어때? “내가 아는 분식집 있으니까 그리로 가.” 내 손을 잡고 그녀가 편의점을 지나 위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샛별분식>이란 이름의 아주 작고 깔끔한 분식집 하나가 은행과 안 경점 사이에 있었다. “라면과 김밥 어때?” 약국에서 산 알약 하나를 엽차와 함께 먹고 나서 그녀가 물었다. “괜찮아, 그러지 뭐. 근데......” 잠시 망설이다가 이쯤에서 말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나는 입을 열었다. “근데, 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가 나를 보았다. “오늘 우리집 갈래?” “집에?...... 초대하는 거야?” “음, 그런 셈이지 뭐. 초대. ”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그럴 수 있어? 그러니까......” “집에 누가누가 사냐구?” “응.” “가보면 알지 뭐. 어쩌면 우리집도 델리카트슨 같을지 몰라. 조심 해.” 어제의 빚을 갚겠다는 표정으로 나는 슬그머니 웃음을 지었다. “난 걱정 마. 델리카트슨이 아니라 아담스 패밀리도 괜찮아.” 걱정을 말라는 표정으로 그녀는 턱을 들고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근데, 음식 잘하는 거 있어?” “왜, 음식 못 만들면 사람 잡아먹는 가족이야?” 킥, 웃음을 터뜨리고 나서 그녀는 다시 한 모금의 물을 마셨다. “그럴지도 모르지. 살아서 돌아나오고 싶으면 미리 준비를 해 가는 게 좋아. 가장 자신 있거나 평소에 만들어먹고 싶었던 거...... 뭐 그런 거면 돼.” 내 말을 듣고 나서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 느닷없이 짝, 손바 닥을 소리나게 맞부딪치며 이렇게 소리쳤다. “아, 류도 혼자 사는구나!” 소제목 : 아니, 그러니까, 헤헤 라면과 김밥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나서 라몽과 나는 화류시장으로 갔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가 장 큰 백화점으로 화류시장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라몽과 나는 한쌍 의 까마귀 아니면 한쌍의 백로 같았다. 끼리끼리, 뜻이 맞는 부류끼리 어울리게 된다는 점에서, 내가 그녀를 화류시장에서 처음 발견하게 된 게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얘기. 그녀와 함께 걸으며 나는 햇살 속에서 먹이를 쪼아대는 종달새를 떠 올렸다. 시장으로 접어드는 동안, 내 팔을 잡고 걸 만� 그녀는 연신 종알거 렸다. 있잖아, 류, 학원에, 나는, 선배 언니가, 아항, 아니, 그러니까, 헤 헤, 들어봐, 아이 참, 에고, 아니래두, 바보같다, 그치, 알았냐니까, 맞 아, 잘 하는 거? “그래, 잘하는 게 뭐야?” 잡화류를 파는 골목으로 접어들며 나는 그녀를 보았다. 얼굴이 발그 레하게 상기된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며 글쎄,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히 불어봐. 내가 음식을 전혀 못만들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사실 아닌가?” “흠, 뭔가를 보여줘도 단단히 보여 宣煞未�.” 걸음을 우뚝 멈추고 사뭇 골똘한 표정으로 그녀는 중얼거렸다. 재밌 다는 표정으로 내가 그녀를 보자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며 새치름한 시선으로 그녀가 나를 보았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딱, 소리나게 맞부딪치며 이윽고 그녀의 표정은 변했다. “좋아, 정했어. 따라왓!” 나의 손목을 나꿔챈 그녀, 유연한 물고기처럼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 가 잡화류 골목을 이내 벗어났다. 왼쪽으로 연이어 두 번 꺾어진 뒤 에 접어든 골목은 농수산물 시장이 형성된 곳이었다. 초입에서는 인 삼, 영지버섯, 쑥, 운지버섯 등의 한약재를 팔고 있었지만, 그 안쪽이 농수산물 시장이라는 걸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뭘 정했다는 거지?” 그녀를 따라가며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상부 에 지붕이 형성돼 있어서 바깥보다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그곳, 어 물 냄새가 훅하니 후각을 자극하는 그곳으로 들어선 뒤에 그녀는 좌 측의 어물시장을 버리고 우측의 농산물 시장을 택했다. 녹색의 채소 류와 봄나물 따위들이 즐비한 진열대를 지나가며 그녀는 연신 좌 痢� 두리번거렸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내려다보기도 하고, 어떤 순간엔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다는 듯 혼자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소제목 : 고추? 농산물 시장을 한바퀴 돌고 난 뒤에 그녀는 다시 처음의 자리로 되 돌아갔다. 거기서부터 마음 속으로 정해 놓은 듯한 상점을 차례로 거 치며 필요한 것들을 사기 시작한 것이었다. 대략 15분쯤 소요하며 그 녀가 산 것은 콩나물, 붉은 고추, 풋고추, 파, 마늘, 찹쌀가루 등이었 다. 콩나물을 제외하곤 거의 아이들 소꿉장난 수준, 그러니까 붉은 고 추 두 개, 풋고추 세 개, 파 두 뿌리, 마늘 다섯 쪽 하는 식이었다. 사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이나 너무 극소량이라서 가격을 정하고 그 것을 인정하는 과정에서 ㈆� 번 웃음을 자아낼 일이 생겼다. 가격을 정하지 못한 주인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 기다렸다는 듯 라몽이 먼 저 10원, 50원, 100원 하는 식으로 제멋대로 가격을 정한 때문이었다.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아저씨가 있는가 하면, 끝내 부 른 값을 고수하며 라몽과 팽팽하게 맞서는 아줌마도 있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붉은 고추 두 개와 풋고추 세 개를 공짜로 얻게 된 건 전적으로 그녀의 깜찍한 애교 때문이라고 해야 할 터였지만, 금전적인 절약 말고 전혀 다른 식으로 증폭되는 또다른 가능성을 나는 보고 있었다. 뭐랄까, 라몽의 반짝거리는 표정과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의 말 이 고스란히 연기의 일종으로 보였다고나 할까. 그게 아니라면 그녀 스스로 자신의 일상 전체를 일종의 연기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도 모를 일이었다. 삶의 연기, 혹은 연기의 삶. “빨간 고추, 풋고추...... 고추는 전부 공짜로 얻었네?” 농수산물 시장을 빠져나오며 다소 짓궂은 표정으로 내가 물었다. “고추?” 놀란 표정으로 그녀가 나 � 돌아보았다. “그래, 고추 말야. 공짜 고추들.” “......” 내가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지 자신이 모를 줄 아느냐, 하는 표정으로 그녀는 나를 흘겨보았다. 내가 연신 피식거리자 흠, 하고 입 을 앙다물며 그녀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느닷없이 내 귀를 잡아당겼 다. 또다시 온몸을 저리게 만드는 속삭임? 기대를 부풀리는 나의 귀 에다 대고, 기막히게도 그녀는 이런 말을 불쑥 들이밀었다. “자꾸 까불면 진짜 고추 갖다 판다?” 소제목 : 5월에 내리는 꽃눈 꽃가루 분분하게 흩날리는 방관동. 택시에서 내린 직후, 라몽과 나는 한겨울의 함박눈처럼 제멋대로 바 람에 날리는 꽃가루를 보고 탄성을 내질렀다. 걸어서 강까지 10분 거 리, 그 둑길에 즐비하게 심어진 가로수에서 날려오는 꽃가루였다. 우 와, 우와를 연발하며 겅중겅중, 꽃가루를 잡으려는 듯 그녀는 팔을 휘 저으며 연해 허공으로 솟구쳤다. 눈 내리는 날 마당을 깡총거리는 강 아지, 해질 무렵 비늘을 번뜩이며 도약하는 물고기처럼. “아, 방관동...... 정말 낭만적이다.” “알고보면 별로 낭 맛岵� 동네도 아냐. 철교로 전철 오가는 소리 때문에 밤엔 시끄러.” “시끄러워도 난 오월에 내리는 꽃눈을 보는 게 더 좋아.” “꽃눈?” “응, 오월에 내리는 꽃눈.” 인도에서 잣바듬한 골목으로 접어들며 그녀와 나는 그런 말을 주고 받았다. 언제나 나른한 심정으로 터덜터덜 오가던 그 길이 왠지 모르게 전혀 새롭게 보이는 것 같았다. 왼쪽으로 한번 더 꺾어진 뒤에 나는 그녀 에게 우측의 방관빌라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무리 빌라라고 우겨 도 어차피 연립주택일 수밖에 없는 붉 � 벽돌 건물 한 동(棟). “저기, 내 둥지가 있어.” “옴마야, 저렇게 큰집에 혼자 살아?” 눈을 휘둥그레 치뜨며 그녀가 농스런 표정을 지었다. “맨 끝쪽 입구 삼층...... 305호야.” “메모리했어.”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콕,콕, 찌르며 그녀가 말했다. “준비하지 않은 초대니까 절대 기대하지 마. 아주 어지러울 거야.” “근데, 몇 평이야?” “24평.” “우와...... 그렇게 넓은 공간에 혼자 산다 그거지?” 앞으로 나서서 나와 마주되게 뒷걸음으로 걸으며 그녀가 물었다. “방이 두 개이긴 하지만 별로 짜임새가 없어.”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먼저 들어선 뒤, 보란 듯이 나는 그녀를 돌아 보았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옷가지와 책, 거실 한가운데 놓인 신문과 재떨 이...... 그런 것들을 들어올려 여기저기 되는 대로 자리를 잡아주고 나서 나 는 정색을 하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여기가 내 둥지야.” 대답없이 그녀, 뭔가를 몰래 훔쳐보는 사람의 표정으로 살금살금 두 개의 방을 들여다보았다. 안방에는 침대와 옷장이 있었고, 작은 방에 는 �장과 테이블이 있었다. 안방을 휘둘러보면서는 흠, 흠, 하는 표 정이었는데, 작은방으로 들어가 책장을 보고나서는 갑자기 놀라는 표 정으로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 소제목 : 감명 깊게 본 건 [인어공주] “우와...... 정말 책 많다. 저게 다 일루 들어간 거야?” 그녀가 손가락으로 짚은 건 나의 이마였다. “아니 아직 못 읽은 것도 많아. 책 많이 읽는다고 똑똑해지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무식이 통통 튀진 않을 수 있잖아.” “책 많이 읽어?” “흠, 어려운 질문을 하시는군. 말해줄까?” 거실, 2인용 소파로 나와 앉으며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요즘은 연기자들도 책 많이 읽어야겠더라. 텔레비전 쇼 프로나 토 크쇼 같은 게 많아지니까...... 사람마다 차별성이 생기는 거 갼�.” “좋아, 내가 말해줄게. 내가 가장 감명 깊게 본 건 [인어공주], 가장 교훈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오즈의 마법사]야. 놀랬지? 하지만 사실이 야. 다른 책을 안 읽었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날 감동시키고 나에게 교훈을 준 책이 아직은 없었다는 거야.” 그녀의 말을 듣고 아주 잠시 놀란 눈빛으로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 다. 뭔가가 띵하게, 혹은 찡하게 가슴을 훑고가는 것 같아서였다. 지 적으로 그녀를 무시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녀의 말을 있는 그대로의 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불가항력적인 신뢰감 같은 것. 어쩌 면 그와같은 감동과 교훈, 다시말해 순수한 동심의 상실에서 이 세상 의 모든 혼란이 야기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역으로 나는 한 것 이었다. “그렇게 감명 깊고 교훈적인 책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있다니 정말 부럽다.”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아니, 진심이야.” 빙그레, 웃음을 지어보이며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올곧게 나의 시선을 맞받던 그녀, 문득 뭔가가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입을 열었다. “아 참, 콩나물찜!” 소제목 : 설탕,소금,간장,참기름... 콩나물찜을 만드는 라몽. 그녀가 시키는 대로 나는 거실 바닥에 앉아 콩나물을 다듬었다. 그 녀는 옷이 불편하다며 내 청바지와 남방을 빌려 입고 이것저것 시장 에서 사온 재료들을 꺼내 씻고 다듬기 시작했다. 식칼을 들고 풋고추 와 붉은 고추를 엇비슷하게 써는 그녀의 뒷모습을 올려다보며 아주 잠시 나는 형언할 길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가슴이 뭉클하면서도 뭔가가 대단히 아슬아슬하게 느껴져서 어깻죽지가 나른해지는 상태__ 그런 감정은 정말 난생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류, 조 肩嘯� 하나도 없네?” 찬장을 열어보고 나서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조미료?” 다른 집 얘기 하듯 사뭇 엉뚱한 표정으로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았 다. “응, 설탕, 소금, 간장, 참기름 같은 거......” “남자 혼자 사는 데 그런 게 있으면 오히려 이상한 거 아냐?” 당연하다는 듯 나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웃겨, 정말...... 어디서 그렇게 촌스런 교육을 받았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빼물며 피식, 하는 소리를 내고 나서 그녀는 손을 씻었다. 잠시 뒤, 헐렁한 남방 자락에 � 손을 닦으며 그녀가 다 시 입을 열었다. “요즘은 요리 못하는 남자하고 통성명도 하지 말라는 세상이야, 알 아?” “몰라.” “으이그, 그냥......” 겅중 뛰어 태권도의 이단 옆차기 같은 자세를 흉내내고 나서 그녀는 현관으로 나갔다. 내가 사오겠다고 했지만 도리질을 하듯 고개를 흔 들며 돈, 하고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지갑에서 만원권 지폐 한 장을 꺼내며 슈퍼마켓의 위치를 알려주려 하자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이미 봐두었노라, 그런 걱정일랑 붙들어매고 콩나물이나 열심히 까고 있으라는 얘기를 남기고 그녀는 재빨리 출입문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나간 뒤, 까라는 콩나물은 까지 않고 거실 바닥에 등을 붙이 고 아주 길게 나는 누워버렸다. 정말 오랜만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크건 작건, 그 모든 게 전적으로 라몽이라는 존재 때문에 생겨난 변 화라는 걸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화창한 봄, 꽃눈 흩날리는 5월, 스물 셋과 스물다섯...... 모든 것들이 자연스런 조화 속에서 팽팽하게 살아 숨쉬고 있는 것 같다는 감동이 뭉클하게 부풀어오르는 시간이었 �. 문득 뇌리를 스쳐가는 게 있어 기계체조 선수처럼 나는 튀듯이 자리 에서 일어났다. <트루 로맨스> CD를 거실의 소형 오디오에 넣기 위 해서였다. CD를 플레이어에 걸고 등을 돌리자 평화로운 정경으로 거 실창 하나 가득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이 담겨 있는 게 보였다. 아주 어릴 적 잃어버린 일종의 낙원 같은 게 그 평화로운 정경 속에서 잠 잠하게 되살아나는 것 같아 아주 잠시 나는 그 자리에 묵연하게 서 있었다. 시간의 흐름이 멎고, 이 세계의 모든 물상이 잠잠하게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라몽...... 하 고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 순간의 시간 속에, 그 순간 의 대기 속에, 그 순간의 햇살 속에, 그 순간의 정밀 속에 그녀의 이 름이 영원히 아로새겨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낙인처럼, 나 살아 있는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마음의 각인처럼. 소제목 : 거의 환상적인 시간 “날씨가 너무 좋아서 마음이 아파.” 다시 자리에 앉아 콩나물을 손에 들 때, 검은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 라몽이 돌아왔다. “날씨가 좋은데 왜 마음이 아파?”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거 있잖아? 너무 좋으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릿해지는 거...... ” 대답을 하고 나서 하나 하나, 비닐봉지를 싱크대 위에 올려놓고 그 녀는 내용물을 꺼내기 시작했다. 어이없게도 맨처음에 그녀의 손에 들려나온 건 몇 개의 작은 유리병이 하나의 세트를 이룬 양념통이었 다. 연이어 맛소금, 고춧가루, 후춧가루, 설탕, 간장, 참기름 같은 것 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식빵과 소주가 들려나왔다. “식빵과 소주는 왜?” 고개를 갸웃하며 나는 물었다. 식빵, 소주, 콩나물찜__ 그것들이 아 무래도 조화와는 거리가 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기다려봐. 환상적인 시간이 올 거야.” “환상적인 시간?” “응, 거의 환상적인 시간.” 양념통을 깨끗이 씻은 뒤에 그녀는 봉지에 들은 양념을 덜어내 유리 병에 담았다. 마늘과 파를 다지고, 거기다 간장과 고춧가루, 소금과 설탕을 넣어 양념장을 만드는 동안 그녀는 거의 몰두하는 듯한 표정 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다듬은 콩나물을 다시 한번 물에 씻고, 그것을 냄비에 넣어 가 스 레인지 위에다 올리는 동안에도 역시 마찬가지, 그녀의 표정은 사 뭇 진지해 보였다. “요리 하는 거 좋아해?” 으늑한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올려다보며 나는 물었다. “응, 좋아하는데 별로 해 먹진 못해. 혼자, 내 자신을 위해서 요리 를 만들면 왠지 슬퍼져서 싫어.” “남을 위해서 요리할 기회는 있어?” “엄마 아빠 미국으로 떠난 뒤에 오늘이 처음이야.” “......” 혼자 먹는 일의 슬픔과 외로움에 대해 나는 생각했다. 혼자 씹고, 혼 자 삼키고, 혼자 마시는 동안에 일어나는 끈끈한 심리적 인내에 대해 서도 또한 생각했다. 그와 같은 일의 처음과 끝을 그녀가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데서 생겨나는 일종의 동지감 같은 것. 뭔가 따뜻한 말 을 해주고 싶었지만 언뜻 떠오르는 말이 없어 나는 안타까웠다. 그때 콩나물 넣은 냄비에다 소금을 뿌리고 나서 핼끔, 그녀가 내쪽으로 고 개를 돌리며 방긋 웃어보였다. “행복한 토요일이다, 그치?” 소제목 : 어때, 맛 있지? 콩나물찜에 의한 환상적인 시간. 거실 탁자 위에다 먹을 것들을 차려놓고 나서 그녀와 나는 마주앉았 다. 식빵, 소주, 콩나물찜이 올려졌는데, 그때까지도 나는 그 세 가지 의 조화에 대해 여전히 궁금증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매운 콩나물찜 을 술안주로 먹겠다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해도, 거기에 어째서 식빵 이 곁들여지는 것일까. “흠, 내가 먹는 방법을 알려줄 테니까 잘 봐. 자, 식빵 하나를 이렇 게 반으로 찢고, 젓가락으로 요렇게 콩나물찜을 들어 식빵 위에 올리 고..... 약간 오므리듯이 요 린� 입으로 가져가서 앙, 하고 먹는 거야. 이건 먹어봐야 맛을 알지, 잘 설명을 할 수 없어. 이건 있지, 동양과 서양이 조화를 이룬 환상적인 맛이란 말야. ” 반으로 찢은 식빵 위에다 콩나물찜을 얹고, 일종의 쌈처럼 말아 먹 는 방법을 시연하고 나서 그녀는 소주병을 내게 내밀었다. 가만히 앉 아 있지 말고 한 잔 따르라는 시늉인 것 같았다. 내가 두 개의 잔에 다 소주를 따르고 나자, 남겨진 반 개의 식빵 위에다 콩나물찜을 얹 어 내게 내밀며 아, 하고 그녀가 입을 벌렸다.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먹이기 위한 유도 행동처럼 입을 벌리고 고개를 반쯤 뒤로 젖힌 그 녀, 손에 든 그것을 조심스럽게 내 입에 넣어주었다. “어때, 맛있지? 환상적이지?” 반응이 궁금하단 듯, 내 얼굴을 올곧게 응시하며 그녀가 대답을 제 촉했다. 우물우물, 빵과 콩나물찜을 동시에 씹으며 정말 기묘한 맛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나는 했다. 콩나물찜의 붉고 강렬한 색채를 식빵이 싸안 는 건 붕대의 원리를 연상케 했고, 콩나물찜의 매운 맛을 식빵의 담 백한 맛이 싸안는 건 중화의 원리를 생각케 했다. 어쨌거나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맛의 세계, 정말이지 기상천외하면서도 깜찍한 조화 의 세계가 아닐 수 없었다. “근데, 이건 누가 개발한 거야?” 시식을 하고 나서 사뭇 놀랍다는 표정으로 나는 물었다. “아이 참, 그건 순서가 아냐. 맛이 있는지 없는지, 그거부터 말해야 지.” “너무 놀라워서 말이 안나와. 이거...... 정말 세계적인 맛이야.”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며 나는 웃었다. “정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가 되물었다. “정말, 진심이야.” “아, 기분 좋다. 그거 내가 개발한 맛이야.” 소제목 : 식콩쌈, 빵콩쌈, 빵찜쌈 기분 좋다는 표정으로 환하게 웃으며 그녀가 소주잔을 들어올렸다. 나도 따라 들어올리자 그녀, 고개를 갸웃하며 아주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짓고 나서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잠잠하게 뭔가를 음미하듯, 혹은 아로새기듯 소곤거리는 목소리. “류와 라몽, 행복한 토요일, 그리고 트루 로맨스를 위해.” 건배를 하고 나서 그녀와 나는 반잔쯤의 소주를 마셨다. 다시 식빵 과 콩나물찜을 먹으며, 그것에다 뭔가 적절한 이름을 붙였으면 좋겠 다는 말을 꺼낸 건 나였다. 식빵과 콩나 걔遲� 동시에 아우를 수 있 는 일종의 합성어__ <식콩쌈>이라는 제안을 한 건 그녀였고, <빵콩 쌈>이라는 제안을 한 건 나였다. <빵찜쌈>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제 시한 건 그녀였고, 어쨌거나 <콩>이 들어가야 한다는 이유로 그건 곤란하다는 이견을 제사한 건 나였다. 그 사이 몇 잔의 소주가 돌았 고, 문제는 <식콩쌈>과 <빵콩쌈>으로 압축되었다. “류, 식콩쌈이 더 신선하지 않아?” “음, 식콩쌈 하니까 왠지 베지밀 냄새가 나는 거 같애. 그러니까 지 금 이 맛을 식콩쌈이라는 어감이 대변하지 못하는 거 같단 말야.” “그건 빵콩쌈도 비슷하네 뭐. 좀 방정맞게 느껴지지 않아?” “방정 맞다구?” “방정맞아. 식콩쌈이나 빵콩쌈이나 두 개 모두 날걸로 먹는 음식 이름 같기는 마찬가지네 뭘.” “방정맞은 날것...... 음,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럼 뭘루 해?” “음, 좋아. 그럼 빵찜쌈으로 하자.” “야호, 내가 이겼다, 만세!”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로 그녀, 두 팔을 들어올리며 환호했다. 그녀 에게 무조건 양보를 한 게 아니라, 그녀의 언어에 대한 본능적 감각 을 인 ㅗ� 결과였다. <식콩쌈>과 <빵콩쌈>에서 방정맞은 날것의 어 감을 느낀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닐 거라는 나름대로의 판단 을 나는 한 것이었다. 소제목 : 꿈꾼다는 말... 싫어. “근데...... 라몽은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를 지망하는 거야?” 소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내가 물었다. “분야?” “음, 좀더 구체적으로 말을 다시 해야겠다. 어떤 방면의 스타를 꿈 꾸냐구?” “꿈꾼다는 말...... 싫어. 내가 되고 싶어하는 거야. 그리고 반드시 될 거야. 누구나 무엇인가가 되고 싶어하잖아? 절대 꿈을 꾸는 게 아니 란 말야.” 정색을 하고 그녀가 나를 보았다. “아, 미안. 듣고보니 정말 그렇구나. 좋아, 그럼 어떤 방면의 스타가 되고 싶은 거지?” 개� 영화 쪽인데...... 요즘은 분야의 구분이 모호해. 지난번 스타 스 페이스 다니다가 CF 모델로 선발된 언니는 광고 나가고 세 달도 안 지났는데 이번에 영화 쪽으로 캐스팅 됐어. 그리고 어떤 방면에서든 어차피 종합적인 연기력을 요구하는 세상이니까 학원에서도 그런 쪽 의 지도를 하는 거야. 만능 연기인을 키우겠다는 거지.” “그렇구나......”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류는 왜 여기 혼자 살아?”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집안을 휘둘러보며 그녀가 물었다. “아, 여기? 그냥...... 내가 원해서 집에서 나온 거야.” “왜?”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가 나를 보았다. “어젯밤에 라몽 얘기 듣고 나서 내 얘기도 하고 싶었는데...... 괜히 분위가 망칠까봐 참았어. 라몽은 부모님들과 헤어지게 돼서 가슴이 아프겠지만, 난 내 스스로 부모님들에게서 떨어져나온 거야. 그 과정 이 무척 힘들었지만...... 지금은 편안해.” “그래야 할 이유가 있어?” “이유...... 있지. 그 이유가 꼭 내 이름 같아.” 쓴웃음을 지으며 나는 술잔을 들었다. “오류라는 이름?”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가 물었다. “내 이름, 영어로 하면 에러라고 했잖아? 이름만 에러가 아니고 살 아온 과정도 에러였어. 와우전문대 입학하고 난 뒤에 나에게 아버지 가 둘이라는 걸 알았어.” “아버지가...... 둘?” 오그라들듯 어깨를 움츠리며 그녀가 나를 보았다. 소제목 : 향긋한 기초화장품 냄새 “내 작은아버지인 줄 알았던 사람이 친아버지였고, 친아버지인 줄 알았던 사람이 큰아버지였던 거야. 아주 어릴 때 나를 형의 아들로 입적 시켰는데...... 그걸 전혀 모르고 자랐던 거지. 어차피 큰아버지이 고 작은아버지인데 뭐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정말 심각한 문제였어. 너무나도 커다란 인생의 오류를 발견 한 것 같은 기분......” “큰아버지네는 아들이 없어서 그런 거야?” “위로 누나만 둘 있어. 그리고 친아버지쪽엔 나하고 연년생인 형이 하나 있어. 내가 태어난 직후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들이 둘에 아내 까지 세상을 떠났으니 이래저래 형의 요구를 뿌리칠 수 없었던 모양 이야. 그리고 친엄마의 죽음이 나의 탄생에서 비롯됐다는 불길한 생 각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암튼 나를 형의 호적에 입적시킨 대가로 평생 형한테 경제적인 도움을 받고 있지만,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그 런 거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어.” “그럼 누굴 아버지로 불러야 하는 거지?” 정말 애매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물었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라면...... 어느 누 링�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 아버지라는 말 자체가 갑자기 궁중 분해된 거 같은 기분이 들 어. 그래서 독립을 하겠다고 한 거고...... 스물일곱이 될 때까지라는 조건하에 일단 집에서 빠져나온 거야.” 말을 하고 나서 나는 잔에 남겨진 술을 마저 입안에 털어넣었다. “큰아버진 뭐해?” “가구 회사. 꽤 유명한 회사에 오랫동안 납품을 하다가 얼마전부터 자체 브랜드로 제품을 내놓기 시작했어.” “그럼 아버진?” 점점 더 궁금해진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물었다. “가구 회사에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작년에 큰아버지 도움을 받아 식당을 차렸어.” “오류라는 이름 속에 그렇게 슬픈 사연이 숨어 있는 줄 정말 몰랐 어.”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던 그녀, 갑자기 자세를 고쳐 엉거주 춤하게 무릎걸음으로 기어서 내게로 왔다. 무슨 일인가, 의아한 눈빛 으로 쳐다보는 나의 얼굴을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차분하게 가슴에 품었다. 부드러운 감촉, 향긋한 기초 화장품 냄새, 그런 것으로부터 솟아나는 어색하면서도 미묘한 안온함이 이상하게 온몸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가슴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솟구쳐 금방이라도 목구멍을 넘어올 것 같았다. 소제목 : 삐-삐-삐-삐-삐-삐 엉거주춤하게 그녀의 가슴에 안겨 있는 게 불편해서 나는 밑으로 얼 굴을 내렸다. 등을 돌리고 아예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버린 것이 었다. 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희고 부드러운 손으로 그녀가 나의 이 마와 뺨을 쓰다듬었다. 문득 생각난 듯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얼굴을 내려 나의 이 마에다 입을 맞추기도 했다. 일종의 위무, 아니면 연민 같은 것일 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아주 이상한 발신음이 그녀와 나의 안온한 교류감에 날카로운 쐐기처럼 날아와 박혔다. 삐-삐-삐-삐-삐-삐 나에겐 삐삐가 없었으므로 그것이 그녀의 가방 안에서 나는 소리라 는 걸 단박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긴장된 눈빛으로 내가 올려다보자 잠깐만, 하며 그녀가 자신의 허벅지를 거두어갔다. 도리없이 일어나 앉아 나는 가방을 열고 삐삐를 꺼내 확인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어머, 희진이 언니네?” 혼잣말을 하고 나서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학원 같이 다니는 선배 언닌데, 나 전화 좀 쓸게.”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그녀, 콩나물찜을 먹기 위해 탁자 밑에 내려놓았던 전화기를 끄집어내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언니?...... 응, 나야...... 여기? 방관동...... 뭐하긴, 일이 있으니까 온 거지...... 지금?”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잠시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는 나를 보았다. 어 떤 문제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지만, 나는 조금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퍼뜩 고개를 뒤로 젖히며 그녀가 다 시 입을 열었다. “알았어 언니, 그럼 거기서 봐. 지금 나갈게.” 전화를 끊고 나서 이잉, 하는 표정으로 그녀는 입과 눈살을 일그러 뜨리며 나를 보았다. 별로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려오는 것 같았지만 나는 여전히 표정 을 바꾸지 않았다. “미안...... 정말 미안. 오늘 삐삐 치겠다고 어제부터 언니가 말했었 거든. 오늘 화류시장에서 의류 몇 가지를 사야 하는데, 내가 같이 가 겠다고 했거든. 괜찮지?” “괜찮아. 라몽이 방관동까지 오게 되리라는 걸 어제는 전혀 몰랐었 잖아?” 나의 말을 듣고 나서 그녀가 다시 무릎걸음으로 기어와 내 뺨에 입 을 맞추었다. 오른쪽 어깻죽지에 순간 岵막� 힘이 솟아오르는 게 느 껴졌지만, 그걸 동작으로 옮겨 대책없이 그녀를 안고 싶지는 않았다. 소제목 : 설거지 다 해놔, 알았지? 이상하게도 그녀에 대해서는 충동보다 제어력이 훨씬 앞서는 것 같 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내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그런 게 생겨난 게 아니라, 그녀에 의해 상대적으로 그와 같은 제어력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짐승이 아니라면 어떤 남자라도, 그녀가 유발하는 묘한 보호 본능에 사로잡혀 일시적인 충동을 곧장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려울 거 라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류, 어디 외출할 데 있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아무데도.” “그럼, 나 희진이 언 � 볼일 끝나면 다시 이리로 올게. 괜찮지?” “괜찮지 않아도 와. 여긴 남의 눈치 보는 동네가 아냐. 방관동이잖 아.” “재밌다, 방관동...... 신경 꺼라, 그런 뜻이야?” 내 청바지와 남방을 벗고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안방으로 들 어간 그녀, 방문을 반쯤만 닫고 말을 계속했다. “신경 꺼라가 아니고 신경 껐다야. 제멋대로 사는 동네를 세 글자 로 줄인 말......방관동.” “지금 문틈으로 나 훔쳐보고 있지?” “아니, 소파에 앉아서 방관하고 있어.” 성좌동에서 입고나온 뮌揚막� 되돌아간 그녀, 방문을 나서며 좀전 까지와 또다른 느낌으로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모습에서 다시금 팽팽한 탄력과 생기가 되살아나 있었다. 특정 한 인물에 대해 이렇듯 한 순간 한 순간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는 게 정말 신선하게 여겨졌다. 출입문을 나서기 전,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나의 뺨에다 그녀는 다시 한번 입을 맞추 었다. 부드러운 감촉과 은은한 향기에 취해 있는 나, 부드러운 입술을 귀로 옮겨간 그녀, 이런 속삭임이 아주 짧은 순간 悶� 그녀와 나를 갈라놓았다. “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설거지 다 해놔, 알았지?” 소제목 : 아, 사로잡힌 게야... 라몽이 없는 집. 그리 오랜 시간도 아니었는데, 그녀의 빈 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 서 나는 한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녀가 살다 문득 사라진 집처럼, 실내의 공기는 이를 데 없이 괴괴했고 부재감은 터무니없이 드넓어졌다. 그걸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까닭 모르게 나는 괴로워했다. 정말 이상 한 일이었지만, 그녀가 이 집에 발을 들여놓던 순간부터 이전의 공간 은 고스란히 소멸돼 버린 것 같았다. 라몽에 의한, 라몽을 위한, 라몽의 방. 알 수 없는 절박함에 사로잡혀 한동안 나는 전전긍긍했다. 신체의 중요한 일부가 사라지거나, 정신의 반쯤이 빠져나간 듯한 기분으로 천정을 올려다보며 나는 누워 있었다. 가까스로 일어나 그릇을 씻고 그것을 닦고, 거실 바닥을 훔치고 걸레를 빨기도 했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쓰레기를 모아 비닐봉지에 담고, 그것을 버리러 밖 으로 나갔다 오기도 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번 <트루 로 맨스> CD를 듣기도 했지만 그녀의 부재가 조성해내는 이상한 단절 감은 좀체 스러지지 않았다. 삼십분쯤 그렇게 어슬렁거 �다 문득 입 을 벌리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아...... 사로잡힌 게야, 이윽고, 그렇다, 나는!” 사로잡히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펄썩, 나 는 소파에다 몸을 쑤셔박았다. 길게 누워 천정을 올려다보며, 제멋대 로 지류를 형성해내는 생각의 흐름에 잠잠하게 몸을 맡겨버렸다. 스 물다섯이 될 때까지 알았던 어떤 여자에게서도 라몽에게서와 같은 강 렬한 흡인력을 나는, 결단코 느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날 누군가 왔고, 부딪쳤고, 그리고 별다른 아쉬움도 남기지 않은 채 말없 이 사라져갔다. 어느 누구도 나는 잡고 싶어하지 않았고, 어느 누구에 게도 또한 예속되고 싶어하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니면 관계라는 이름으로 무엇인가가 복잡해지는 걸 얼마나 나는 싫어했던 가. 시원에의 그리움처럼,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모친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낳아준 아버지나 길러준 아버지에 대해 이제 내게 남겨진 감정은 오 직 모호함뿐이었다. 내가 시를 꿈꾸고 있다면, 그것은 기억할 수 없는 시원에의 그리움을 반영하는 것일 터였다. 그와 같은 지향성이 모친 에 대한 갈망을 반영하는 것이라 해도, 그 막막한 비현실성은 내가 감당하기에 지나치게 버거운 등짐일 뿐이었다. 시는 그런 세계의 상 상봉(上上峰)에 피어난 설화 같은 것__ 오랜 동안의 홀로인 단순함 속에서 나는 그런 걸 깨달았다. 아버지 없는 세계, 시원에의 그림움만 턱없이 자라나는 가슴 속에서는 시가 아니라 상상봉의 산그늘만 턱없이 드넓어져 간다는 것. 소제목 : 어쩌면, 이미, 내가.. 햇살 부신 5월, 내가 라몽을 발견한 게 아니라 그녀가 내게 다가온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눈치챌 수 없는 비의를 숨기고, 누군가에 의해 그녀가 내게 보내졌을지도 모른다는 아뜩한 의구심. 나의 모호 함, 나의 버거움, 나의 홀로됨에 대한 근원적인 해답을 숨긴 채, 어느 날 갑자기 내 영혼을 사로잡는 존재가 문득 내 앞에 나타난 것 같다 는 생각을 나로서는 도무지 밀어낼 수 없었다. 나타나서 나를 가득 채우다 홀연히 사라져버린 그녀가 누구인가. “아니야, 채워져 있어, 여전히, 너는, 오류......” 눈을 크게 뜨고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눈을 감 았다. 온몸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여전히 내 자신 속에 무 엇인가가 가득차 있는 것 같다는 포화감 속에서 5월, 부신 햇살 속으 로 떠오르는 희고 마디가 긴 손이 보였다. 흰 스카프가 펄럭이던 어 느 순간, 거짓말처럼 빨간 잠바가 나타났다.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탄력적인 걸음걸이로 걸어가는 그녀...... 라몽이 지금, 바로, 이 순간, 내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했다. 어 섯�, 이미, 내가...... 아, 내가 사 랑에 빠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혼곤한 잠의 늪속으로 가물 가물하게 나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눈을 뜨자 사방이 캄캄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 지 않았다. 온몸으로 엄습하는 섬뜩한 이방감에 지레 놀라 퍼뜩 상체 를 일으켰다. 밖에서 밀려드는 희미한 빛을 앞세워 사방을 둘러보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내가 사는 공간, 그 실 내의 한가운데 놓인 소파에 나는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빛이 있는 동안에 잠들고, 아뜩하게 어둠 속에서 다시 깨어난 것이었다. 몇 시간이나 잠들어 있었던 것일까. 소파에서 내려와 점등 스위치를 올리고 재빨리 벽시계를 보았다. 어 느덧 아홉시가 지나 있었다. 출입문을 보고 싱크대를 보고난 뒤에 잠 시 멍하니 서 있었다. 섬뜩하면서도 불길한 무엇인가가 섬광처럼 뇌 리를 스쳐가는 것 같았다. 돌아오겠다던 그녀, 라몽의 부재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모든 일, 그러니까 그녀를 만나던 첫날부터의 일이 고스란히 한순간의 꿈으로 되돌아간 걸까. 한바탕의 봄꿈을 꾸고 � 뒤처럼 견딜 수 없이 가슴이 허전해지는 것 같았다. 소제목 : 일장춘몽? 욕실로 들어가 세면대에다 찬물을 받고 퍽, 물속에다 머리를 들이밀 었다. 일장춘몽? 정신을 차리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한번 그짓을 반복했다. 꿈일 수 없다고, 이건 현실이라고 중얼거리며 수건으로 머리와 얼굴을 닦고 곧장 집을 나섰다. 밖으로 나서자 훈훈 한 봄밤의 대기가 눅눅하게 얼굴을 덮었다. 그녀가 남긴 부드러운 입 술의 감촉, 그것이 대기 속에서 문득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천천히 골목어귀까지 걸어나가자 인도와 차도가 동시에 보였다. 질 주하는 차량의 불빛, 건너편의 빌딩 불빛, 그 모든 것의 배경처럼 희 붐하게 허공에 떠 있는 어둠을 한눈에 내다보며 나는 인도까지 다시 걸어나갔다. 금방이라도 택시가 멎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가 뛰어내릴 것 같았다. 도처에서, 그러니까 길 아래쪽이나 도로의 반대쪽에서도 그럴 것 같았다. 가능성이 엿보이는 모든 곳을 두리번거리며 사방에 서 나는 그녀를 발견하고 싶어했다. 훈훈한 봄밤의 사방에서 그녀가 튀어나와 금방이라도 내 어깨를 치며 까르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열 시가 지나도 라몽은 나타나지 않았다. 사방에서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듯한 그녀, 열한 시가 지나도 변함없이 나타나지 않았다. 적잖은 택시 내 앞에서 멎고 다시 떠나곤 했지만, 어찌된 셈인지 그녀의 모 습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틀림없을 게라는 다짐을 여 러 번 번복하며 택시를 기다렸지만, 택시는 와도 그녀의 모습은 끝끝 내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 이윽고 내 앞에 와 멎은 택시에서 아이를 안은 삼십대 초반쯤의 아 줌마가 내릴 때 나는 불현듯 결심했다. 망설이지 않고 그 택시에 몸 을 싣고 다리 앞에서 차를 돌려 弔� 성좌동으로 가자고 한 것이었 다. 마음의 조바심이 만들어내는 채근질을 더이상 견디기 힘들었고, 그녀에게 느꼈던 모든 현실적 감정들이 고스란히 소멸될 것 같다는 위기감을 또한 이길 수 없어서였다. 전에 없던 감정이었지만, 그런 걸 되새겨볼 만한 여유마저도 이미 나에겐 스러지고 없었다. 내게 남겨 진 건 오직 한 가지, 그녀를 보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무엇인 가를 확인하고 싶다는 감정과 무엇인가를 확신하고 싶다는 감정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었다. 성좌동, 편의점 앞에서 택시를 내린 뒤에 나는 곧장 <낙원장> 골목 으로 접어들었다. 지난밤과는 또다른 식으로 가슴이 두근거려 몇 번 이나 의도적으로 심호흡을 했다. 여관 앞에 이르러 재빨리 이층 좌측 의 마지막 창문을 살폈지만, 기대감에 막을 내리라는 듯 그곳엔 막막 한 어둠이 물들어 있을 뿐이었다. 고개를 떨구고 잠시 망설이다가 도리없이 골목을 빠져나왔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이 지나 있었다. 소제목 : 괴괴한 현실, 패잔의 시간 편의점으로 들어가 커피를 한잔 사들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낙원 장>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정면으로 보이는 지점에 서서 대책없는 심 정으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마음이 허용하는 한 기다릴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이 어느덧 체념을 닮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 었다. 부질없는 기대가 자라 운명적인 힘을 조성하고, 그것에 지나치 게 목을 맨 결과로 어쩌면 아주 우스운 인간이 나는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심찮게 젊은 남녀가 여관 골목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술에 취 해 걸 습� 휘청거리는 쌍이 있는가 하면, 자신들의 집 골목으로 들어 가듯 멀쩡한 걸음걸이로 당당하게 걸어들어가는 쌍도 있었다. 내가 선 지점에서는 어쨌거나 그들의 귀착점이 여관 출입구라는 걸 확연히 식별할 수 있었다. 저곳이 꿈의 베이스 캠프인가. 새벽 한 시가 지나 있었다. 형언할 길 없이 복잡해진 감정이 온몸을 나른하게 만들어 도저히 더이상은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은 일장춘몽, 부질없고 짧았던 환상으로 모든 게 되돌려지는가. 라몽에 대해 내가 느꼈던 신선함이 어느덧 남루로 변해 봄밤의 대기 속으로 볼품없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힘없이 등을 돌리자 터지듯 쏟아져내리는 형광불빛이 아프게 눈을 찔렀다. 꿈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 편의점에서 밀려나온 빛살이 돌아 가야 할 길을 대낮같이 밝혀준 것이었다. 방관당한 꿈의 터전.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것은 한 시 반이 지난 뒤였다. 정말 어이 없고, 터무니없고, 이상한 하루가 지난 것 같다는 생각으로 온몸이 맥 진해진 뒤였다. 슈퍼마켓에서 산 소주병을 손에 들고 힘없이 나는 출입문을 열었다. 괴괴한 현실, 패잔의 시간을 곱씹어야 할 공간으로 드디어 되돌아온 것인가. 현관에서 점등 스위치를 올리고 신발을 벗기 위해 고개를 숙 이자 이상한 종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뭔가, 소주병을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재빨리 나는 그것을 집어들었다. 미처 읽기도 전부터 섬뜩 하게 뇌리를 스쳐가는 예감__ 그것은 라몽이 어둠 속에서 울며 써놓 고 간 편지였다. 오오 하느님, 맙소사! 류,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11시 40분부터 1시까지, 계단에서 류가 돌 아오길 기다리다 어둠 속에서 편지 쓰는 거야. 잘 보이지 刻티� 글 씨가 엉망일 거야. 희진이 언니가 옷 사고 난 뒤에 패션쇼에 들렀다 가자고 해서 늦었 어. 늦는다고 류한테 전화하고 싶었지만, 번호를 알 수 없어서 그러지 도 못했어. 너무 무섭고 힘들어서 여기 앉아서 한참 울었어. 나 보기 싫어서 도망간 거 아니지? 밑에 내 전화번호 적어놓을게. 내일 아침 일찍 전화해 줘. 알았지? 나 그만 갈게. 안녕. 소제목 : 아침에 대한 밤의 부끄러움 일요일 아침, 7시가 조금 못된 시각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한 탓인지 머리가 개운치 않았지만 더이상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머리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라몽에 대한 생각, 어쩌면 그것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난밤, 그녀의 편지를 읽은 뒤에 나는 그 길로 곧장 성좌동으로 달 려가려 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에서 내 자신을 다스리지 않을 수 없었 다. 이전의 나와 전혀 다른 상태, 어떤 알 수 없는 가속력, 통제불능 의 충동에 대한 본능적인 반작용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의식의 중심을 에워싸는 이상한 기류를 감지하며, 출입문에다 이마 를 대고 오랫동안 나는 내 자신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까닭모를 안타까움이 숨통을 조여오는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낙원장>으로 가는 것만은 참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윽고 나는 문앞에서 등을 돌 리 수 있었다. “너를 들여다봐, 이성이 감성을 지배할 때까지, 눈을 감고, 류!” 새벽 두 시에 그녀를 만나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잠자리에 누워 아주 여러 번 심호흡을 했지만, 정말 주체하기 힘든 어떤 힘이 무시로 감정을 자극해서 나도 모르게 벌떡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앉곤 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옅은 잠 속에서도 나는 계속 라몽 의 여파에 덮여 있었던 것 같았다. 의식의 일정 부분에서 여전히 그 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그것을 사고하는 기능까지 남아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샌 듯한 기분. “언제나 생각해, 눈 뜨는 시간의 너, 아침에 대한 밤의 부끄러움.” 지난밤의 절박했던 감정에 비해 훨씬 안정된 아침이라는 생각을 하 며 나는 욕실로 들어가 찬물로 샤워를 했다. 라몽에게 전화를 하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라는 생각을 한 때문이었다. 찬물이 온몸으로 쏟아 져내리자 혼몽한 상태로 흐물거리던 온몸의 신경세포가 일제히 눈을 뜨고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팽팽하게 감지하는 것 같았다. 온몸에 비누칠을 하고 다시 찬물을 뒤집어쓰는 동안 기분은 좀더 고 양돼 나도 모르게 허밍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익숙한 선율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생각해보니 <트루 로맨스> CD에 수록된 곡 중의 하나였다. 소제목 : 이세상 살아가는 동안 샤워를 끝낸 뒤에 나는 집안의 창이란 창은 다 열어놓고 커피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물이 끓는 동안, 새도복싱을 하듯 잠시 상체를 좌우 로 흔들다가 문득 몸을 곧게 세우고 다리를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양 팔을 벌리고 수평을 유지하며 오른쪽 엄지발가락을 오디오의 전원 스 위치에 맞췄다. 가끔 하던 짓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순간적으로 중심이 흔들렸다. 에 잇, 하며 처음부터 다시 한번 동작을 반복했다. 먼저 빨간 전원 램프 에 불이 들어온 걸 확인한 뒤, 발을 좀 더 높이 들어올려 CD 플레이 버튼 � 눌렀다. 기분좋게 성공, 곧이어 어제 라몽이 집에 왔을 때 넣 어 두었던 <트루 로맨스>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짝, 손뼉을 치고나서 개스 레인지의 불을 끄고 커피를 탔다. 잔을 들 고 소파로 가 앉을 때 시간은 7시 40분이 되어 있었고 오디오에서는 샤워하는 동안 허밍으로 흘러나오던 바로 그 노래가 시작되고 있었 다. 세 번째 트랙, 조 웨이트라는 가수의 <꿈 속에서 (In Dreams)> 라는 노래였다.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보고싶지 않은 것들을 나는 보았음 하지만 그대가 내 곁에 누워 있을 때 그대의 눈을 통해 그 모든 고통 사라졌음 햇살이 창문을 넘어온다고 해도 꿈에서 나를 깨어나게 하진 못할 것임 어떤 역경이 몰아닥칠지라도 나 그대를 따르리니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나 항상 당신 곁에 있으리라는 꿈이 있음 진정 그것만이 나에겐 중요한 전부 나에게 당신이 있는 한 세상은 나의 소망에 답하고 나는 자유로움 정확하게 8시 8분에 나는 <낙원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초조함을 달래기 위해 내 스스로 그 시간을 지정한 것이지, 거기에 특별한 의 미를 부여한 건 결코 아니었다. 1시 1분, 2시 2분, 3시 3분, 4시 4분, 5시 5분...... 하는 식으로 시(時)와 분(分)이 동일하게 맞아떨어지는 시 각을 아주 어릴 때부터 왠지 모르게 나는 좋아했었다. 어긋나지 않고 함께 있는 상태, 홀로가 아니라 짝을 이룬 시각에서 느껴지는 단순한 정겨움 같은 것. 소제목 : 유레카! 8시 8분의 전화. 주인아줌마가 그녀의 방으로 전화를 돌려주고, 벨이 너댓 번쯤 울리 고 나서 비로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거 의 잠결에 수화기를 집어든 듯한 목소리가 신음처럼 수화기에서 흘러 나왔다. “...... 네 ......” “라몽, 나야.” “...... 누구 ......” “류.” “...... 응 ......” “어제 늦게 잤어?” “...... 늦게 ......” “안되겠다, 그럼 이따 다시 걸까?” “...... 응......” “잠에서 깨면 전화할래?” “...... 응 ......” “알았어, 그럼 더 자.” “...... 응 ......”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나서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는 생각, 그녀와 통화하기 전까지는 다른 아무 일도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었다. 평상시의 일 요일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아니 이전의 내 생활에 일요일이라는 게 있기는 있었는지, 과거가 모조리 삭제된 인간처럼 정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유레카!” 십분쯤 지난 뒤에 나는 튀듯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싱크대로 가 다 시 커피물을 올려놓고, 어제 먹던 식빵과 치즈, 딸기잼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계란 후라이를 먹고 싶었지만 귀찮아서 포기하고 커피와 냉 장고에서 꺼낸 것들만 쟁반에 담아 다시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과거 가 소멸된 인간이라 해도 , 현실과 미래를 위해서는 어차피 먹어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나는 발견한 것이었다. 왕관의 황금 순도 재는 방법을 발견하고 나서, “유레카!”하고 아르키메데스가 소리쳤던 것 처럼. 소제목 : 오 공주, 정말 아름답군요. 잠자는 숲속의 미녀. 식빵을 먹으며 나는 <낙원장>에서 잠자는 라몽을 생각했다. 아름다운 미모 와 나이팅게일 같은 목소리, 나비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 공주가 거기 있 었다. 어느날 사악한 마귀할멈의 바늘에 찔려 마법의 잠에 빠진 공주가 또한 거기 있었다. 거짓말처럼 세월이 훌쩍 흘러 어느덧 100년, 길을 지나던 이웃 나라 왕자님이 그녀를 발견했다. “흠, 왕자, 100년 동안의 잠, 공주에게, 뽀뽀, 잠 깨우기 위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벌써 클라이맥스인가, 하고 나는 고개를 갸웃했 다. 사사로운 과 ㅐ?일체 생략된 이야기 구조가 다소 황당무계하게 여겨져서 였다. ‘이웃나라 왕자’라는 것도 왠지 너무 단순하게 느껴졌다. 뭔가 더 짜 릿하고 극적인 요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했다. “슈퍼맨, 배트맨, 천재 과학자?” 마땅한 배역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심했다. 동 화의 황당무계함에 현실성을 가미할 수 있는 배역!__ 정말 등잔 밑이 어두웠 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식빵을 한입 베어물었다. 햇살 화창한 5월,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는 청년이 마법에 걸린 공주가 잠들 어 있는 성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가시덩쿨이 저절로 길을 만들고 성의 탑 으로 올라가자 공주가 잠들어 있는 방이 나타났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가자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공주의 모습이 보였다. __ 오 공주, 정말 아름답군요. 잠들어 있는 공주를 내려다보며 청년은 감탄했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이끌 려 자신도 모르게 허리굽혀 그는 그녀에게 입맞추었다. 단 한번의 입맞춤에 거짓말처럼 잠에서 깨어나 길게 기지개를 켜는 공주. __아아, 잘 잤다. __공주, 이제야 깨어났소? 100년 동안이나 잠들어 계시다기에 이렇게 공주를 구하러 온 거요. __100년 동안이나? 아, 생각이 나요. 바늘에 찔리자 갑자기 졸음이 왔어요. 이렇게 제 마법의 잠을 깨워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이 은혜 잊지 않겠어요 . __공주님은 얼굴도 아름답지만 마음은 더욱 아름답군요. 부디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공주님!” __근데, 당신은 누구죠? 손에 든 식빵을 쟁반에 내려놓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에 흠, 흠, 하며 나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결정적인 말을 해야 할 순간이 왔다는 생각 때문이 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공주에게 지극히 정중한 목소리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공주님, 저는 방관동에 사는 시인 지망생 오류라고 하옵니다.” 소제목 : 몹시 허전함 지루한 시간을 죽이기 위해 벽에 달라붙어 물구나무를 서고 있을 때 였다. 느닷없이 전화벨이 울려 물구나무를 선 채로 벽시계를 보았다. 저게 뭔가, 머리에 털난 이후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이상한 시간이 아찔하게 시선끝에 닿았다. 시침은 5와 6 사이에 있었고 분침은 12를 가리키고 있었다. 5시와 6시 사이의 정각? 정말 웃기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벽에 붙였던 발을 밀어 재빨리 자세를 잡고 다시 한번 벽시계를 보았다. 11시 30분이었다. 그 걸 거꾸로 보니까 ‘5시와 6시 사이의 ㅀ⇒?繭遮?고정관념 밖의 시간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여보세요?” 수화기를 집어들며 거의 백 프로, 나는 그것이 라몽에게서 걸려온 전화일 거라고 확신했다. “류? 오랜만. 나, 송가희.” 어이없게도 그것은 라몽이 아니라 창문과 동기인 가희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굳이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해도, 그 특이한 어투로 그녀가 송가희라는 걸 나는 단박 알아차렸을 터였다. 우리말과 우리글의 비 경제성을 생각해야 한다며 그녀 스스로 개발했다는 축약형 어투__ 어 찌 내가 그걸 못 알아듣고 어리뻥뻥했겠는가. 재학시절에는 교수들의 질문에도 시종 그런 식으로 대답했을 뿐만 아니라, 그와같은 축약형 문장으로 소설까지 쓰겠다는 말을 송가희는 종종 내뱉곤 했었다. 오직 한 가지 경우, 그녀가 술에 취했을 때만 그 축약형은 해제됐는데, 그건 술자리에서 종종 일어나는 거친 문학적 논쟁에 그와같은 어투가 적절치 못한 때문인 것 같았다. 축약형이 경 제적일 수는 있지만, 전세가 팽팽한 자리에서의 공격과 방어용으로는 어쨌거나 적절치 못하다는 결론을 내린 때문이었으리라. “아, 가희. 정말 오랜만이네?” 라몽이 아니라서 다소 실망스럽긴 했지만, 가희를 본 것도 상당히 오래 됐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렇게 말했다. 아마 두어 달쯤 전, 오 장주 형까지 가세한 자리에서 그녀를 본 게 마지막이었으리라. “잘 지냄?” “그저 그렇지 뭐. 그래 그동안 소설은 많이 쓰고?” “지겹게 죽쑤다가 어젯밤에 간신히 한 편 마무리지었음.” “그렇게 꾸준히 쓰고 있으니까 어쨌거나 좋겠구나.” “좋다기보다......몹시 허전함. 술 생각 간절하게 나서 전화 걸었음.” << 내일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소제목 : 황당무계, 황당무계 “술 마시자고?” 이키, 하는 표정으로 나는 물었다. “오늘 특별한 일 있음?” “오늘...... 아, 오늘은 안돼.” “왜 안됨?” 이상하다는 듯 그녀는 곧바로 되물었다. 모처럼 전화했는데 이럴 수 있느냐, 그런 의미인 것 같았다.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어. 웬만하면 같이 마시겠는데...... 오늘은 정말 안되겠어.” “저녁에두 안됨?” “응, 저녁에두 힘들어.” “알았음. 그럼 전화 끊겠음.” 딱, 잘라말하고 나서 그녀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보나마나 자존 ? 상했다고 한참동안 나를 욕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나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며 그제서야 털썩, 소파에다 몸을 던졌다. 가희를 만난다는 것 = 지난밤의 악몽 같았던 몇 시간을 오늘 다시 되풀이하겠다는 것.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생각하며 오분쯤 소파에 앉아 있다가 수화기 를 손에 들었다. 빨리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라몽을 은근히 원망하면 서였는데, 그때 너무나도 어이없는 기억 하나가 쏜살같이 뇌리를스쳐 갓다. 8시 8분, 잠에 취한 그녀에게 전화를 걸며 무심결에 잠에서 깨 어나면 전화를 하라고 말한 게 생각난 것이었다. “아, 황당무계, 황당무계, 류!” 인간이 어쩜 이렇게도 한심할 수 있는가,어이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주먹으로 머리를 한대 쥐어박았다. 지난밤의 악몽이 내 전화번 호를 그녀가 몰랐다는 데서 비롯됐거늘, 8시 8분에 전화를 걸며 도대 체 무슨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여전히 전화번호를 모르는 그녀에게 잠에서 깨어나면 전화를 걸라고? 정신업 이 버튼을 누르고 나서 나는 다시 한번 주먹을 들어 머리통을 쥐어박 앗다. 정말 오류다, 한심한 오류! “여보세요?” 전화가 201호실로 돌려진 직후, 벨이 한번 울리자 단박 라몽의 목소 리가 들렸다. “일어났어?” 차마 내 입으로 말하기 창피해서 전화번호 얘기는 꺼내지 못하고, 은근히 눈치를 살피듯 나는 그렇게 입을 열었다. 하나마나한 물음, 일 어나지 않고 어찌 전화를 받겠느냐, 이 한심한 놈! 소제목 : 도망가지 마? “왜 이제 전화해?” 오랜 긴장감에서 가까스로 벗어나듯, 이를 데 없이 맥빠진 목소리로 그녀는 물었다. “이제......라구?” 잠결에 받은 전화였는데 설마,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은근히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아까 전화 받구나서 얼마 안 있다 일어났는데...... 전화번호를 몰라 서 지금까지 내내 기다리고 있었잖어. 전화번호를 왜 그렇게 안 알려 주는 거야, 류?” “으...... 눈치챘구나.미안,미안. 정말 미안.” 손을 들어 눈을 가리며 나는 중얼거렸다. “기다 ?鳴?..... 너무 답답해서 지금 그냥 방관동으로 갈까 하던 참 이었어. 12시 정각까지 전화 안 오면 나가려고 했단 말야.” “까딱했으면 또 어제같은 일 날 뻔했구나.” “어젯밤 얘긴 꺼내지도 마. 지금도 눈물이 나려고 해.” “많이 울었어?” “여기 돌아와서도 새벽까지 울었어. 그래서 지금 눈이 퉁퉁 붓고 얼굴이 엉망이야. 약방에 가서 부기 빠지는 약 사먹구 갈 거야.” “그럼 지금 출발할래?” “응, 지금 갈게. 도망가지 마?” 단단히 다짐을 받듯 그녀는 말끝을 올렸다. 갠돋좇?누가 가? 어젯밤엔 밖에 나가서 라몽을 기다리다 그렇게 된 거야.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길래 뭐가 잘못됐나 하고 성좌동으로 가서 기다린 거라구. 길이 어긋나고 운이 나빴던 거지 뭐.” 내가 하는 말이지만, 정말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말에 전 적으로 수긍하는 줄 알았던 그녀, 잠시 뒤에 너무나도 엉뚱한 말로 나를 면괴스럽게 만들었다. “치, 한밤중에 오두방정을 떠니까 그런 일이 생기는 거지 뭐.” 소제목 : 라몽과 나, 방과 방 사이 무릎을 세우고 소파에 앉아 두 개의 방을 보았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생 각났다. 안방에는 침대와 옷장이 있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잠에서 깨어난 이후에는 당연히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안방과 나란히 붙어 있는 작은 방에는 책장과 테이블이 붙어 있었다. 꿈이 아니라 현실의 공간으 로, 백 년 동안의 긴 잠에서 깨어난 공주와 시인 지망생이 들어서고 있었다. __ 공주님, 여긴 낯설고 누추한 공간입니다. __ 아직도 제가 꿈을 꾸고 있나요? __ 아뇨, 제 마음의 공간을 미리 보여 드리는 겁니다. __ 제가 이곳에 있으면 뭐가 달라질까요? __ 아마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새로워지겠죠. __ 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 옷장과 침대가 있는 안방에 공주가 잠들어 있었다. 푸르스름한 밤하늘에 떠 오른 만월,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얼굴에 고운 분가루처럼 달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어둠 속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자신이 가야 할 길의 마지막 지 점을 예감하는 스물다섯의 초상. 마음 한켠에서 두려움과 망설임이 눈을 뜨고 , 그것이 불길한 징후처럼 푸르스름한 달빛 속으로 젖어드는 걸 그는 뚜렷하 게 보았다. 가기 위해 있는 길, 내가 가야 비로소 의미를 얻는 길. 안방과 작은방의 중간 지점에 서서 그는 다시 한번 망설였다. 그 지점이 뭔 가 명료하지 않은 문제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랑이라는 이름에 대해 생 전 처음, 그는 자신이 일종의 경계를 의식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번 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으며, 한번도 골몰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할지도 알 수 없었으며, 의존할 만한 근거가 마땅치 않다는 것 도 또한 알 수 있었다. 무엇을 의식하는 걸까. 밝은 빛살이 밀려드는 대낮, 다시 두 개의 방을 보았다. 여전히 침대와 옷장 이 놓여 있는 안방, 책장과 테이블이 놓여 있는 작은방이 보였다. 아주 잠시 , 전혀 다른 내 마음의 공간에 빠져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커피를 마셔 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무릎을 내릴 때, 다시 한번 안방과 작은방의 경계지점 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방과 방 사이, 너비 30cm쯤의 협소한 수직 벽면이었다 . 물끄러미 그곳으로 시선을 집중하는데, 나도 모르게 이런 중얼거림이 입에 서 흘러나왔다. “라몽과 나, 방과 방 사이......” 소제목 : 오늘은 왠지 모르게 슬퍼 라몽이 집으로 온 건 오후 2시가 조금 못 되어서였다. 잠을 푹 자지 못하고 많이 울어서인지 정말 얼굴이 부석부석하고 눈 부위가 다소 부 풀어오른 것 같았다. 안색까지 안 좋아보여서 집으로 들어서는 그녀에 게 정말 괜찮냐고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다며 그녀는 힘없이 웃어보였지만, 생기를 잃고 측은하게 가라앉은 모습이 왠지 모르게 가 슴을 아리게 해서 나는 멍하니 서있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아. 잠을 푹 자지 못해서 그래.” 나의 팔을 잡고 소파가 있는 곳으로 가며 나른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 했다. “어젯밤은 미안해.” 소파에 앉지 않고 바닥에 앉아 등을 기대는 그녀를 안쓰런 눈빛으로 나 는 내려다보았다. “뭐가 미안해...... 이제 어젯밤 얘긴 하지 마.” 힘없이 웃는 얼굴로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뭐 좀 먹었어?” 소파에 앉으며 나는 물었다. “응, 우유.” 말을 하고 나서 바닥에 앉아 있던 그녀, 소파에 앉은 나의 무릎에다 가 만히 머리를 갖다댔다. “토스트 만들어줄까?” 조심스럽게 윤기가 흐르는 그녀의 단발머리에 손을 얹으며 나는 물었다. “아니, 괜찮아. 먹고 싶으면 내가 말할게. 그냥......” “......” “오늘은 왠지 모르게 슬퍼.” “......” “예전엔 이런 날 혼자 짜장면을 사먹고 몇 시간쯤 시내를 쏘다니면 괜 찮았었는데......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지도 않아. 날씨가 너무 화창해 서 그런가?” “가끔 그럴 때가 있지 뭐. 깊은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막막하고 멍한 기분...... 나도 알아.” 그녀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그녀가 느끼는 외로움의 근거에 대해 나는 막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소제목 : 너무너무 보고싶어지는 병 스물셋, 많지도 않은 나이, 부모와 헤어져 홀로 사는 일의 고단함, 세상에 대한 막막함, 무시로 마음의 장막이 되는 외로움...... 그런 것 으로부터 얼마나 그녀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녀가 지니고 있는 밝 음의 이면에 오히려 무겁고 감당하기 어려운 어둠이 자리잡고 있을런 지도 모른다는 헤아림 속으로 나는 깊이깊이 침잠했다. “류......” 머리를 쓰다듬는 나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으며 그녀가 입을 열 었다. “왜?” “어젯밤에...... 나 아주 이상한 무서움을 느꼈어.” “이상한 무서움?”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던 손길을 멈추고 나는 물었다. “응, 처음 느껴보는 무서움이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혼자 있어서 그런 거겠지.” “아냐, 그런 거하곤 달라. 그런 게 아니고......” “......” “류가 너무너무 보고싶었는데, 그렇게 보고싶어지는 게 갑자기 무 섭게 느껴진 거야. 보고싶어하면서 왜 그런 무서움이 느껴진 걸까?” 말을 하고 나서 살며시 고개를 뒤로 젖히고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았 다. 한동안 엎드려 있어서인지 눈에 잠기운이 어려 있는 것 같았다. “글쎄, 너무 보고싶어서 느껴지는 두려움...... 뭘까?” 고개를 갸웃하고 나서 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나 의 양손을 잡아 자신의 뺨으로 가져갔다. “나, 무슨 병에 걸린 거 아냐?” 잠기운에 취한 사람처럼 스스르 눈을 감고, 힘없이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무슨 병?” 거꾸로 내려다보는 그녀의 턱선이 칼로 도려낸 듯 단아해 보였다. “안되겠어, 올라가야지.” 갑자기 자세를 바꾸고 그녀가 소파 위로 올라왔다. 그녀를 위해 소 파 끝쪽으로 조금 옮겨앉자 그녀가 얼른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눈을 감은 채, 거의 잠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바보, 너무너무 보고싶어지는 병 말야.” 소제목 : 새벽, 짜장면집 날이 저물고 있었다. 소파에 누워 잠든 라몽의 얼굴 위로 저물녘의 푸르스름한 이내가 젖어들고 있었다. 그녀가 나의 무릎을 베고 완전 히 잠에 빠져든 직후, 베개를 가져다 그녀의 머리를 받쳐주던 때로부 터 어느덧 서너 시간이 지난 뒤였다. 나는 줄곧 소파 옆에 앉아 시집을 읽었고, 잠든 그녀의 고른 숨결을 아주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다. 외롭고 슬픈 날 혼자 짜장면을 사먹 는 여자, 그녀 곁에서 시집을 읽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한 독서가 아닌 것 같았다. 몇 번씩 되풀이 읽은 시집들 潔鄕嗤? 이전과 전혀 다른 시각으로 시를 보게 되는 미묘한 독법의 차이를 어떻게 설 명할 수 있을까. 세 권의 시집을 읽으며, 여러 편의 시들 속에서 나는 그녀의 이미지 가 또렷하게 살아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시적인 상황 속에서 그녀 의 이미지가 살아난다는 건 뭔가. 그것은 곧 시인의 감흥으로 내가 시를 읽는다는 의미와 별로 다름이 없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시 인의 감흥으로 시를 읽는다는 게 나에겐 독특한 경험처럼 느껴졌고, 그것으로 아주 오랫 동안 집중력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 [56억 7천만년의 고독]이라는 시집에 실린 <새벽 짜장면집>이라는 시 한 편에 나의 시선은 단단히 사로 잡혀 있었다. <가제리 자비의 침묵 수도원 계획안, 이일훈, 1991>이 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시였다. 창녀의 보람을 아느냐, 고, 어느 건축가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했다 그는 눈 내린 포도밭을 가리키며 웃었다 나도 웃었다 새벽, 여관비가 없는 나와 영숙이는 벽치기를 했다 영숙이의 빤스로 정액을 닦고 두 손 꼭 잡고 먹던 자비의 새벽 짜장면 유년의 폭설이 가제리 산 70번지로 영숙이 검은 머리 위로 쌓이고 숙아 숙아, 너 꼭 망부석 같으다 신월동 새벽 짜장면집을 나오며 영숙이와 나는 성당에 가서 무릎 꿇고 빌었다 마리아님, 임신 안 되게 도와주소서 수도원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 었다. 하얀 석회 가루로 세례를 받은 떳떳한 모형 나무가 영숙이 알치마처럼 휘날리던 가제리 검은 추억의 면발에 붉은 고춧가루 듬뿍 뿌린 짜장면뿐만 아니라 우동과 짜장밥까지 있던 신월동 근처 영숙이의 입술에서도 맛볼 수 있던 매운 양파 냄새 빛과 諍弩?개벽하던 모형의 세계에서 다시 나는 새로운 우주를 건축중이다 여관비 없어 어두운 골목 조립식 담 밑에서 영숙이와 짜장면 먹고 한 탕 더 뛰던 눈덮인 裸木, 자비의 새벽 짜장면집 소제목 : 라몽이 느껴지는 시 몇 번이나 그 시를 되풀이 읽고 나서, 짜장면과 슬픔과 욕정에 대해 나는 생각했다. 두 손 꼬옥 잡고 짜장면을 먹는 여관비 없는 새벽의 연인들, 그들에게도 슬픔은 진하게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짜장면과 슬 픔, 짜장면과 욕정이 한데 어우러질 수 있다는 게 정말 기묘하게 여 겨졌다. 시 속에 담긴 짜장면, 짜장면 속에 담긴 시__ 짜장면이 도대 체 뭔가. 고개를 들고 잠들어 있는 라몽을 내려다보았다. 영숙이가 되어 있는 그녀, 나와 손을 꼬옥 맞잡고 짜장면을 먹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생 각해 보았다. 짜장면 먹고 성당에 가서 무릎 꿇고 비는 그녀와 나를 생각해 보았다. 임신 안되게 도와 달라고 비는 새벽의 연인들..... 라몽 과 나 사이, 방과 방 사이가 다시금 기분을 미묘하게 만들었다. 그녀 에 대해 사무치게 뭔가를 갈망하고 있는 내 자신, 그것을 도무지 속 일래야 속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녀가 눈을 뜨고 말똥말똥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깼어?” 무안해서 나는 얼른 시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신월동 새벽 짜장 면집>이 좀체 뇌리에서 지워질 것 같지 않았다. “계속 여기 앉아 있었어?” 손을 뻗어 내 목에 두르며, 기분이 훨씬 나아진 표정으로 그녀는 물 었다. “라몽이 나오는 시들을 읽고 있었어.” “내가 나오는 시?” “라몽이 느껴지는 시.” 나도 모르게 뭔가가 버겁게 느껴진다는 표정으로 나는 물끄러미 그 녀를 내려다 보았다. “어떤 시들이 그래? 읽어줄 수 있어?” 환하던 실내의 빛살에 묵중한 기운이 젖어들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 굴에서는 오히려 선연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 어차피,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시집을 집어들었다. 어둑발이 시집의 지 면으로 슬금슬금 기어올라오고 있었지만, 내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을 털어놓듯 아주 담담한 음성으로 나는 그 시를 그녀에게 읽어 주었다. 소제목 : 슬픔을 느끼게 하는 욕정 “짜장면......” 내가 읽은 시를 듣고난 그녀, 다소 놀랍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 거렸다. “짜장면만 있는 게 아니고...... 슬픔을 느끼게 하는 욕정도 있어.” “그 시에서 나를 느꼈다구?” “......” “괜찮아 말해 봐.” 소파에서 내려와 내 바로 옆에 앉아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그녀가 물었다. “느꼈던 거 같애.” 무릎을 세우고 거기다 턱을 얹으며 나는 말했다. “그런 거...... 견디기 힘들어?” “......”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알아. 말하지 않아도 돼. 지금 당장 나를 괴롭게 하는 건 그런 게 아냐. 라몽에게 어떤 제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속에 가득차 있 어.” “제안?” 내 어깨에 기댔던 머리를 들어올리며 다소 놀라는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내가 강요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제안일 수밖에 없겠지 뭐.” “말해 봐, 궁금해.” 말을 하고 나서 그녀, 양손으로 내 어깨를 잡고 자신과 마주되게 돌 려앉혔다. “언제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어. 어젯밤, 성좌동에서 라 몽을 기다리면서부터였는지...... 아니면 오늘 통화를 하고 나서부터였 는지 모르겠는데...... 암튼 내 머리 속에서 계속 떨어져나가지 않는 생 각이 하나 있어.”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나를 바라보는 그녀, 점점더 짙어가는 주변의 어둠 속에서도 좀체 빛을 잃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아직도 일정한 거리감이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숨 을 깊이 들이마시고 나서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런 거야. 라몽이 낙원장 같은 곳에서 생활하는 거...... 그러니까 그런 곳에서 먹고 자고 움직인다는 게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해. 여러 가지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런 곳에 있게 해선 안된다는 생각에 나는 시달 리고 있어. 이런 감정, 나쁜 게 아니라고 생각해. 자신이 아끼고 사랑 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나 이런 생각은 할 수 있을 거야.” “......” 소제목 : 아냐, 아냐, 그런 게 아냐, 류 “여기 내 집에 방이 두 개 있다는 사실이 아주 새로운 의미로 내게 느껴졌어. 내가 말하는 제안이란 그런 거야. 방이 두 개 있으니까, 하 나를 라몽이 쓰고 나머지 하나를 내가 쓰면 어떨까...... 물론 이런 생 각을 지속하는 데에 두려움과 망설임이 뒤따랐지만...... 결국 중요한 건 라몽과 나라는 생각을 했어. 라몽과 나, 방과 방 사이......” 빠르게 짙어져가는 주변의 어둠을 둘러보고 나서 나는 다시 입을 열 었다. “문제는 그런 거야. 라몽이 이곳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바램은 공간적인 불편함을 해결해 주고 싶다는 것이지만...... 같은 공간에 함 께 있으면서 생겨나는 감정적인 것들...... 그러니까 <라몽과 나 사이, 방과 방 사이>라는 게 어쩌면 힘든 장애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을 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견디지 못하겠다는 의미는 결코 아냐. 라몽의 의견을 듣고, 어떤 식으로든 그걸 존중해 주고 싶어. 그걸 모 르니까 지금은 나 혼자 힘들어하는 거야. 어쨌거나 난...... 라몽이 싫 어하는 일은 하고싶지 않아.” 내가 말을 마친 뒤에도 그녀는 꼼짝을 하지 않았다. 불을 밝히지 ? 은 주변의 어둠으로 그녀 얼굴의 윤곽이 지워지고 있었지만, 그녀가 눈물을 흘리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정말이지 상상으로도 할 수 없었 다.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나에게 갖다대고, 말없이 뺨을 비벼대기 시 작한 직후에 나는 비로소 그걸 알 수 있었다. 나의 말을 들으며, 어둠 속에서, 소리없이 그녀는 울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말을 잘못한 거야?” 그녀의 머리를 싸안으며 속삭이듯 나는 물었다. “아니, 아냐...... 그런 게 아냐, 류.”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하며 그녀는 연신 나의 얼 셀?자신의 뺨 을 비벼댔다. 그녀의 숨결을 내가 받아들이고, 나의 숨결이 그녀에게 전해지는 게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녀의 콧날이, 부드러운 뺨이, 눈두덩이 나의 그것들과 마주치면서 눈물이, 숨결이, 체온이 아 직 익숙하지 않은 그녀와 나의 몸동작에 의외의 유연성을 제공하는 것 같았다. “류...... ” 그녀의 촉촉하게 젖은 입술이 내게 다가왔을 때 나는 양손으로 물을 퍼올리듯 그녀의 뺨을 감싸안았다. 이른 아침, 아직 나 가보지 않은 시골길의 서늘한 냉기, 안개에서 가까스로 벗어나는 산과 강, 인적 끊 긴 오솔길의 녹음방초, 돋을볕을 받으며 풀잎 끝에서 대롱이는 아침 이슬 같은 것들...... 염두에 두지 않고 의식하지 않았던 것들이 풍경으 로 살아오르며 그녀와 나에게 깊은 교감의 세계를 일깨워주기 시작했 다. 소제목 : 돌? 걷잡을 수 없는 힘에 이끌리며 그녀와 나는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 녀의 등과 허리를 잡고, 한순간 뒤에 나는 그녀를 바닥으로 눕게 했 다. 가슴에 가득 안겨오는 그녀에게서 형언할 길 없는 편안함이 느껴 졌지만, 왠지 모르게 머리 속은 안개가 가득 낀 듯 몽롱해지기 시작 했다. 허우적거리듯 나의 손은 그녀의 몸을 더듬어나갔고, 이윽고 그 녀와 나 사이의 마지막 경계를 의식하듯 점차로 그 움직임이 빨라지 기 시작했다. “아, 류...... 잠깐만.” 하체로 내려가는 나의 손을 잡으며 그녀가 입 ?열었다.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추고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다 얼굴을 묻었다. 아주 크게 심 호흡을 한번 하고 나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견디기 힘들어?’ 자신의 목덜미에 파묻힌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가 물었다. 얼 굴을 파묻은 채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을 했다. “알 거 같애. 하지만 류...... 아직 나 경험이 없어. 그런 게 뭐가 중 요하냐는 말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한텐 쉬운 문제가 아냐.” “......”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 나는 천천히 머리를 들어올렸다. 어둠 淡? 서 희붐하게 떠오르는 얼굴을 들여다보며 고조되었던 호흡을 가다듬 고, 그런 다음에 그녀 옆에 나란히 몸을 눕혔다. “이런 순간에 부딪치면 나도 모르게 자꾸 엄마 얼굴이 떠올라. 커 다란 돌을 손에 들고 힘들어하는 엄마 얼굴......” 안정을 되찾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돌?” 이런 문제와 돌이 무슨 상관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물었다. “응, 엄마와 나 사이에 돌에 읽힌 일이 있었어. 들려줄까?” “해 봐.” 어둠이 넘실거리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나는 말했다. “좀 쑥스러운 얘긴데...... 듣고 나서 웃지 마. 알았지?” 손을 들어 나의 코를 잡으며 그녀가 다짐을 주었다. “알았어. 약속할게.” 코를 잡았던 그녀의 손을 들어 나의 가슴으로 옮겨놓았다. 반듯하게 누워 있던 그녀, 재빨리 내쪽으로 돌아누우며 나의 팔을 베개 삼았다. 소제목 : 효녀 라몽 “나 와우전문대 일학년이었을 때, 술 마시다가 처음으로 새벽 세 시 넘어서 집에 들어간 적 있었어. 그때까지 꼬박 뜬눈으로 앉아 있 던 엄마가 너무 화가난 표정으로 나에게 야단을 쳤는데...... 술 기운에 나도 모르게 엄마한테 막 대들었어. 아무일도 없이 술만 마시다 그렇 게 늦은 건데, 엄마가 너무 화를 내니까 나도 덩달아 화가난 거야. 그 래서 그렇게 믿지도 못할 거면 낳긴 뭐하러 낳았냐고 울면서 막 대 들었어. 그랬더니 그 새벽에 갑자기 엄마가 밖으로 나가더니 그 노구 에 어디선가 내 머리통만한 돌을 낑낑거리며 들고들어와 거실 바닥에 다 쿵 소리가 나게 내려놓는 거야. 그러면서 그렇게 영골부터 막 돌 아칠 거면 차라리 너 죽고 나 죽자며 막 우시는 거야. 그 말을 들으 니까 왜 그렇게 눈물이 펑펑 쏟아지던지...... 갑자기 엄마가 너무 측은 하고 불쌍해 보여서 둘이 부둥켜앉고 엉엉 소리나게 막 울었어. 그러 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는데...... 그 뒤론 그런 상황만 생기면 그날 새벽의 엄마 얼굴이 자꾸 떠올라.” 말을 하고 나서 내 옆구리를 살며시 꼬집으며 그런 거 이해할 수 있 어, 하 ?그녀는 물었다. “효녀 라몽이네.” 망연한 눈빛으로 어둠이 넘실거리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나는 중얼거 렸다. “솔직히 말하면 학원 다니면서도 이상한 얘기 많이 들어. 진짜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상한 얘기들이 참 많이 나돌아. 특히 여자 연예인들에 관한 얘기들이 많은데...... 류도 그런 거 대강알지?” “스캔들?” “아니...... 스캔들이면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라도 있잖아. 그런 게 아니고 무슨 암거래처럼 육체적인 관계를 가지는 거에 대한 소문이 참 많아. 「?유명해지고 싶어서 안달인 얘들이 실제로 많으니까 그 럴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런 말 들으면 왠지 마음이 아 파. 그렇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름을 얻으면 뭐하나 하는 생각...... 그래서 난 그냥 내 식대로 한번 가보자, 그런 생각 여러 번 했었어.” 말을 하고 나서 그녀, 내 심장이 있는 부위에다 손을 올려놓았다. “난 그 방면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래도 라몽이 올바른 생각을 하 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리 세상이 잘못 돌아가도 옳다고 생각하 는 건 지켜나갈 필요가 있잖아. 어느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위해 그런 생각은 지켜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름을 얻고, 그 대가로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을 잃게 된다면 무 슨 소용이 있겠어. 그리고......” 갑자기 뇌리를 스쳐가는 뭔가가 있어 나는 말을 중단했다. << 내일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소제목 : 나 지켜줄 수 있어? “그리고 뭐?” 궁금하단 듯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헤르만 헷세의 작품에 나오는 말이 생각나는데......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아주 짧기 때문에 그것이 소중한 거라는 말이 있었던 거 같애. 유명 연예인이 된다는 거...... 그것도 어차피 순간적인 환상 처럼 지나가는 거 아닌가?” 말을 하고 나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부착된 점등 스위치를 눌렀다. 느닷없이 불을 밝히자 다소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그 녀도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잠깐만, 하고 말하고 나서 나는 작은방의 책장으로 가 헤르만 헷세 의 소설집을 꺼내왔다. 순간적으로 나의 뇌리를 스쳐간 그 부분을 찾 기 위해서였다. <크늘프>에서 그것을 찾아낸 뒤, 별다른 망설임 없이 나는 그 부 분을 소리내 그녀에게 읽어주기 시작했다. 책을 읽을 때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놓았던 부분이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성도 그 때가 있다네. 그리고 늙어죽지 않는가. 그렇기도 하니까 사람들은 아름다운 소녀를 보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만일 아름다운 것이 영원히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라면, 처음에는 그것을 보고 기뻐할는지 모르겠지만, 점점 냉정하게 보게 될 것이며, 그까짓 것 늘 있는 것, 오늘 새삼스럽게 있 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것일세. 이에 반해서 나약한 것, 변하는 것에 대해서는 볼 때에 기쁨을 느낄 뿐 아니라, 비애조차 느끼게 된다네. 그래서 나는 밤하늘로 떠오르는 불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알지 못하네. 캄캄한 밤에 공중으로 올라 가는 초록색의 푸른 불꽃은, 가장 아름다워질 무렵에 작은 호선을 그 리며 꺼지는 것일세. 그래서 陋痼?보고 있으면 기쁨과 함께 불안을 느끼는 것일세. 기쁨과 불안, 그것은 서로 붙어다니며, 그것이 순간적 일수록 아름다운 것일세.” 책을 읽고 나서 고개를 들어올리자 사뭇 감동스런 눈빛으로 그녀가 나를 보고 있었다. 다소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어 보였다. “류......” 이를 데 없이 차분한 표정으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왜?” 책을 손에 든 채 나는 그녀를 보았다. “그럼, 여기서 같이 살아도 나 지켜줄 수 있어?” 소제목 : 하느님이 내게 보내주신 사람 “......” 아, 하는 표정으로 나는 입을 벌렸다. 좀전의 내 제안에 대한 응답을 비로소 그녀가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벌렸던 입을 다물고, 은밀하 게 심호흡을 한 뒤에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라몽이 싫어하는 일, 안할 거라고 아까 말했잖아.” 욕망을 억누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내 가슴 더 깊은 곳 에서 눈을 뜨는 순수한 의지를 나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욕망 보다 훨씬 드넓고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는 어떤 힘, 그것이 보다 근 원적인 의미에서의 사랑법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에 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격정을 떠난 무언의 굳건한 사랑 보다 더 귀하고 행복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헷세의 표현이 떠올 라서가 아니라, 아주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그녀를 위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훨씬 강한 힘으로 나를 부추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류는 하느님이 내게 보내주신 사람인가봐. 엄마 아빠 미국으로 떠 난 뒤에......” 울먹울먹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며 그녀는 내 가슴으로 무너져왔다. “모르겠어. 이런 결정이 쉬운 건 아니었지만...... 나도 모를 어떤 힘 이 나를 계속 이끌어가는 게 느껴져. 내가 이길 수 없는 힘 같은 거 있잖아. 하지만 내가 라몽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면, 그건 라몽이 내 삶의 의미가 된다는 얘기하고 똑같은 거야.”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나는 말했다. “이렇게 평화로운 기분..... 영원히 계속됐으면 좋겠어.” 내 가슴에다 뺨을 댄 채 그녀가 웅얼거렸다. “모르겠어. 잘은 모르겠지만...... 둘이 함께 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 으로든 노력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응......” 가슴에 앉긴 채 끄덕끄덕,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을 했다. “근데 짐은 언제 옮기지?” 가장 중요한 걸 잊었단 목소리로 나는 물었다. 내 품을 벗어난 그녀, 손으로 머리를 매만지고 나서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두 렵기도 하고, 의구스럽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는 표정이었는데, 짧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의 해답이 될 만한 질문을 그녀는 내게 던졌다. “우리, 정말 같이 사는 거야?” 소제목 : 스물셋이면 이미 닭죽 읽던 책을 덮었다. 고개를 들고 달력을 올려다보았다. 7월 15일에 붉은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달력에 고정시켰던 시선을 옆으로 조 금 옮겨 벽시계를 보았다. 아직 열한시가 되려면 30분 정도의 시간 이 남겨져 있었다. 30분 뒤에 당도할 시간, 그것이 라몽을 위해 부디 행운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천천히 소파에 서 일어났다. 7월 15일, 일요일, 오전 11시. 라몽과 나에게 오늘이 오기까지, 지나간 일주일은 무척이나 답답하 고 지루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가 서로 “� 어떤 식으로든 피 해를 주고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대단히 미묘한 숨바꼭질 을 한 셈이었다. 유월 첫째주 일요일에 그녀가 성좌동에서 방관동으 로 거처를 옮긴 이후, 근 6주가 가까워지는 지금까지 이것이 그녀와 나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 중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터였다. __류, 이것 좀 봐. 올해가 내가 응시자격을 가질 수 있는 마지막 해 야. 이주일쯤 전, 그녀가 집으로 가져와 내게 보여준 ‘YG 탤런트 선 발대회’ 모집 요강에는, 놀랍게도 참가자격이 만 16세에서 23세까 지로 제한되어 있었다. ‘YG’가 영 제네레이션(young generation)의 약자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고작 스물셋인 라몽의 나이가 응시 자격의 커틀라인이 된 다는 건 정말이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바 닥에서 스물셋이면 이미 ‘닭죽’으로 취급 받는다는 그녀의 얘기를 듣고 나서는 어설픈 농담 같은 것도 선뜻 입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녀, 라몽이 자신의 현실을 얼마나 초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__ 응시할 거야? 그녀의 표정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읽어내며 나는 물었다. __ 할 거야. ‘해야지’가 아니라 ‘할 거야’라는 그녀의 말에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의지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선발과정에 참여하는 걸 원치 않아서가 아니라,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그녀가 그런 과 정에서 행여 상처라도 받게 되면 어쩌나 하는 우려감을 나는 지니고 있었다. 하룻밤 자고난 뒤에 신데렐라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들이 부지기수 인 세상, 영광의 히로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여전히 내게는 ‘ 하 쳄� 별따기’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스타가 하늘의 별같 은 존재로 우상화되는 시대라면, 스타가 되고 싶어하는 더 많은 사 람들에 의해 세상은 거대한 갈망의 도가니로 변할 수도 있을 거라는 우려감. 소제목 : 혼자 있고 싶어 사진을 첨부한 서류를 방송국에 제출하고 돌아오던 날, 라몽은 거 의 입을 열지 않았다. 긴장감 때문일 거라는 판단으로 가능한 한 그 녀를 편하게 해 주려 했지만, 음식도 먹으려 하지 않는 그녀를 보면 서는 다소 걱정스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가 좋다 면 몰라도, 그렇지 않을 경우엔 어쩌겠는가. __ 류,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이럴 땐 나도 내 자신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1차 서류 전형에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던 날, 가까스로 그녀가 내 게 입을 열어 건넨 말이었다. 그것 � 나는 절박하다는 말쯤으로 해 석했지만, 그녀가 2차 예선 준비를 하던 무렵부터는 좀 심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선 전날 밤, 그녀는 자신이 쓰고 있는 안방으로 들어가 아예 문 을 안으로 걸어잠궜다. 이사를 오던 날부터 그녀가 안방을 쓰고 내 가 작은방을 쓰고 있었지만, 그렇게 일방적으로 문을 안으로 걸어잠 근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방을 따로 쓰기로 했으면서도 거의 날마 다 그녀와 나는 거실의 소파 위나 바닥에서 함께 잠이 들어버리곤 한 때문이었다. __ 꼭 이렇 � 해야 하는 거야, 라몽? 그녀가 걸어잠근 방문 앞에서 난감한 기분으로 나는 그녀를 불렀 다. 같이 있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와같은 상황을 견디기가 어려워서 였고, 그녀에게서 드러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성향이 또한 힘들게 여겨져서였다. __ 류, 미안해. 그냥 혼자 있고 싶어. 2차 예선을 치르고 온 뒤부터 그녀의 상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꿈 을 꾸듯 몽롱한 표정, 깊이 가라앉은 눈빛, 자주 내쉬는 한숨만으로 도 나는 그녀의 골몰이 어느 정도인지를 넉넉히 알아차릴 수 있었 다. 다소 웃기는 생각일런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인가, 아주 문득 나 는 라몽이 송가희와 대단히 비슷한 성향의 일면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 자신이 되고 자 하는 일에 몰두하는 정신의 집중력에 있어 별반 다름이 없게 여 겨진 때문이었다. 라몽이 2차 예선을 치르고 온 다음날, 나는 신문에서 ‘YG 탤런트 선발'에 관한 기사를 찾아 읽을 수 있었다. 고작 십여 명 정도의 연 기자를 뽑는데 응시자가 만오천 명을 육박했으며, 그 중에 1차 서류 전형을 통과한 사 汰� 팔백여 명 정도이고, 2차 예선에서 다시 추려 질 인원은 백오십 명 정도라는 걸 기사는 알려주고 있었다. 소제목 : 2차 예선 발표일 2차 예선에 통과한 사람들은 다시 3차 예선에서 50명 정도로 압축, 마지막 본선을 치르게 된다는 것. 유학을 다녀온 사람, 대학원을 졸 업하거나 다니고 있는 사람, 현직 스튜어디스, 유명 연예인들의 친인 척들이 적잖이 응시했다는 얘기도 신문기사에는 덧붙여져 있었다. 기사의 마지막에서 나는 7월 15일 이라는 날짜와 전화번호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2차 예선 통과자 발표일과 문의처 전화번호였다. 라몽 모르게 결과를 알아볼 요량으로 나는 달력에다 표시를 해 두 고, 문의처의 전화번호를 달력 貧涌〈� 적어두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녀가 자발적으로 알려줄 것같지 않아서 그런 것인데, 그게 벌써 일주일 전이 일이었다. 오늘 아침 라몽은 여전히 침잠된 표정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 다. 토요일과 일요일, 양희진이라는 선배 언니와 이벤트 대행회사에 서 아나운서 모델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극 도의 긴장감과 부실한 음식 섭취로 인해 그녀는 얼굴이 많이 수척해 져 있었다. 오늘이 2차 예선 발표일이라는 얘기를 입밖으로 꺼내지 못한 건 물 론이지만, 나보다 먼 � 그녀가 일체의 얘기를 생략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 잘 다녀오라는 말도 나는 입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문을 나서 기 전 꼭 한번 그녀의 눈을 쳐다볼 수 있었는데, 묵시적인 느낌으로 그녀는 내게 이런 말을 대신하고있는 것 같았다. 류, 미안해. 11시 11분. 달력 뒷면에 적어 두었던 문의처로 나는 전화를 걸었다. 통화중 신 호음을 듣고 곧바로 후크를 누른 뒤에 재다이얼 보턴을 눌렀다. 띠- 띠- 띠- 띠- 띠- 띠- 띠, 경쾌하면서도 빠른 소리가 튀어올랐지만 곧이어 다시 통화중 신호음. 還쳰맛恙【� 유니폼을 입고 아나운서 모델을 하고 있을 라몽의 모 습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똑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꼬르르륵, 꼬르 르륵, 이윽고 뭔가가 물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소리를 들으며 아주 크게 나는 심호흡을 했다. “이차 예선 통과자 발표 났나요?” 가슴이 두근두근, 갑작스럽게 심계항진이 일어나는 것 같아 나는 아랫배에다 힘을 잔뜩 주고 말을 꺼냈다. 소제목 : 지가아마사? “네, 접수번호와 성함 말씀하세요.” 감정이 배제된 듯한 목소리로 여자가 말했다. “아......”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나는 입을 벌렸다. 라몽의 접수번호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급하게,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심정으로 나 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접수번호는 모르고...... 이름이 라, 몽, 인데요. 알 수 없을까요?” “잠깐만요.” 처리 결과가 컴퓨터에 입력돼 있는지 빠르게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 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동안에 나는 다시 箕� 라몽의 모습을 떠올렸다. 화려하게 성장을 하고 열광하는 청중 들에게 손을 들어 답하는 라몽, 좌절감을 이기지 못해 식음을 전폐하 고 방문을 걸어잠근 라몽...... 극심한 대비감 때문에 짧은 시간 속에서 장구한 세월의 무게가 느껴 지는 것 같았다. 그때, 의식의 정돈(停頓) 상태에 날카로운 쐐기처럼 날아와 박히는 여자의 목소리. “라몽이라는 이름, 명단에 없네요.” 지난 5월의 그때처럼, 티 한 점 없이 해맑은 얼굴로 라몽이 웃고 있 었다. 정지된 모습으로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이 보는 だ� 마음을 이를 데 없이 공허롭게 만들고 있었다. 피사체의 분할된 한순간을 영원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의 미를 가질 수는 있겠지만, 인간의 연속적인 흐름과 괴리된다는 점에 서 사진은 왠지 미래지향적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개의 액자. 그녀가 사용하는 안방과 내가 사용하는 작은방 사이의 경계가 되는 벽면에는 두 개의 사진 액자가 걸려 있었다. 하나는 바다 앞에서 찍 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63빌딩에서 찍은 것이었다. 63빌딩으로 가자 고 한 것은 라몽이었고, 바다로 가자고 한 것은 나였다. 두 군데에서 그녀와 내가 함께 찍은 사진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골 라 액자에 넣던 날, 그녀는 아주 특이한 은어 하나를 만들어내 63빌 딩에서 찍은 사진 액자 밑에다 붙였다. __ 지가아마사? 그녀가 액자 밑에다 직접 써붙인 글씨를 읽으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 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얼핏 읽으면 뜻이 있는 말 같기도 하고, 달리 읽으면 뜻이 전혀 없는 말 같기도 해서였다. __ 흠, 이거 내가 만든 말이야. 무슨 뜻인지 맞춰봐. 정답을 말하면 류가 해 달라는 거 다 � 줄게. 소제목 :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머리에 털 난 이후의 모든 언어적 경험을 총동원했지만, 끝내 나는 ‘지가아마사’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녀의 입을 통해 의미를 전해 듣고는 너무나 경탄스러워 한동안 넋나간 사람처럼 그녀의 얼굴 만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지막 사랑. ‘지가아마사’는 그런 말의 줄임이라고 했다. 언젠가 자신에게 정 말 사랑하는 존재가 나타나면 써먹으려고 개발해 두었으며, 이제 이 사진 액자에다 그것을 써붙이게 돼서 정말 행복하다는 말도 그녀는 또한 덧붙였다. 지상 【?가장 아름다운 마지막 사랑...... 그것의 절대 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섬뜩한 느낌이 들어 나는 그 액자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즉흥적인 발상이었지만, 내가 새로운 말 하나를 만들어내 바다 앞에 서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 액자 밑에다 붙인 것도 그런 느낌을 완화 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마지막’이 라는 말이 싫었다. 단절되는 것보다 지속적인 것, 한시적인 것보다 영 속적인 것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거의 동일한 의미를 나는 전혀 다 ? 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__ 영사위?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며 그녀는 내가 써붙인 글씨를 들여다보았다. __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결국 ‘지가아마사’와 ‘영사위’는 그녀와 나 사이에서만 통용되 는 은밀한 은어가 되었다. 그 말들이 태어난 이후, 그녀와 나는 술을 마실 때마다 어김없이 그것을 위해 건배했다. 그녀는 ‘지가아마사’ 를 위하여, 나는 ‘영사위’를 위하여. 어쨌거나 그녀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한 지난 6주의 대부분 시간은 그런 식으로 아기자기하게 흘러갔다고 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녀가 ‘YG 탤런트 선발’에 응시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생겨나질 않았던 것이다. __ 라몽이라는 이름, 명단에 없네요. 문의처의 여자가 알려주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나는 길게 한숨 을 내쉬었다. 그때 탁자 위에 올려진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거의 반사적으로 라몽일 거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수화기 를 집어들었다. 제품 전시장에서 아나운서 모델을 하던 그녀, 드디어 2차 예선의 결과를 알게 된 것일까. 소제목 : 라몽이 도대체 뭐냐? “여보세요?” “......” “라몽?” 아무래도 결과를 알게 된 그녀가 충격을 받아 입을 열지 못하는 모 양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곧바로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라...... 몽?” 아주 이상한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밀려나왔다. 뭔가를 비꼴 때처럼 아주 느리게 이름을 되풀이하는 그가 누구인가. 왼손에서 오 른손으로, 바짝 긴장된 표정으로 나는 수화기를 바꿔들었다. “누구시죠?” “이 짜아슥 봐라? 너 정말 내가 누군지 모르겠냐, 임마? 나, 장주 형님이시다, 왜?” “이런......” 수화기를 손에 든 채 나는 그대로 소파로 누워버렸다. “이 좋은 일요일에 도대체 집구석에서 뭐하고 있냐?” “으, 씨왈! 도대체 형은 무슨 전화 매너가 그 모양이야?” 긴장감 뒤에 솟구쳐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며 나는 투덜거렸 다. “얼레? 두 달 가까이 선배한테 문안 전화 한 번 안 한 놈한테 전화 했더니 되레 역정일세?” “노털 티내는 건 여전하구만. 날마다 술에 쩔어 있는 사람한테 전 화는 해서 뭐해? 모처럼 찾아간 후배도 문전 박대하는 사람이......” 5월 말경, 그가 근무하는 빌딩으로 찾아갔던 기억을 되새기며 나는 계속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야, 근데 라몽이 도대체 뭐냐? 집에 과일 배달이라도 오기로 했 냐?” “......” 정말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다시 소파에서 일어나 앉았 다. 소제목 : 지금 방관동으로 가리? “좋아, 말하기 싫으면 관두고...... 너 오늘 시간 좀 있냐?” “시간은 왜?” “임마, 이 선배 말고 너 생각해 주는 놈 누가 또 있냐? 빈둥거리는 백수한테 모이 물어다 주는 것도 아마 나밖에 없을 거다. 암튼 만나 서 얘기하고 오늘 시간 좀 내.” 대단히 자신만만하게, 꽤나 생색을 내는 듯한 어투로 그는 말했다. “오늘...... 안돼.” 당연히 라몽을 생각하며 건넨 대답이었다. 오늘 같은 날, 그녀 혼자 집에 있게 한다는 건 어쨌거나 말이 될 것같지 않아서였다. “야, 임마! 이거 ㅈ?농담이 아니라 대단히 중요한 얘기라니까?” 짜증스럽다는 듯 그가 언성을 높였다. “정 그러면 전화로 하지, 꼭 만나야 되나?” “이야, 이놈 봐라? 이젠 선배가 만나자고 해도 뻗지르네. 전화로 할 얘기가 따로 있고, 만나서 할 얘기가 따로 있으니까 하는 소리 아냐, 임마!” 옆에 있으면 한 대 쥐어박기라도 할 기세로 그는 으르렁거렸다. “아무렴, 내가 만날 수 있는데도 이럴까봐. 정 만나야 되면 내일 내 가 형 회사로 갈테니 오늘은 전화로만 얘기 합시다.” “내가 지금 방관동으로 「?” 정말 끈질기게 그는 들러붙었다. “아니, 좀 있다 바로 나가야돼.” 이키, 하는 심정으로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그가 만약 여기 나타난 다면 라몽과 나의 생활이 백일하에 드러날 텐데, 그걸 어찌 수락하랴. “좋아, 그럼 오늘은 내가 양보할 테니 내일 퇴근 무렵에 칼 같이 회사로 와. 거기 커피숍 알지?” “알았어. 근데 도대체 무슨 일인데? 대충이라도 들어봅시다.” 평상시의 그가 아닌 것 같고, 그런 의미에서 뭔가가 있긴 있는 모양 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렇게 물었다. 웬만한 일이 아니라면 그가 이 정도로 자신만만하게 생색을 낼 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돈!” “돈?”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인가, 하는 표정으로 나는 입을 벌렸다. 나의 궁금증따위는 아랑곳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 득의양양하 게 잘라말하고 나서 그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돈 되는 일이니까 약속이나 확실히 지켜, 쨔샤.” 소제목 : 스타...... 오후 1시경,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잔뜩 끄무러진 하늘을 올 려다보며 나는 외출을 했다. 점심식사를 하지 않아 허기가 느껴졌지 만, 좀더 있다가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곧장 좌석버스를 타고 시 내 대형서점으로 갔다. 문구 코너와 팬시 상품 코너, 레코드숍과 스낵 코너 주변을 어슬렁 거리며, 시간을 문화적으로 죽이기 위해 그곳을 찾은 건 결코 아니었 다. 내가 그곳을 찾은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상심하고 있을 라몽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다. 라몽이 아나운서 모델 아르바이 ??끝내는 시간이 5시라고 했으니 시간은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다. 오늘같은 날 그녀에게 위안이 될 만 한 선물을 하나 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가 좋아하는 하겐다 즈 아이스크림도 몇 개 사고, 맥주와 안주거리도 좀 사야겠다는 게 7 월 15일, 라몽이 탤런트 선발에 낙방한 날의 내 외출 목적이 되어버 린 것이었다. 지하를 대충 한바퀴 돌아보고난 뒤에 나는 곧장 스낵 코너로 갔다. 배가 많이 고프니까 일단은 먹고 나서 찬찬히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치즈 통감자 구이 하나와 커피 한잔__ 그것을 천천히 먹 고 마시며, 도대체 어떤 선물이 이런 날의 라몽에게 위안이 될 수 있 을지에 대해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날, 내가 아니면 누가 라몽에게 위안이 될 수 있으랴. 간단히 요기를 하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팬시 상품 코너 였다. 선물하기에 맞춤한 것들이 아기자기하게 진열돼 있어서 금방 골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오늘의 라몽에게 선 걋?될 만한 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 상황은 문구 코너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레코드 숍에서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밖으로 나가 다른 곳으로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 남겨 진 시간이 많아 서적 코너로 발길을 돌렸다. 시집 코너와 소설 코너 를 돌아 교양물이 전시된 곳으로 갔을 때, 퍼뜩 눈길을 잡아끄는 책 제목 하나가 있었다. 책을 집어들지 않았는데도 거의 본능적으로 이 거다, 하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스타......” 책을 손에 들며 나는 제목을 읽어보았다. 소제목 :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에드가 모렝의 [스타], 그 표지 안쪽에 ‘안나 카레리나’에 출연한 그레타 가르보의 사진이 실려 있었고, 바로 뒷면에는 이런 인용문이 있었다. 야만인은 나무와 돌로 된 우상을 숭배하고, 문명인은 살과 피로 된 우상을 숭배한다. -- 버나드 쇼 -- 책을 탁, 소리나게 덮으며 나는 그것을 사기로 결정했다. 거의 육감 적으로, 오늘 같은 날의 라몽에게 이것 이상의 선물이 없을 것 같다 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스타에 대해 내가 독자적으로 익힌 생각은 없 지만, 스타가 단순히 외모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닐 거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쨌거나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책값을 계산한 뒤에 나는 곧장 선물 포장 코너로 갔다. 귀여운 팬더 포장지를 내가 직접 골라 포장을 의뢰한 다음, 손목을 들어올려 시계 를 보니 어느덧 세 시가 지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먹을 것 과 마실 것을 사고 나 ?그럭저럭 맞춤한 시간이 될 것 같았다. 어쩌면 오랫동안 잊어버릴 수 없는 날이 될지도 모를 7월 15일, 그 녀와 나 사이에 든든한 버팀목이 있음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 버팀목, ‘지가아마사’와 ‘영사위’. 배고픈 밤, 통감자와 커피 한잔으로 간단히 때운 점심식사를 나는 조금씩 후회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열시가 지나 있었지만, 오 후 다섯시에 아르바이트를 끝내리라던 라몽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잡념을 털어버리기 위해 책을 읽고 싶 珦립? 활자가 무수한 벌레떼처럼 꿈틀거려 도무지 시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지만, 라몽이 돌아오지 않는 한 거의 아무 일 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끈끈이주걱 위에 앉 아 있는 것 같았고, 보이지 않는 창살 속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 같 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같은 요지부동의 포박 상태를 사람들은 사 랑이라고 말하는 걸까. 소제목 : 잠깜만요, 이렇게, 끄응 길게 한숨을 내쉬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밖으로 나가서 기다려볼 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선뜻 엄두가 나지 않았다. 라몽이 꾸는 꿈의 내용을 좀더 정확하게 내가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었다. 나는 그녀가 꾸는 꿈의 바깥에 우두커니 서 있는 존재가 아닐 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울타리 바깥에 세워두는 꿈 이 도대체 뭔가. 스타라는 것에 대해서도, 스타가 되고싶어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실 나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것이 꿈과 욕망과 자본주의적 생 산구조가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낸 일종의 환상 같은 거라는 생각은 막연하게 하고 있었지만, 그 환상이 어떻게 현실을 잠식할 수 있는지 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골똘하게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환상이 현실의 하늘을 완전히 뒤덮어버린 세상, 그곳에서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쿵! 뭔가가 출입문에 둔중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된 표정으 로 고개를 돌리자 곧이어 띵똥, 띵똥, 두 번 차임을 누르는 소리가 들 렸다. 튀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는 출입문 앞으로 달려갔다. 塑晝맙? 이 렇게, 끄응, 얼마죠, 네, 잔돈 놔두세요, 하는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연해 들려왔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었지만, 뭔가가 대단히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세요?” 조심스럽게 나는 밖을 향해 물었다. “빨리 문 좀 열어주세요. 급해요.” 다급한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 나는 곧바로 문을 열었다. 거기, 출입문 앞에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고, 그녀에 의해 가까스로 라 몽이 곁부축되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맨발로 현관을 나 ?라몽의 팔을 내 어깨에 겯게 한 뒤, 놀라고 당 황한 목소리로 나는 물었다. “아, 너무 힘들어. 택시기사 아저씨가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날 뻔했 어요.” 라몽을 안으로 이끌어들이는 나를 거들며 여자는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제목 : 몽이 학원 선배 “아니 저쪽...... 방으로 바로 가죠.” 라몽을 소파로 인도하려는 줄 알고 나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힘을 쓰 는 그녀에게 나는 한쪽 손을 들어 안방을 가리켰다. “여기가 몽이 방이예요?” 내가 늘어진 라몽을 번쩍 들어 침대 위에 뉘고 난 뒤, 아직 불 밝히 지 않은 어둠속에서 그녀는 물었다. 뭔가, 한 단계를 생략하고 질문을 비약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근데 술을 마셔서 이런 건가요?” 거실의 불빛을 받아 묵화 속의 인물처럼 보이는 그녀에게 나는 물었 다. “술요? 엄청 마셨죠.” 거실로 나서기 직전,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가 말했다. “그럼 한잠 자고나면 괜찮겠군요. 근데...... ” 거실로 나서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궁금하다는 생 각을 했다. 그녀는 라몽의 앳된 이미지와 달리 대단히 원숙한 분위기 를 풍기는 여자였다. 큰 키와 긴 생머리, 뚜렷한 이목구비가 이십대 중반을 훌쩍 건너뛰고 있는 것 같았던 것이다. “아, 저요? 전 양희진이라고 해요. 몽이 학원 선배.” 세련된 표정으로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녀는 자기 소개를 했다. “아, 오늘 아르바이트를 같이 하셨다는?” “네, 맞아요.” 좀전과 달리,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그녀는 활짝 웃어보였다. “이리 앉으시죠. 차를 준비하고 싶은데......” 어색한 표정으로 나는 그녀에게 소파를 권했다. “그럴까요? 몽이 땜에 술이 다 깨서 머리가 아프던 참인데...... 커 피, 블랙으로 한잔 주세요.” “두 스푼?” “네, 정확하게 맞추셨네요.”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 나는 곧장 주방쪽으로 갔다. 포트를 가스 레 인지 위에 올리고 잔에다 두 스푼의 그래 ?커피를 담았다. 소제목 : 정말 몽이를 사랑하시나 보죠? “오류...... 그게 이름 맞죠?” “네.” 등을 돌리지 않고 나는 대답했다. “아까 몽이가 술에 취해서 울면서 말했어요. 오류씨, 너무 좋은 사 람이라고......” “......” “근데 저건 뭐죠?” “뭐요?” 커피잔에다 물을 부으려던 동작을 멈추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라몽 방과 내 방 사이의 경계 벽면에 걸린 사진 약자를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사진요?” 그녀가 궁금해하는 게 사진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의도적으 로 그렇게 물었다. “지가아마사...... 영사위...... 저거요.” “글쎄요......” 커피잔을 그녀 앞에 놓아주며 아주 조금 나는 웃어보였다. ‘지가아 마사’와 ‘영사위’, 그것의 의미를 그녀에게 말해 준다는 게 왠지 모르게 어색하게 여겨져서였다. 달리 에돌아가는 방법이 없을까를 생 각하며 나는 방으로 들어가 테이블용 의자를 들고 나와 그녀 맞은편 에 앉았다. ‘지가아마사’와 ‘영사위’의 의미를 선뜻 입밖으로 꺼 내지 못하는 것만큼, 그리 크지 않은 소파에 그녀와 나란히 앉는다는 것도 또한 어색하게 여겨져서였다. “말해 주기 싫은가 보죠?” 커피잔을 들어올리며 그녀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말해 주기 싫은 게 아니라...... 라몽과 나만 알아야 저 말들이 살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정말 몽이를 사랑하시나 보죠?” 커피잔을 입에 댄 채 말끄러미 그녀는 나를 보았다. 그녀의 물음에 가벼운 웃음으로 답하고 나서 나는 다른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근데 저렇게 취하도록 술을 마신 이유가 뭐죠?” “아, 그거...... 혹시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세요?”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그녀가 나를 보았 다. 소제목 : 전 스물 다섯이예요. “2차 예선 통과자 발표일...... 그건가요?” “어머, 그걸 알고 계시네요?” “궁금해서 저도 문의처에 전화를 해봤거든요.” “그러셨구나...... 낮에 아르바이트 중에 몽이도 전화를 해 본 모양인 데, 전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어요. 아르바이트 끝내고 옷을 갈아입는 도중에 언니, 오늘 술 마시고 싶어, 그러는 거예요.” “희진씨는 거기 응모 안하셨나요?” 말을 하고 나서 나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요? 전 스물다섯이예요. 그렇게 화려한 무대는 예전에 포기했어 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라몽의 나이가 응모 자격의 마지막이 된다는 게 너무 어이가 없어 요.” “이런 판이야 원래 반짝이잖아요. 꿈꿀 수 있는 시간은 너무 짧은 데, 그 꿈을 실현시킬 기회마저도 너무 적어요. 어쩔 수 없이 저마다 자기 방식으로 길을 뚫어보려 하지만, 거기에도 많은 어려움이 따라 요.” “전 그 방면으론 도통 아는 게 없어서 라몽을 뭐라고 위로해야 할 지 모르겠군요. 얘길 들어보니까 지금이 아니라 앞으로가 더 걱정스 럽기도 하구요. ? 말을 하고 나서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까 몽이와 그런 얘기도 했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스타 스페이스에서도 엄청 스트레스를 받지만, 몽이는 지금까지 정말 잘 견뎌왔어요. 서로 시기하고 경쟁하는 건 문제도 아니고, 돈으로 밀어 붙이는 애들이 있는가 하면 줄타기를 하는 애들도 있고...... 그런 애들 이 잘 풀려나가는 거 보면 정말 세상 살맛 안나요.” “......” “근데 오늘이 몽이 생일이라는 거 아세요?” 벽에 걸린 달력 쪽으로 뜻없이 시선을 주던 그녀가 문득 생각난 것 처럼 물었다. 7월 15일, 라몽의 생일이라서 붉은 동그라미를 그려둔 것이냐, 그런 질문인 것 같았다. 소제목 : 가여운 라몽 “생일...... 이라구요?” 너무 어이가 없어 벙그렇게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모르고 계셨군요. 아까 술 마시고 몽이가 울면서 그런 말을 하던 데......” “무슨 말요?” “2차 예선 통과로 오류를 기쁘게 해주고, 그걸로 생일 파티를 하고 싶었다구요.” “......” 지난 일주일, 라몽이 기다려왔을 오늘을 되새겨보며 나는 망연자실 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생일과 발표일이 겹쳐 있었으니 심리 적인 부담감이 그만큼 고조되었을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7월 15일이 자신의 생일이라는 사실까지도 그녀는 어쩔수 없이 숨길 수밖에 없었 으리라. 만약. 만약 그녀가 자신이 원하던 대로 나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었 다면 지금 이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가정된 상황을 눈앞 에 떠올려보자 정말 가슴이 아려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경쾌한 동작과 해맑은 웃음, 기쁨과 환희에 젖어 있을 그녀...... ‘지 가아마사’와 ‘영사위’가 한껏 고양되는 축제의 시간을 그녀와 내 가 보내고 있을 가능성이 거의 십중팔구였다. 희망의 반대편에서 겪게 되는 아픔을 생각하며 나는 한숨지었다. 그 런 아픔을 라몽은 온몸으로 느끼며 술에 취해갔을 것이고, 버거운 현 실을 견디지 못해 끝내는 정신을 방기하고 말았으리라. 자신의 현실 적 어려움 위에 나라는 존재의 의미까지 가중되었으니 오죽이나 괴로 웠으랴. 가여운 라몽...... 내가 이를 데 없이 비감스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양희진, 나와 동갑인 그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류씨, 저 그만 가볼게요.” 소제목 : 여름비...... 서늘한 무엇인가가 툭, 얼굴을 때렸다. 양희진을 배웅하고 돌아서서 마악 골목으로 접어들 때였다. 손을 들어 이마를 만져보고 나서 하늘 을 올려다보았다. 투둑 툭, 연해 물방울이 떨어지며 얼굴 곳곳을 때렸 다. 그제서야 알게 된 것이었지만, 주변의 공기도 상당히 서늘해져 있 었다. “여름비......” 묵중한 무엇인가가 마음의 추로 매달리는 것같아 나는 걸음을 멈추 었다. 해결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최소한 정리의 시간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흔들리는 그 錫?위해, 내가 무엇인가, 아직 흔들리지 않을 때.” 등을 돌리고 나는 다시 인도로 걸어나갔다. 나에게가 아니라 우리에 게 필요한 시간을 회피해서는 안된다는 결정이 내려진 뒤였다. 머리 와 어깨를 두들기는 빗방울 빠르게 굵어지고 있었지만, 조금도 서두 르지 않고 나는 육교가 있는 곳까지 천천히 걸어올라갔다. 열한시 가 까워져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 여럿 눈에 띄었으나, 어느 쪽으로도 시선 붙박지 못한 채 나는 곧장 꼬치구이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소주와 오뎅. 자리와 자리 사이에 대오 ??만든 발이 쳐져 있었지만, 공간이 워 낙 협소해서 옆자리와 앞자리에서 주고받는 말들이 고스란히 귓전으 로 밀려들었다. 소주를 몇 잔 마시자 위벽으로부터 묘한 자극감이 전 해져왔다. 빈속에 마시는 소주의 쾌감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침잠 된 기분 때문에 정상적인 취기를 느끼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럼 아버지한테 말해서 그쪽으로 집을 얻어 달래지 뭐.” “아니, 종국씨가 그렇게 맘을 바꾸면 아버님이 날 이상하게 생각할 지도 모르잖아.” “괜찮아. 우리 아버지 화통한 사람이야. 그런 걸루 째째하게 며느리 감 의심하고 그러지 않는다구.” “그건 종국씨 생각이지, 내 입장에서 생각해 보란 말야. 내 직장 가 까운 곳으로 집을 얻어 달래면 대뜸 그런 생각 안 하시겠어?” “걱정 마. 이 서종국이가 그런 걸루 와이프 될 여자 입장 난처하게 만들진 않는다.” “믿어두 돼?” 옆자리의 남녀가 주고받는 얘기를 들으며 나는 빈잔에 술을 따랐다. 여름비 내리는 밤, 홀로 잠들어 있는 라몽을 생각하며 홀로 술을 마 신다는 게 왠지 청승맞게 느껴져서 큼, 큼, 헛기침을 하고 나서 나는 재빨리 잔을 비웠다. 술은 위로 들어가는데 어째서 머리속이 뜨거워 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소제목 : 수직과 수평이 만나는 지점 __ 라몽. 다시 한잔을 따르고 나서, 오른손 검지에 술을 묻혀 탁자 위에다 그 녀의 이름을 썼다. 그녀의 꿈과 나의 꿈이 행복하게 취하라고, 피식, 한번 웃고 나서 다시 잔을 비웠다. 빈잔에다 술을 따르고 다시 검지 에 술을 묻혔다. 수직과 수평이 되도록 두 개의 선을 그린 뒤에 재빨 리 잔을 비웠다. 오뎅국물을 한번 떠먹은 뒤에 수직과 수평이 만나는 지점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수직과 수평이 만나는 지점, 거기 라몽과 오류가 있었다. 수직을 꿈 꾸는 라몽에게 수평을 꿈꾸는 오류는 무엇 ?할 수 있을까. 수직의 함몰을 포용할 순 있지만, 수평이 수직을 꿈꾼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평을 꿈꾸는 오류에게 수직을 꿈꾸는 라몽은 무엇 을 할 수 있을까. 수평의 평온을 사랑할 순 있지만, 수직이 수평을 꿈 꾼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명적인 불가능인가. 설령은 그렇다 해도 훨씬 중요한 가능성을 포기할 순 없었다. 사람 과 사람 사이, 어차피 복제인간이 아니라면 그런 숙명성으로 지레 의기소침해질 필요는 없었다. 수직과 수평이 만나는 그 지점에서 눈 을 뜨는 게 단지 숙명성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한잔을 마셨다. 숙명성까지 송두리째 감싸안을 수 있는 무엇. 그래 그거야, 하는 생각으로 마지막 잔을 따르고 나서 나는 다시 검 지에 술을 묻혔다. 잠잠하게 가라앉는 마음으로, 그리고 탁자 위에다 이렇게 썼다. __사랑이야. 수직으로 내리는 비가 수평의 대지를 적시는 자정무렵이었다. 머리 를 휘둘러 물기를 털고 나서 나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양희진 을 배웅하러 나갈 때 아예 출입문을 걸고 나간 때문이었다. 잠시 ? 갔다 오겠다는 생각이었지만, 라몽 혼자 잠들어 있는데 문까지 열어 놓고 나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캄캄한 실내. 안으로 들어서고 난 뒤에 나는 이상한 혼란을 느꼈다. 술을 마셔서 인가, 불과 한 시간쯤 전의 상황이 명료한 기억으로 떠오르질 않았다. 소등과 점등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기억__ 불을 켜두고 나갔는지 끄 고 나갔는지를 정확히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막연한 기억의 고집으 로는 불을 켜두고 나간 것 같은데, 실내에는 미미한 빛줄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출입문은 걸었지만 잠시 나갔다 올 생각으로 소등은 하 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닌가? 소제목 : 라몽의 살 “켜지 마.”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현관의 점등 스위치를 찾을 때, 거실 한가운데의 어둠 속에서 동작을 제지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라몽......” 한손으로 벽을 짚고 선 채 나는 중얼거렸다. “불...... 켜지 마.” “벌써 깬 거야?” 재빨리 신발을 벗고 나는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의 한가운데, 견고한 어둠 속에서도 희끄무레하게 떠오르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탁자와 소 파를 제외하고 나머지 면적 전체를 그것이 뒤덮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 여 恍?놀란 가슴으로 나는 쪼그려앉았다. 부력을 받은 듯 희끄무레 하게 떠오른 그것에다 조심스레 손을 갖다대보았다. 단순한 평면감뿐, 양감과 무관한 무엇이라는 걸 이내 알 수 있었다. 한움큼 움켜쥐고 비벼보자 비로소 그것의 질감이 느껴졌다. 부드럽고 얇은 천. 무릎걸음으로 조금씩 앞으로 기어가며 나는 손바닥으로 어둠을 헤아 려보았다. 라몽이 어디 있는지를 가늠하기 위해서였는데, 펼쳐진 천의 한가운데쯤까지 나아가자 이윽고 손끝에 무엇인가가 닿았다. 펼쳐진 천보다 더욱 부드러운 감촉...... 문득 동작을 멈추고 나는 숨을 들이마 셨다. 내 손끝에 닿은 것은 옷이 아니라 라몽의 살이었다. 섬뜩한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그 부위에다 손바닥을 얹었다. 주변으로 조금 옮겨보자 부드러운 곡선과 함께 돌출 부위가 느껴졌다. 어깨 부 위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손을 밑으로 조금씩 옮겨보았다. 살의 감촉이 옷의 촉감으로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평평함으로 미 루어 그가 엎드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이윽고 손을 멈추고 탄식하듯 나는 입을 벌렸다. 허리 ? 둔부를 거 치고 매끄럽게 뻗어내린 다리를 내 손이 쓸어내렸건만, 그녀의 몸에 는 실오라기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 흰 천 위에 죽은 듯이 알몸으로 엎드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소제목 : 이,흰,천 어쩔까,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속삭이듯 이름을 불러보았다. “라몽......” “......” 무반응인 그녀, 정말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된 건가. “내 말 들려?” 상체를 굽히고 나는 그녀의 어깨 위에 다시 손을 얹었다. “...... 응.” 손을 얹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은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고, 나와 반대 되는 방향에서 가까스로 신음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게 뭐야?” 그녀의 어깨에 얹었던 손을 내려 바닥을 짚으며 나는 물었다. “......” “이, 흰, 천.” “그거 ...... 옥양목이야.”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를 간신히 끌어올리며 그녀는 대답했다. “옥양목?” 부드러운 그 천, 옥양목이란 걸 나는 다시 한번 손에 잡아보았다. 캄 캄한 어둠 속, 옥양목을 깔고 알몸으로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 게 도 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얼핏 종교적인 분위기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설마하니 그녀가 샤머 니즘의 숭배자라는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환 상의 꽃과 같은 존재, 스타가 풉?꿈꾸는 여자가 어찌 무속의 세계 를 숭배할 수 있으랴. 소제목 : 피가 너무 뜨거워서...... “왜 이러는 거야?” “...... 뭘?” “자다 깨어나서 도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거냐구?” “......” “답답해. 제발 말 좀 해봐.” 언성을 높이진 않았지만, 사뭇 절실한 어조로 나는 말했다. “몸이 뜨거워져서 깬 거야. 원래 그래...... 나.” 좀전까지의 탁한 그것에 비해 훨씬 맑아진 음색으로 그녀는 말했다. “뭐가 원래 그렇다는 거야?” “가끔, 몸을 식히기 위해 이렇게 옥양목을 깔고 엎드려 있어야 한 단 말야.” “몸을 식히기 위해?” 무슨 열병의 일종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되물었다. “내가 엎드려 있는 이곳이 눈덮인 설원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 속에 있는 뜨거운 피...... 그 열기를 식히려고 이러는 거야. 피가 너무 뜨거워서......” “......” “여기...... 내가 엎드려 있는 여기가 시베리아야. 눈덮인 설원에 나 는 지금 엎드려 있는 거란 말야.” “언제부터 이런 식으로 몸을 식혔어?” “...... 고등학교 때.” 그녀가 말하는 뜨거운 피,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열기라는 말이 뇌리에서 이상한 소용돌이를 이루는 것 같아 나는 더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그것이 단순한 신체적 발열이 아니라 주체하기 힘든 열정의 일종이라 해도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뜨거운 피의 열기와 이길 수 없는 어떤 힘을 가라앉히기 위해 옥양 목을 깔고, 그것을 시베리아의 설원이라고 생각하며 알몸으로 엎드려 있는 그녀에게 더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소제목 : 주검처럼 그대 곁에 사랑이라고? 순간적으로 솟아오르는 분노의 힘을 느끼며 벌떡, 나는 자리를 박차 고 일어났다. 그녀를 향해서가 아니라 나를 향해서, 내 속에 숨어 있 던 또 하나의 내가 감내하기 어려운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수직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수평의 침묵, 그것으로 어떻게 숙명성을 감 싸안는 사랑을 입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 부르르 진저리를 쳐대며 어둠 속에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남방을 벗고 바지를 벗고, 러닝을 벗고 팬티를 벗어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다. 알몸으로 어둠 속에 우뚝 섰을 때, 가 슴 깊은 곳에 내재돼 있던 허무감이 일제히 살아올라 소름으로 돋아 나는 것 같았다. 옥양목 위에 엎드려 있는 라몽, 입관되는 주검처럼 아주 반듯하게 나는 그녀 곁에 누웠다. 빗소리가 사방에서 온전하게 살아오르기 시 작했다. 수직으로 쏟아져 수평의 대지를 적시는 비, 그것이 그녀와 나 의 접점으로 흘러들어 굳은 토양을 부드럽게 하고 있었다. 수직과 수평이 만나는 접점, 그것이 사랑의 이름으로 파종된 씨앗이 라는 걸 비로소 깨우칠 수 있을 것 같았다. 琯藥??흙을 열고 올라 와 꽃 피고 열매 맺고 또다시 자연으로 순환하는 무한궤도의 섭리처 럼, 탐욕도 아니고 집착도 아닌 마음으로 오래오래 나는 그녀의 접점 이고 싶었다. 접점이고 싶은 마음으로, 마음 닿은 곳에서 눈을 떴다가 마음 닿은 곳에서 스러지는 이상야릇한 감흥__ 시? 뿌리가 없어 오래도록 머리 조아리며 햇발 아래 목을 늘이다가 바직바직 메말라가는 영혼에 몇 방울 여름비 스며드는 날 옷을 벗었네 수직으로 수직으로 불꽃나무처럼 타오르는 그대 하나의 점으로라도 나 뿌리에 닿아 殮?위하여 밤이 되어 그대 곁에, 주검처럼 그대 곁에 소제목 : 흰빛의 이미지 푸르스름한 날빛이 밀려드는 새벽, 눈을 떴을 때 라몽은 내 곁에 없 었다. 비는 그쳐 있었지만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퍼뜩, 나는 정 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라몽뿐 아니라 거실 바닥을 뒤덮고 있던 옥양목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 옆에 반듯하게 누워 있다 가 잠이 들었는데, 어찌된 셈인지 나의 알몸은 소파 위로 옮겨져 있 었다. 6시 15분. 서둘러 옷을 입고 나는 라몽방으로 가보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반듯한 자세로 잠옷을 입고 침대 위에서 자고 있었다. 밤의 어느 ? 순간, 그녀의 말대로라면 몸을 다 식히고 난 뒤에 옥양목을 걷어들고 방으로 들어갔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바닥에서 소파로 올라간 나는 몽중의 위치 이동?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옥양목을 걷기 위해 나를 깨웠 음에도 불구, 잠에 취해 곧장 소파로 기어올랐을지도 모르겠다는 정 리가 가능해진 것이었다. “뜨거운 피...... 옥양목...... 시베리아......” 빈속에 마신 소주의 후유증을 느끼며 나는 다시 소파에다 몸을 눕혔 다. 어둠 속에 드넓게 펼쳐져 있던 옥양목, 그것이 무척이나 강렬한 이미지로 나의 뇌리에 남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부력을 받는 듯한 강렬한 흰빛의 이미지...... 문득 지 난 오월, 화류시장에서 라몽이 훔치던 흰 스카프가 뇌리를 스쳐갔다. 그녀의 기호가 아니라, 어쩌면 그녀의 삶이 백색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을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섬뜩해졌다. 백색, 그것이야말 로 모든 색상을 다 흡수해버린 빛의 총화가 아닌가. “눈덮인 설원...... 시베리아...... 옥양목...... 흰 스카프......” 혼란을 느끼 ?하던 이미지에 비로소 연결고리가 생겨나는 것 같았 다. 이미지의 연결고리를 엮어 그녀의 삶을 총체적으로 꿰뚫어볼 능 력은 없었지만, 그것들의 근원에 그녀의 뜨거운 피가 있다는 사실만 은 지극히 명료해지는 것 같았다. “뜨거운 피...... 스타......” 그녀의 몸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뜨거운 피의 열기와 열광하는 대중, 발산되는 끼와 억압당하는 끼에 대해 나는 생각했다. 자기 과시욕의 노예가 된 천박한 공주병 환자들이야 익히 보아왔지만, 자기 속의 피 가 조성해내는 주체할 수 없는 끼라면 어떤 식으로든 거기엔 배출구 가 있어야 할 거라는 생각이 묵연하게 뇌리를 스쳐갔다. 자기 피를 아는 라몽, 그녀가 스타 지망생이 될 수밖에 없었던 저변에 혹시 그 와같은 필연성이 있었던 게 아닐까. 소제목 : ......라몽시...... “섬광처럼, 지난밤, 어쩌면, 시?” 설명하기가 어려운 두 가지 느낌을 문득 되살리며 나는 소파에서 일 어나 앉았다. 라몽의 육체에 대한 감촉과 시에 대한 감흥이 거의 동 시에 되살아난 때문이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 두 가지에 대한 기억 이 모두 사실성이 의심스러워질 정도로 아련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었 다. 내가 정말 그녀의 알몸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고, 나도 또한 알몸 으로 어둠 속에 누워 온전한 시적 감흥을 느꼈던 것일까. “라몽과 시......” 희미한 기억을 확신으로 몰고갈 순 없었지만, 거부할 수 없는 예감 처럼 라몽의 알몸에 대한 기억과 시적 감흥이 묘하게 맞물리고 있음 을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거부할 수 없는 예감처럼, 그 두 가지가 운명적인 힘으로 단단히 묶여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부정할 수 없게 하면서도 시작과 끝을 모르게 하는 예감__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안고 상체를 앞으로 굽히며, 고뇌에 차서 쥐어짜듯이 나 는 이렇게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 라몽시......” 언제 비가 내렸냐 싶게 맑고 화창한 아침, 창으로 밀려든 햇살이 라 몽의 이마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평온하게 잠든 그녀의 얼굴을 내 려다보다가 살며시, 침대 옆에 걸터앉아 그녀의 이마 위로 손을 얹었 다. 고뇌할 게 없다면 이미 청춘이 아니라던 누군가의 말, 고뇌할 게 있어서 청춘은 아름다운 거라던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이제 일어나야지?” 나의 손길을 느끼고 부시시 눈을 뜨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나는 웃엇 다. “몇 시야?” 고개를 돌려 창을 보려다 햇살에 눈을 찔린 그녀, 양미간을 잔뜩 찌 푸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여덟시 넘었어.” “여덟시......” 평상시와 달리 사뭇 풀죽은 표정으로 그녀는 중얼거렸다. 학원 수강 시간이 열시부터였으니 시간이 그리 촉박한 건 아니었지만, 평상시의 여덟시 기상을 생각하면 여유를 부릴 만한 시간은 결코 아니었다. 샤 워를 하고, 그날 입을 옷을 고르고, 간단히 뭔가를 먹고 하다보면, 여 덟시에 일어나도 아침 시간은 언제나 빠듯하게 마련이었다. 소제목 :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고 싶어 “기분은 좀 괜찮아?” “......” 대답 대신 몽롱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던 그녀, 잠시 눈을 감았 다 다시 뜨고는 말없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괴로울 거라는 건 알지만...... 문제를 너무 절박하게 생각하면 점점 더 힘들어지는 거 아냐?” 무엇인가를 정리하고 넘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조심스럽 게 입을 열었다. “류.” 무릎을 세우고 정색을 하며 그녀가 나를 보았다. “말해봐.” “류가 섭섭하게 생각할런지 모르겠지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 고 싶어.” 말을 하고 나서 그녀, 다시 한번 창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양 미간을 찌푸리지 않고 물끄러미 그곳에다 시선을 고정시켰다. “내 말, 귀찮은 간섭처럼 들려?” 가슴 속에서 이상한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걸 느끼며 나는 물었다. “아니, 그런 건 아냐. 류가 날 걱정하는 마음도 알아. 하지만......” 여전히 창에다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뭐?” “왠지 모르게 앞으로 나한테 많은 변화가 생겨날 거 같애. 나 때문 에 류가 상처 받는 거 원치 않지만...... 나도 류를 이해시킬 수 없는 부분이 많아. 류가 시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런 거 내가 쉽사 리 이해하지 못하는 거랑 별로 다르지 않을 거야. 지금은 머리속이 너무 복잡해서 더이상 말을 못하겠어.” “......” 그것으로서 화창한 아침, 그녀와 나의 대화는 단절되었다. 그녀가 욕 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는 동안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의 시선이 머물던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고, 그녀가 샤워를 끝내고 나온 뒤 에는 거실로 나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소제목 : 세상이 밝아 보이지 않냐?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아침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고, 아홉시가 갓 지난 시각에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자기 방을 나섰다. 그녀와 나 사이의 단절감을 그런 식으로 몰고가고 싶진 않았지만, 물리치려 고 해도 끈덕지게 엄습해오는 막막함은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나, 갈게.” 그녀가 현관으로 걸어나갈 때, 나는 탁자 위에 올려놓은 포장된 책 을 손에 들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반드시 그 순간에 그것을 전해 주 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이렇게 막막한 심정으로 그녀를 보내고 나 면 오래오래 내 마음이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녀 등뒤에 서 있다가, 신발을 신고 돌아서는 그녀에게 묵묵한 표 정으로 나는 책을 내밀었다. “생일선물이야.” 낙양빌딩 지하 커피숍, 오장주 형을 내가 만난 건 오후 다섯시 경이 었다. 정말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 내가 커피숍에 당도했다는 전화를 받자마자 그는 곧장 지하로 내려왔다.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드 는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아무리 훑어봐도 그는 내가 알고 있던 오장 주 형이 전혀 아닌 것 같았다. 허름한 잠바에 면바 嗤? 걸치고 다니 던 그의 전통적인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말쑥 하게 정장차림을 하고 나타난 게 아닌가. “......?” 콜라잔을 손에 들고 너무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은 채 나는 물끄 러미 그를 건너다보았다. “이 오장주가 양복 입으니까 세상이 밝아보이지 않냐?” 베이지 양복에 흰 와이셔츠, 감색 줄무늬의 넥타이를 스스로 내려다 보고 나서 그는 능청스런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형, 사람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변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마 찬가지지.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때깔나게 살아야 하는 거 아니냐? ” “때깔?” 점입가경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를 보았다. 저 인물이 학교 다 닐 때 유행따라 옷 챙겨입는 애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욕설을 퍼부어 대던 그 인물이 맞는가 싶어서였다. 소제목 : 송가희? “흠, 사실은 나 편집장으로 승진했어. 그러니까 지위에 걸맞게 옷도 입어야지. 편집장이 날마다 후줄근한 차림으로 다니면 밑에 직원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냐? 사회 경험 좀 하면서 느낀 건데, 입성이 좋지 못 하면 일단 삼십 점은 손해보고 들어가는 게 세상이야. 차림새 보고 단박 깔보려고 덤빈단 말야.” “그럼 패션 모델들은 무조건 삼십 점 따고 들어가겠네?” 성냥개비를 꺼내 입에 물며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는 말했다. “새끼, 누가 창문과 출신 아니랄까봐 꼬기는...... 너도 이젠 세상을 좀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봐, 임마. 꼬인 시선으로 바라봤자 고달픈 건 어차피 자기 자신뿐이야.” “근데 형네 회사는 그렇게 인재가 없나? 쥐꼬리만한 경력으로도 편 집장이 되는 걸 보니 정말 알 만한 회사네.” “야, 요즘 세상이 경력으로 돌아가는 줄 아냐? 요즘은 모름지기 능 력이야, 능력. 능력만 있으면 열세살이 아니라 세살짜리한테도 중책을 맡길 거다. 그게 곧 돈 되는 지름길인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놈 이 경력 따지고 앉아 있겠냐?” 말을 하고 나서 그는 콜라잔을 들어 단숨에 비워냈다. 얼음까지 두 어 조각 입에 넣고 아그작아그작 씹어먹고 난 뒤, 가타부타 말도 없 이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었 고, 현재로선 도무지 호감이 가질 않는 모습이었다. 학교 다닐 때부터 저런 성품의 소유자였다면, 선배가 아니라 선배 할애비라도 절대 교 류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좀 있다 가희도 올 거다.” 커피숍보다 열댓걸음쯤 안쪽에 위치한 지하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 전혀 엉뚱한 애기를 그는 입밖으로 꺼냈다. “송가희?” “그래, 우리가 아는 가희가 송가희 말고 또 누가 있냐? 지금 누굴 만나고 있어서 약간 늦겠다는 전화, 너 도착하기 직전에 걸려 왔었어. ” 말을 하고 나서 그는 웨이터를 불러 훈제치킨과 병맥주 세 병을 시 켰다. “가희를 왜 부른 거야?” 다소 불편한 기분이 들어 나는 물었다. “널 부른 이유하고 똑같애. 똑같은 말 두 번 되풀이하기 싫으니까 그건 나중에 가희 오면 얘기하자.” 양복 상의를 벗어 의자의 등받이에 걸며 그가 말했다. 소제목 : 이거 정말 웃기는 놈이네 “근데 형이 편집장 됐다는 말......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신기하네. 설마하니 술 마시는 능력으로 편집장을 뽑진 않을 테고...... 그것 말곤 솔직히 말해 형이 회사를 위해 한 일이 없잖아.” “이거 정말 웃기는 놈이네. 너, 평상시에도 이 오장주를 그렇게 우 습게 생각하고 있었냐? 인생에는 임마, 저절로 다가오는 기회가 있고 자신이 포착하는 챤스라는 게 있어. 기회라는 건 가만히 있어도 자신 에게 다가오는 거지만, 챤스라는 건 모든 사람들에게 공히 주어진 기 회처럼 막연하게 흘러가는 걸 순발력 있게 자기 쪽으로 돌려놓는 거 야.” “그러니까 형이 잡은 건 챤스라는 건가?” “그렇지. 축구에 비유를 하자면, 패스를 받은 게 아니고 공지에 떨 어진 공을 향해 전력질주해서 그걸 내가 드리블하게 된 거지. 여기서 중요한 건 다른 선수가 가지고 있는 공을 뺏기 위해 반칙을 하거나 태클을 하진 않았다는 거야. 자본주의 시회의 비인간적인 병폐를 말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건 지극히 감상적이거나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입에 올리는 말이야. 알고보면 거친 스포츠보다 훨씬 깔끔 하고 세련된 경기가 자본주의 체제의 경쟁 방식이란 거지.” 말을 하고 나서 그는 날라져온 맥주를 나에게 먼저 권했다. 술을 따 라주는 동안의 표정이 참으로 묘하게 보였는데, 일테면 자신이 생각 하기에도 자신의 변신이 참으로 대견스럽다는 표정인 것 같았다. 자 기 속에 잠들어 있던 또 하나의 자아 발현에 이를 데 없는 신뢰감을 보내는 듯한 표정. “편집장 노릇 하려면 원래 그렇게 약장수처럼 말을 잘해야 하나? 알아듣기 쉽게 간단명료하게 말해도 될 걸 축구는 웬놈의 축구......” 그에게 술 ?따르며, 거의 혼잣말처럼 나는 중얼거렸다. “좋아, 그럼 아주 간단하고 구체적으로 말해 주지. 우리 회사에 있 던 편집장이 지난달에 그만뒀는데, 그 직후에 사장이 아주 이상한 지 시를 내렸어. 현재까지의 대한민국 출판 동향과 앞으로의 전망, 그리 고 그런 걸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시류에 부응할 수 있는 자사 출판 기획안을 만들어서 정해진 기일까지 제출하라는 거였지.” “형한테만 제출하라는 거야?” 소제목 : 훈제치킨 하나 더 시키죠? 맥주를 반 잔쯤 마시고 나서 나는 훈제 치킨 한 조각을 집어들었다. 허기도 허기였지만, 정말 오랜만에 먹어보는 ‘남의 살’이라서 오소 소 감동적인 닭살까지 돋는 것 같았다. “아니, 전직원 모두에게 제출하라는 거였지. 사장의 복안은 다른 거 였는데, 그 제출하는 지료들을 모두 검토해보고 나서 가장 그럴 듯한 걸 제출한 사람에게 편집장 자리를 맡기려는 의도였어. 그래서 응, 그 래? 그럼 내가 편집장 한번 해볼까? 그런 생각으로 그럴 듯한 기획안 을 제출했지. 그게 채택되고, 몇 시간 동안 사장과 辱是?하고난 다 음날 곧바로 편집장이 된 거야. 그리고 오늘 너희 둘을 오라고 한 건 내가 올린 앞으로의 출판 기획안을 사장이 당장 추진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야. 이제 알겠냐?” 그의 말은 전장에서 돌아온 지 삼일도 지나지 않은 전사의 무용담을 닮아 있었고, 그 제스처는 병영을 갓 벗어난 제대병들의 설익은 과장 기를 닮아 있었다. 암튼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열심히 훈제 치킨을 먹었는데, 왠지 모르게 그의 말과 제스처가 나의 변변찮은 먹성에 좋 은 촉매제가 되는 것 같았다. 사람은 화가 날 때에도 무엇인가를 아 귀처럼 먹어치울 수 있는 만물의 영장이 아닌가. “편집장님, 훈제치킨 하나 더 시키죠?” 송가희가 호프집에 나타난 건 일곱시가 좀 지난 뒤였다. 단순하게 누구를 만나고 온 게 아니라 술까지 한잔 걸치고 온 모양, 만나자마 자 대뜸 내 옆자리에 앉으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류, 많이 수척해졌네. 이 송가희 놔두고 누구랑 연애라도 하는 거야?” 손으로는 장주형이 따라주는 술을 받고, 얼굴은 내쪽으로 돌린 채 다소 풀린 듯한 눈빛으로 그녀는 나를 보 年? 청바지에 녹색 반팔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보아 몇 달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잘 지냈지?” 누구랑 연애라도 하냐는 그녀의 말에 다소 찔리는 기분이 되긴 했지 만, 평상시에 그녀를 대하던 그대로 아주 간단 명료하게 나는 안부의 말을 건넸다. 소제목 : 아르바이트를 해보라는 권유 “얼레? 오선배는 왜 이래? 오늘 결혼했어?” 비로소 오장주형의 변화를 눈치챈 그녀, 맥주잔을 들어올리려다 말 고 탁, 소리가 나게 도로 탁자 위에다 올려놓았다. “야, 이 오장주, 이제 양복 좀 입고 살겠다는데 계속 그렇게 걸고 넘어질 거냐? 모처럼 만난 건데 건배나 하자. 그리고 오늘은 내가 왕 창 살 테니까 퍼지게 마셔도 좋다. 너희 둘은 우리 출판사의 필자가 될 테니까, 건배!” 그의 제안으로 셋은 잔을 부딪쳤다. “필자라니, 그게 무슨 자다 봉창 두들기는 소리야, 오선배?” 가장 먼저 잔을 꺾은 송가희가 오장주형에게 물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도 꿀꺼덕, 꿀꺼덕,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기어이 잔을 비웠 다. 잔을 내려놓으며 캬, 소리까지 내고, 그것도 모자라 웨이터에게 다섯 병의 맥주를 추가로 주문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송가희를 보 았다. “좋아, 그럼 이제 얘기를 시작해볼까? 내가 오늘 만나자고 한 건, 너희들에게 아르바이트를 해 보라는 권유를 하기 위해서야. 아주 간 단한 일로 상당한 돈을 만질 수 있는 거니까, 내 입장에서야 아는 후 배들에게 기 만?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 “그러니까 오선배네 출판사 일을 하라 그거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송가희가 오장주형을 보았다. “왜, 우리 출판사 일은 하지 말라는 법이 있냐?” “오선배네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들, 수준이 너무 높아서 우리 정도 론 힘들 걸?” 송가희 특유의 비아냥거림. “야, 아까 오류한테는 말했는데, 이젠 내가 우리 출판사 편집장이 야. 출판 기획안도 잡았고, 뭔가 변신을 시도하려고 한단 말야. 그동 안 나왔던 책들이야 정말 쓰레기 같은 것들 많지만, 이제 내가 나서 서 한번 해보겠다는데 계속 그렇게 삐딱한 눈으로 째려보면 어쩌냐? ” “아니, 정말 오선배가 편집장 됐어? 크크, 이거 정말 세상이 말세는 말센가봐.” 대단히 짖궂은 표정으로 그녀가 나를 보았다. 빙그레, 말없이 나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소제목 : 폭발 일보 직전의 냉각된 상태 “야, 송가희. 너나 오류는 학교 졸업하고도 탱자거리며 사니까 도통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는 인간들이야. 시를 쓰고 소설 을 쓴답시고 세상 나 몰라라 하는 거, 그게 자랑거린 줄 아냐? 솔직 히 말해 요즘같은 세상에 문학이 도대체 뭐냐? 시? 웃기지 말라 그 래. 그런 건 리어카 좌판 위에 올려진 천원짜리 장신구만큼도 취급받 지 못해. 소설? 문학성? 모두 마찬가지야. 그런 건 이미 사라지고, 이 제 세상에 남겨진 건 오직 시장성이 있는 것들 뿐이야. 시도 소설도 시장성을 떠나서는 아무리 지랄발광을 해도 살아남지 못한다 이거야. 팔린다는 시집들, 봐라. 시대에 대한 고뇌도 폼잡는 게 아니라 창녀일 기 수준으로 격을 낮춰야 씨알이 먹힌다구. 그런 거 다 무시하고 평 생 동호인 문학이나 하면서 살래?” 자신의 변신에 대한 변론 같은 말을 내뱉고 나서 그는 또다시 꿀꺼 덕, 꿀꺼덕, 목울대를 움직이며 맥주잔을 비워냈다. “그래, 그런 걸 감안해서 오선배네 출판사에서 기획한 게 뭔데?” 이상하다 싶을 만큼 차분한 목소리로 송가희가 물었다. 폭발 일보 직전의 냉각된 감정,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있다는 증거였다. “간단한 거야. 우리 출판사에서 넘겨주는 자료를 이야기 구조로 바 꾸는 거야. 처음에 기획한 네 권은 심령과학에 관한 건데, 자료가 엄 청 많아서 일하기도 쉬울 거야. 자료를 풀어서 일반인들이 읽기 쉬운 이야기로 만들어 달라는 거지.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과학문명이 발달 할수록,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그런 분야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진다는 데에 기획 의도가 있는 거지. 사장에게 말해서 권당 오백만 원씩 주기로 했어. 그러니까 너희 둘이 두 권씩 맡으면 각 ?천만원 씩 받게 되는 거지. 특히 송가희, 너는 앞으로 소설만 쓰려면 어차피 이런 아르바이트 간간히 해야 할 거야. 이런 쪽으로 완전히 경도되라 는 게 아니고, 네가 쓰고 싶은 소설을 위한 연료로 삼으라는 거지. 소 설, 그것도 먹는 거 해결된 다음에 쓸 수 있는 거 아니냐?” 말을 하고 나서 담배를 피워물고, 다소 긴장된 눈빛으로 그는 송가 희를 보았다. “오선배는 이제 시 안 써?”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 이를 데 없이 냉각된 표정으로 송가희가 물 었다. “시? 좋다, 어차피 기회 있으면 밝히려 했던 거니까 지금 말하지. 난 이제 그런 거 다 잊어버렸어. 나의 태도가 비난의 대상이 된다고 해도, 그래도 난 내가 느끼고 깨달은 대로 갈 거야. 가희, 너 같은 문 학지상주의자의 눈에는 나의 이런 태도가 한심스런 변절처럼 보일런 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건 어차피 상대적인 문제일 뿐이야. 내 눈에는 너희들이 딱하게 보일 수도 있는 거라구.” 소제목 : 혐오하고 저주해 “그래서, 우리가 딱하게 보여서 그따위 저질스런 책장사에 우릴 끌 어들이려는 거야?” 서서히 고조되는 목소리. “저질스런 책장사라니?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얘긴데, 어차피 자 본주의란 돈에 의해 굴러가는 사회야. 개인도 그렇고 회사도 그렇고 국가도 마찬가지야. 대의와 명분을 위해 좋은 책을 만드는 것도 좋지 만, 일단은 돈이 있어야 운영되는 거 아냐? 돈이 없는데도 허구한 날 지사적인 태도나 보이고 앉아 있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냔 말야. 진정 하게 좋은 출판을 하기 위해서도 일단 ?책을 팔아야 한다는 논리가 나오는 거라구. ” 꿀꺼덕, 꿀꺼덕. “그 회사가 오선배 거야?” “......” 송가희의 말을 듣고 최초로 잔을 꺾는 오장주 형. “나 창문과 다닐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문학이란 걸 오선배처럼 대하는 사람들을 가장 경멸해. 경멸하는 게 아니라 아주 혐오하고 저주해. 문학이란 게 어떤 시대에 그토록 융숭한 대접을 받 았었지? 모든 시대의 문학은 모든 시대의 어려움을 어차피 감내하며 유지돼 온 거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런 현상도 전혀 새로운 게 아 니란 말야. 근데 자신들의 얄팍했던 문학적 신념을 헌신짝처럼 집어 던지며 그런 걸 그 시대만의 특성이라고 침튀기는 놈들은 도대체 뭐 지?” “야, 송가희, 너......” “오선배는 지금 갑자기 변한 사람이 아니고, 처음부터 이렇게 얄팍 한 변신술을 시도할 사람이었어. 창문과 다닐 때 튄 거? 그것도 그 시절의 선배에게 필요한 변신일 뿐이었지 진정한 문학적 신념 따위와 도 아예 거리가 먼 거였단 말야. 오선배는 모든 시기이든 자신에게 필요한 대로 변신할 수 있는 사람이야. ?탔?나쁘냐구? 아니, 세상 이 넓고 벼라별 인간들이 다 있으니까 그런 걸 문제시할 필요는 털끝 만큼도 없겠지. 문제는, 문제는 어째서 자신들의 얄팍함을 위장하기 위해 굳건한 걸 자꾸 훼손하려 덤비느냐, 이거야. 너무 가증스럽단 생 각 안들어? 문학의 위기가 어떻고 시대적인 상황이 어떻고 떠들어대 는 놈들, 모두 그 뱃속을 들여다보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더러운 욕망들이 숨겨져 있단 말야. 그 욕망들이 시대적인 분위기를 타는 것 같으니까 아예 문학판 전체를 말세의 아마겟돈으로 만들어버리겠다고 덤비는 거야. 알아? 오선배는 지금 그런 판에 자발적으로 뛰어들어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일 뿐이란 말야. 후배를 생각한다구?” 소제목 : 이 기집애가 보자보자 하니까 이번에는 송가희가 한잔의 맥주를 단숨에 비워냈다. 담배를 피워물 고 스스로 자신의 빈잔에 술을 따를 때, 내가 따르겠다고 하자 팔꿈 치를 휘두르며 단호히 그녀는 그것을 거부했다. “넌 학교 다닐 때도 그랬지만, 그놈의 아전인수와 안하무인은 털끝 만큼도 변하질 않았구나. 그렇게 유연성 없는 사고방식으로 쓰는 소 설이 도대체 이 세상의 뭘 반영할지 참 한심하구나. 문학적인 신념도 좋지만, 너처럼 독불장군 식으로 나가봤자 얻을 거라곤처럼 과대망상 밖에 없을 거야. 내 입장에서는 처라리 너 걋?애들 꼴보기 싫어서라 도 문학판이 아마겟돈이 됐으면 좋겟어. 솔직한 심정이라구.” 비아냥거림으로 응대하고 있었지만, 초장에 비해 그의 기세는 많이 꺾여 있었다. 기세가 아니라 거의 자조적인 표정으로 변해가는 것 같 았다. “내가 오선배한테 내 걱정해 달란 적 한번도 없으니까, 이런 일로 구역질나는 생색 내지 말고 오선배 걱정이나 해.” “이 기집애가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송가희의 말이 떨어지고난 직후, 탁자 위로 팔을 올리는 줄 알았던 오장주 형의 주먹이 그대로 원을 그리며 송가희의 얼굴로 날아들었 다. 퍽, 쨍그랑, 퍼벅! 술잔과 맥주병 몇 개가 바닥으로 떨어져내리고, 뒤 이어 송가희가 의자에서 떨어져나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반사적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장주 형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어떤 생각이 그 상황에서 그와같은 행동을 유발시켰는지를 도무지 가 늠할 수 없었다. 내가 송가희의 입장을 내심 옹호하고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폭력에 대한 단순한 반발심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어쨌거 나 내가 그의 멱살을 움켜쥔 게 전혀 다른 사건의 빌미가 된 ?사실 이었다. 내가 오장주 형의 동작을 제지한 결과로 퍽, 하는 소리가 그의 머리 에서 터져오르고, 뒤이어 그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뒤로 돌리자 끔찍스런 문학의 아마겟돈, 거기 맥주병을 손에 들고 서서 송가희가 온몸을 부들거리며 울고 있었다. “오장주, 이 나쁜 개새끼야......” 소제목 : 아마겟돈의 문학 내가 집으로 돌아온 건 열한시가 거의 다 되어서였다. 송가희는 호 프집에서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갔지만, 이마가 찢어진 오장주 형은 그 길로 나의 부축을 받으며 곧장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여섯 바 늘을 꿰매긴 했지만 그리 대단한 상처는 아닌 모양, 요즘은 술을 이 마로 마시나 보죠? 하고 젊은 의사가 오장주 형을 약올렸다. 병원을 나서기 전, 아침에 일어날 때 골이 깨질 듯이 아플 거라는 말도 의사 는 또한 덧붙였다. 아마겟돈의 문학. 장주 형을 택시에 태워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 ? 동안 나는 내내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정말 내가 몸담고 사는 세상이 아마겟돈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들의 견해 차이가 최후의 성전을 방불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 시대의 문학이 정말 그런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것일까. 두 세계의 경계지점에 선 내가 곱씹어볼수록 위태롭게 여겨져서 나 는 난감했다. 오장주 형의 말처럼, 정말 시가 리어카 좌판 위에 올려 진 천원짜리 장신구만큼도 취급받지 못하는 세상이란 말인가. “어디 갔다 오는 거야?”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라몽, 의외로 밝 은 표정으로 나를 맞이주었다. 읽고 있던 책, 얼핏 보니 아침에 내가 건네준 에드가 모렝의 [스타]였다. 설마하니 그 책 한 권으로 기분이 좋아졌을 리야. “선배 좀 만나고 왔어.” 대답을 하고 나서 잠시, 넋나간 사람처럼 멍한 표정으로 나는 탁자 옆에 서 있었다. “저녁은?” “먹었어.” 나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는 대답했다. “밥...... 해놨는데.” 다시 소파에 앉아, 다소 쑥스럽다는 표 ㅐ막?그녀는 나를 올려다보 았다. “저녁 먹었어?” “응, 배고파서 이것저것 냉장고에서 꺼내 먹었어. 근데 냉장고에 있 던 하겐다즈, 언제 사다놓은 거야?” “어제.” 소제목 : 최후의 성전 “왜 샀어?” 눈을 빛내며 그녀가 물었다. “그런 거 이유가 있어야 사나? 그냥 책 사고 난 뒤에 라몽 생각나 서 산 거야.” “응...... 그랬구나. 참, 이 책 고마워. 잘 읽을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나는 힘없이 등을 돌렸다. 여전히 아마겟돈의 문학, 천원짜리 장신구의 여파가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라몽 에게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나는 그대로 내 방으로 들어갔다. 방 문을 닫고 의자에 앉아 허망한 시선으로 책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원 짜리 장신구만큼도 취급되지 못하는 시집들, 아마겟돈의 문학이 만들 어낸 무수한 성전의 잔해들...... 나 또한 저 끔찍스런 최후의 성전에 가담하길 원하고 있는 건가? 똑, 똑. 노크소리가 난 뒤에 방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리자 라몽이 안쪽으로 빠끔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들어가도 돼?” 그녀의 조심스런 물음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래? 밖에서 무슨 기분 나쁜 일 있었어?” 내가 앉은 의자의 뒤쪽으로 돌아와 팔을 내려 내 목을 감싸안으며 그녀가 물었다. “조금...... 그런 일이 있었어.”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 나는 대답했다. “나 때문에 그런 거 아니지? 지난 며칠, 정말 미안했어. 사과할게. ” “아니, 라몽 때문이 아냐.” 그녀에게서 나는 향기, 참 오랜만에 맡아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다행이고...... 지금 나랑 얘기 좀 할 수 있어? 기분이 안좋으 면 내일 해도 괜찮긴 한데......” “무슨......?” 고개를 들어 뒤로 나는 그녀를 보았다. “나에 관한 얘기야. 그냥...... 이것저것.” 자신의 일은 자신이 알아서 하고 싶다던 아침의 말, 그걸 그녀는 의 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럼, 지금 말을 하지 뭐.” 망설이지 않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소제목 : 권당 오백만원씩 “사실은 오늘 학원 끝나고 희진이 언니 만나 두 시간쯤 내 문제 상 의했어. 그 언니하곤 워낙 친하니까 속에 있는 거 다 털어놓고 의견 을 구한 거야.” 소파에 앉고 나서도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녀는 입을 열었다. “앞으로의 진로에 관해서?” “응, 그런 거야. 희진이 언니는 그 방면에 아는 것도 많고 경험도 많아. 내 고민거리를 다 말했더니 그냥 학원만 다니지 말고 자기처럼 일정한 곳에다 관리를 의뢰하는 방식을 택해 보라는 말을 했어.” “관리?” 고개를 돌리고 나는 그녀를 보았다. “응, 일체의 섭외를 모두 담당해 주는 건데, 그런 데 적을 두면 여 러 가지로 유리하다는 거야. 지금 희진이 언니 매니저하는 사람도 그 런 일을 하는 건데...... 재작년까지 방송국에서 피디했던 사람이래. 그 계통에 발이 넓으니까 기회를 잘 잡아내나 봐. 희진이 언니도 그 사 람 덕에 여기저기 꽤 바쁘게 뛰나봐. 그리고 참, 희진이 언니 그 사람 하고 결혼할 거래.” “그럼 거기 소속이 되겠다는 거야?” 다소 놀란 표정으로 나는 물었다. “응, 그 사람이 관리하는 인원이 현재 여섯 명인데, 내가 원하면 희 진이 언니가 말해 주겠대. 이렇게 무작정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낼 순 없으니까...... 그런 데 줄을 대놓고 있는 게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을 거 같애. 학원 나오는 다른 애들도 많이 그러고 있고...... 그러다 좋은 기회 닿으면 정리할 수도 있는 거니까 부담 같은 것도 없고......” “근데 문제가 뭐야?” 아무래도 뭔가 중요한 얘기를 에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물었다. “근데...... 그 사람이 아직 소규모로 움직이니까 관리를 의뢰하려면 섭외비가 필요 璣『?”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지면서 그녀는 말했다. “돈?” “응...... 그거.” “얼마나?” “...... 오백이래.” “......”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 순간 오장주 형이 말하던 아르바이트 건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권당 오백만원씩, 두 권에 합이 천만원이 라던 그 아르바이트. 소제목 : 결정은 한 가지 “난 정말 류에게 이런 말 꺼내고 싶지 않은데...... 지금은 정말 불안 해. 뭔가를 내 스스로 열어나가지 않으면 이대로 좌절할 거 같단 생 각고 들고...... 지난 며칠 내가 류한테 미안한 짓 했던 것도 다 그런 불안감 때문이야. 돈은...... 내가 반드시 갚는다는 조건으로 빌려주면 안될까?” 정말 꺼내기 힘든 걸 말을 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그녀의 표정에는 역력하게 떠올라 있었다. “돈......” 아주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는 소파에다 깊숙히 몸을 묻었다. 계산 을 해봐야 할 문제는 아니었지만, 이것저것 고려해 볼 것까지 없는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내 통장에 들어 있는 돈의 액수가 640만원이 었기 때문에, 결정만 내려진다면 당장이라도 그 돈을 그녀에게 꺼내 줄 수도 있었다. 뭐가 문제인가. 문제는 그 돈을 건네주고 난 다음이었다. 집을 나올 때 받아온 돈이 었으므로 그 돈이 바닥나면 나는 또다시 집으로 들어가 손을 벌리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마음만 먹는 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겠으나, 할 수만 있다면 평생 그런 마음을 먹고싶지 않다는 데에 나의 문제가 있었다. 그런 마음을 먹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그동안 돈을 아껴 써 온 거였고, 그것을 통해 내가 거부하고자 하는 상황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라몽을 위해 그런 걸 포기해야 하는가. 다른 해결책의 일종으로 나도 모르게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 다. 통장에 들어 있는 돈 중에서 500만원을 인출해 라몽을 주고, 오장 주 형의 아르바이트 제안을 수락하면 문제가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 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아마겟돈, 최후의 성전에 가담한다는 것. 그것에 대한 결정도 결코 쉬운 건 아닌 것 같았다. 오늘밤, 송가희와 오장주 형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수락한다는 것 자체가 전혀 다른 문제의 상징인 것처럼 되새겨진 때문이었다. 넘 어갈 수 있는 선과 넘어갈 수 없는 선, 그런 것의 경계로 곱씹어지는 오장주 형의 권유__ 문학에 대해 아직도 경계선상에 서 있는 나로서 는 어쨌거나 그런 문제를 사탕 하나 입에 무는 일처럼 간단히 받아들 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정은 한 가지. 내가 그녀에게 돈을 주게 되리라는 것에 대해서만 나는 분명하게 확 신할 수 있었다. 그것 이 그녀의 앞날에 쓰임되고 보탬이 된다면, 어 쨌거나 나는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도움이 아니라 진정한 사 랑의 이름으로 그녀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확실한 결정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한 가지, 뒷마무리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뿐이 었다. 그것 말고 걱정할 게 달리 무어랴,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천천 히 그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돈...... 걱정하지 마.” 소제목 : 내가 녹아서 없어져도 좋아? 냉커피, 긴 유리잔 바닥에서 얼음이 녹고 있었다. 금요일 오후의 왕 창백화점, 라몽과 나의 약속은 오후 3시로 되어 있었지만, 30분이 지 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반 이상 녹 아버린 얼음 조각을 들여다보며 나는 온몸이 땀에 젖었던 지난밤을 떠올렸다. 지난밤, 얼마나 나는 위험한 짐승이었던가. 라몽과 함께 생활한 이후 그토록 격렬한 욕정을 느껴보기는 처음이 었다. 가벼운 입맞춤이 뜨거운 애무가 되고, 그것이 주체하기 힘든 욕 정으로 번져나 〈?동안, 쉼없이 라몽은 나의 등을 토닥이며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었다. __류, 이제 그만.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육체를 소유하고 싶다는 나의 욕 망은 좀체 스러지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절실하고 간절해서, 애 무를 하는 와중에도 처절하다는 생각으로 내 스스로 진저리를 치게 할 정도였다. 그녀의 입술과 뺨과 귀와 목덜미를 지나 나의 얼굴이 그녀의 젖가슴에 파묻혔을 때, 그녀는 내가 느끼게에도 뚜렷하게 온 몸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건가, 문득 두 귀를 蓚? 당겨 자신의 젖가슴에 파묻혀 있던 나의 얼굴을 들어올리며 그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__ 류, 내가 녹아서 없어져도 좋아? __ 안돼. 지금은 말로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어. __ 그렇게 견디기 힘들어? __ 그럼 내 온몸이 타버려 재가 돼도 좋아? __ 미안해, 류. 하지만 나를 지켜준다고 약속했잖아. ‘약속’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 나는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잠 시 뒤, 말없이 그녀에게서 떨어져 거실 바닥에 반듯하게 누웠다. 자신 의 손바닥으로 내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미안해, 하고 라몽이 말했다. 알 수 없는 허무감이 싸리 빗자루처럼 세차게 가슴밑 바닥을 훑고가 는것 같았다. 아무런 인과성도 없는 것 같은데, 낮에 읽었던 시 한편 이 습한 어둠속으로 묵연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여름은 가고 네 모발을 생각한다. 가을이 와서 낙엽이 지면 네 모발은 바다를 건너 더욱 깊이 내 잠속으로 오리라. 바람이 이제 어제의 제 그늘을 떠나고 있다. 분꽃 하나가 바람을 따라 흐르고 있다. 하늘 높이 눈을 뜨고 불리우며 흐르고 있다. 마침내 깊이 깊이 이 세상의 분꽃 하나가 하늘에 묻히리라. 소제목 : 우리 결혼할까? 잔을 들어 거의 다 녹아버린 얼음물을 나는 단숨에 마셔버렸다. 육 체적으로 라몽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욕망과 그녀를 지켜주겠다던 약 속__ 그것이 어쩌면 애초부터 모순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이 묘하게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일종의 장애에 부딪쳐 그녀와 나의 관계가 아슬아슬한 맴돌이를 되풀이하고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녀와 나에게는 출구가 있어야 마땅할 터였다. “결혼......?” 혼자 중얼거리고 나서 나는 힘없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 다. 나의 영혼이 송두리째 그녀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걸 이제는 어떤 식으로도 부정할 자신이 없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거리의 문제에 있 어서도 나는 빈틈없이 허물어져 있었다.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 지의 삶의 전력이 문제가 아니라 견딜 수 없이 절실하고 절박하게 느 껴지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그녀와 나의 현실일 뿐이었다. 단 한순간 일지라도, 그녀 없는 삶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뭐해, 자는 거야?” 눈을 뜨자 밝은 녹색 티셔츠를 걸친 라몽이 활짝 웃으며 내 앞에 서 있었다.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내 ?자세를 고쳐앉자 내 맞은편에 자 리를 잡고 앉으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응, 졸릴 만도 할 거야.” 지난밤, 뜨겁에 달아올랐던 나에 대한 비아냥거림이 분명한 것 같았 다. “졸긴...... 심각한 생각 하고 있었어.” “심각한 생각?” 두 눈을 반짝거리며 그녀가 물었다. “머리 털난 이후 처음 해보는 생각.” “얘기해 줘.답답해.” 탁자 위에 올려놓은 나의 손등을 문지르며 그녀가 재촉했다. “정말 듣고 싶어?” “정말.” 기다렸다는 듯 그녀는 고개를 隻熾눼? 잠시 망설이다가, 마지못한 표정으로 나는 입을 열었다. “우리, 결혼할까?” 백화점에서 나온 직후, 라몽과 나는 지하도를 건너 애견거리가 있는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걸어서 15분쯤의 거리라 버스나 택시를 이 용하는 것보다 걸어서 가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아서였다. 가방에서 검은 선글래스를 꺼낸 쓴 직후부터 그녀는 나의 팔을 잡고 밝은 표정 으로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몰랐으나, 잠시 뒤에 나는 그것이 <트루 로맨스> CD에 수록 된 ‘꿈 속에서’의 음률이라는 걸 鱇팃糖??신기하단 눈빛으로 그 녀를 돌아보았다. 화요일, 내가 통장에서 500만원을 인출해 그녀에게 건네준 이후부터 그녀는 다시금 예전의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양희진이라는 선배 언니와의 잦은 통화와 만남뿐 아니라,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그녀 는 새로운 기대감으로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프로듀서 출신의 매니저 가 신인 모델들을 관리한다는 <티모시 기획>에 대해서도 그녀는 상 당한 신뢰감을 보이고 있었다. 소제목 : 우리 개한마리 기르면 어떨까? 양희진과 함께 내게서 건네받은 500만원을 <티모시 기획>에 건네고 온 날, 그녀는 매니저가 상당한 수완가라는 얘기를 자랑삼아 내게 건 넸었다. 자신이 관리하는 무명의 스타 지망생들을 어떤 식으로 관리 하고 키워나갈 것인지, 그것에 대해 그는 여러 가지의 복안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관철시킬 만한 경험과 인맥이 충분한 사람 같다고 다소 들뜬 목소리로 라몽은 말했었다. 돈을 가지고 간 그날, 그 사람 앞에서 간단한 오디션을 했는데, 라몽에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그가 했다 ?걸 그녀는 가장 기뻐하는 눈치였다. __ 류, 나 다음주부터 사진집 촬영 들어가기로 했어. 지난밤, 양희진과 함께 <티모시 기획>에서 돌아온 그녀가 내게 건 넨 첫마디가 바로 그것이었다.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신인 모델 20여 명이 함께 출연, 각자의 프로필을 소개하는 시판용 사진집에 들어가 기로 됐다는 것이었다.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로 나의 목에 팔을 두 르고, 공적인 지면을 통해 자신이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는 사실에 대해 그녀는 대단히 흥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로 나의 뺨에 입맞추고 나서, 전혀 엉뚱한 말로 그녀는 다시 한번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__ 류, 기념하는 의미로 우리 개 한 마리 기르면 어떨까? __ 개? __ 응, 푸들. __ 이런 일과 개가 무슨 상관이야? __ 오류와 라몽과 푸들, 가족같잖아. 기쁜 일이 생겨도 그것을 함께 나눌 가족이 없다는 걸 그녀는 오래 전부터 은밀하게 아파해 온 눈치였다. 망설임없이 오케이, 나는 그녀 의 요구대로 식구를 하나 더 늘리기로 작정했다. 사소하나마 그녀에 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만족할 수 있었고, 그녀 가 자신의 앞날에 대해 싱싱한 자신감을 회복해가는 게 무엇보다도 다행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류, 아직도 그 생각해?” 애견 거리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지하도 계단을 올라갈 때, 자신 의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라몽이 물었다. “무슨?” “결혼 얘기.” “아니, 아냐.”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그것은 온전한 부정이 아니었다. 백화점 커피 숍에서 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결혼 얘기를 입밖으로 꺼냈을 때, 그녀는 정말이지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었다. 당혹스럽고 난감하 다는 표정, 혹은 어이없고 터무니없다는다는 표정이었다. 스타 지망생에게 결혼이야기라니! 그녀의 표정을 보고난 직후에 나는 나의 발설을 단박 후회했다. 그 녀의 표정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스타 아무개, 무명 시절에 누구와 동거했다’라거나, ‘몰래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다’ 는 식의 스캔들과 가십 기사__ 그 런 걸 몰라서가 아니라 나의 감정에 지나치게 충실하고 있었다는 자 책감으 ?더이상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건넬 수 없었다. 사랑의 이름으 로 어찌 사랑의 덫을 만들 수 있으랴. 그녀를 이해해야 한다는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나의 마 음은 무겁고 암담하게 가라앉아가고 있었다. 관계의 진척을 가로막고 있는 듯한 알 수 없는 장애감, 출구를 예견할 수 없는 막막함이 왠지 모르게 나에게는 불가항력적인 문제로 받아들여질 뿐이었다. 사랑이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능력 밖 의 영역에서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가세하여 그것을 교묘한 운명의 구조 속으로 몰고가는 것 같다는 막연함 두려움까지 느끼며, 다만 말 없이 나는 앞을 보며 걸어나갔다. 언제까지 이렇게 걸어나가야 할지, 그녀와 나 사이에 예견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과 그 상 태는 조금도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칠월 중순의 무더운 금요일 오 후, 라몽과 함께 푸들 사러 가는 길. 소제목 : 결혼도 안하고 애부터 키워?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말. 라몽과 함께 애견센터로 들어가고 난 직후, 사람보다 더욱 융숭한 대접을 받고 사는 개들에 관한 얘기를 듣고나서 나는 할 말을 잃어버 리고 말았다. 귀가 크고 밑으로 쳐진 프랑스 원산의 푸들 한 마리 가 격이 20만원 이상된다는 건 그렇다쳐도, 개를 기르는 데 필요한 용품 으로 눈물 지우는 약, 샴푸, 린스, 브러쉬, 칫솔, 치약, 구강 스프레이, 냄새 제거 향수, 옷, 신발, 귀 청결제, 껌, 밥그릇, 개목줄, 발톱깎이, 개 방석 따위들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는 정말이지 기가 막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기가 막히다구요? 여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개 미용실도 있어 요. 목욕, 빗질, 귀 소제, 털 커트 같은 걸 해 주고 한번에 이만오천원 정도씩 낸다구요. 개한테 매니큐어를 칠해 주기도 하고 귀나 꼬리에 부분 염색을 하기도 한다니까요?” 애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오히려 신기하단 표정으로 애견 센터의 젊은 종업원은 연신 제스처를 써가며 말했다. “푸들 사서 그런 식으로 기르진 않을 거지?” 여전히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는 라몽에게 물었 ? “미장원은 나도 잘 안 가잖아. ” 걱정 말라는 표정으로 라몽은 내 손을 잡았다. “애견 호텔 얘기도 해 드릴까요? 손님들이 집을 비우거나 어디로 여행을 가게 될 경우에 애견을 묵게 하는 호텔이 있는데 말이죠, 하 루 숙박료가 만원에서 삼만원 정도 하니까 필요하실 때 사용해 보세 요.” 종업원의 말을 듣고 나서 라몽과 나는 실내의 철망에 갇혀 있는 애 견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요크테리셔, 몰티즈, 포메라니언, 치와와, 푸들, 미니추어 핀셀 등등을 둘러보며 라몽은 연신 아이 귀여워, 아이 예뻐, 하는 말을 입밖으로 꺼내며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누르곤 했다. “푸들?” 한바퀴를 다 둘러보고 나서, 혹시라도 마음에 변화가 생기지 않았냐 는 의미로 나는 라몽에게 물었다. “응, 푸들로 할래.” 그녀와 나는 다시 종업원의 안내로 푸들만 대여섯 마리 들어 있는 철망 앞으로 갔다. “골라봐.” 대여섯 마리가 모두 똑같아 보여서 개 고르는 일을 나는 전적으로 라몽에게 일임했다. 한참동안 허리를 굽히고 한 마리 한 마리를 찬찬 히 살펴나가던 그녀, 이윽고 눈에 드는 걸 발견했다는 듯 내 옆구리 를 툭 치며 철망 바로 앞에 서 있는 푸들을 가리켰다. “맘에 들어?” “착한 아기 눈동자 같지?” “아기?” 개와 아기?__ 얼핏 맥락이 닿지 않는 것같아 나는 그녀를 보았다. “개도 애지중지 키우면 아기하고 똑같지 뭐.” 입을 삐쭉 내밀고 나서 그녀는 다시 개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문 득 뇌리를 스쳐가는 게 있어 심드렁한 목소리로 나는 중얼거렸다. “결혼도 안하고 애부터 키워?” 소제목 : 삐-삐-삐-삐-삐-삐-삐-삐 푸들 한 마리를 사고 나서 그녀와 나는 냉모밀을 먹으러 갔다. 그녀 와 나만 간 게 아니라 그녀와 나 사이에 새롭게 끼어든 푸들까지 셋 이 함께 간 것이었다. 애견 백화점에 들러 구입한 개목줄과 드라이 푸드, 그리고 몇 개의 캔 제품 따위가 들어 있는 봉투는 내가 들고 푸들은 그녀가 안고 식당으로 들어섰을 때, 계산대에 앉아 있던 주인 여자가 다소 못마땅한 표정으로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다소 엉거주춤했지만, 라몽은 태연한 표정으로 자리를 잡고 앉 았다. 품에 안은 푸들을 이리 만지고 倖?쓰다듬으며 여간 귀여워하 는 게 아니었다. 개를 연적으로 생각하는 인간도 있을까? 혼자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 어 피식 웃음을 터뜨리자, 문득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그녀가 나를 보았다. “우리, 내일 소풍 갈까?” “소풍?” 도대체 ‘소풍’이라는 말을 들어본 게 언제였던가, 하는 표정으로 나는 그녀를 보았다. “응, 오류랑 나랑 푸들이랑......이렇게 셋이서 가까운 데로 가지 뭐. 내일 토요일이잖아?” “그냥 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오 筆?나랑 푸들이랑’이라는 말이 묘하게 느껴졌지만,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오히려 담담한 표정으로 나는 물었다. “음...... 오늘 김밥 재료 준비해 뒀다가 내일 그거 만들어 가면 되지 뭐. 어때?” “그런데 어디로 가지?” 주문한 냉모밀을 먹으며 이곳저곳 그녀와 나는 소풍 가기에 맞춤한 장소를 떠올려보았다. 국민학교 시절의 고궁과 왕능 소풍 기억을 제 하고 나면, 사실 마땅한 장소를 선뜻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도 있었다. 그것이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하여 바람을 쐬는 區? 로서의 소풍(消風)이었건, ‘운동 - 자연 관찰 등을 겸해 야외로 먼 길을 걷는 일’로서의 소풍(逍風)이었건, 얼핏 생각하기에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결코 일상적이지 않은 게 도시인들의 소풍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와 나 사이에 푸들까지 가세 하는 소풍이었으니 장소 선정이 더욱 어려워지는 건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삐-삐-삐-삐-삐-삐-삐-삐. 식사를 마치고 나서 오분쯤 지난 뒤, 라몽과 내가 여전히 소풍 장소 를 놓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느닷없 ?그녀의 가방 안에서 삐삐 호출음이 울렸다.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던 푸들을 내게 넘기고 나서 그녀는 가방에서 호출기를 꺼내들었다. 액정 표시판을 들여다보 고 나서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는 나를 보았다. “누구야?” 푸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나는 물었다. 예감 이나 염력 따위를 믿어본 적은 없지만, 아주 이상한 느낌이 섬뜩하게 등줄기를 훑어내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윤인준 씨......” 갑작스럽게 얼굴이 상기되며 아주 낮은 목소리로 그녀가 중얼거렸 다. 소제목 : 작은 돛단배 한 척 “윤인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서 나는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 다. “응.” “그게 누군데?” 내 무릎 위에 앉아 있는 게 불편한 지 푸들이 계속 버둥거렸다. “티모시 기획 그 사람.”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가방에서 동전 지갑을 꺼내들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나며 나를 보았다. 소풍 장소를 물색하던 참에 날아든 호 출이라서 내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일까. 평소답지 않은 그녀 의 행동을 나는 그런 식으로 해석하며 전화 걸고 와, 하고 가볍게 말 ?주었다. 윤인준, 티모시 기획 그 사람. 라몽이 전화를 걸러 간 사이, 내게서 벗어나기 위해 자꾸만 버둥거 리는 푸들을 쓰다듬으며 나는 단 한번도 대면한 적 없는 사람의 이름 을 몇 번인가 되뇌어보았다. 그녀의 대인관계, 그녀의 일, 그녀의 사 생활에 관해 진심으로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 각이 들었다. 정말 대범하게, 내가 그녀의 행동영역을 존중하고 있는 지에 대해 왠지 모르게 부정적인 생각이 든 때문이었다.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녀의 행동 반경이 내 가시권 밖으로 차츰 넓어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는 묘한 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함께 있어도 상대방의 심중을 헤아릴 수 없다는 데서 생겨나는 근원 적인 외로움이거나 내 고유의 관심 영역을 그녀가 소리없이 넘어가고 있다는 데서 생겨나는 미묘한 소외감 같은 것일 수도 있을 터였다. 함께 있어도 외롭고, 함께 있어도 소외된 듯한 그런 감정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류, 미안해.”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전화를 걸고온 그녀의 표정은 사 뭇 긴장되고 어두워보였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푸들을 그녀에게 넘겨주며 나는 물었다. “나, 지금 거기 가봐야 돼. 푸들 데리고 먼저 집에 가 있어. 일 끝 나는 대로 곧장 갈게. 정말 미안해.” 울상이 되다시피한 얼굴로 그녀는 푸들을 다시 내게 넘겼다. 푸들을 넘겨받고, 잠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는 침묵했다. 막막한 심중 으로 느닷없이 망망대해가 떠오르고, 세찬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산처 럼 키를 세운 파도가 보이다 언뜻, 풍랑에 휘말려 제멋대로 부침을 거듭하는 작은 돛단배 한 척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냉랭한 목소리로 나는 물었다. “모르겠어. 아마 사진집 촬영 건 때문에 그러는 것 같은데...... 정말 미안해. 화 내지 마. 응?” “......” “화난 거야?”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이를 데 없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녀는 나를 보았다. 왼손에 애견용품 봉지를 들고 오른팔에 푸들을 껴안은 채, 그 녀를 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여전히 감정이 배제된 듯한 목소 리로 나는 차갑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말고 가봐. 내 자신한테 화난 거니까.” 소제목 : 오, 푸들, 푸들! 날 저무는 세상의 밑자리. 집으로 돌아온 뒤부터 몇 시간 동안, 나는 꼼짝도 않고 소파에 누워 있었다. 주변의 풍경과 소음이 스러지고 이윽고 내 자신까지 스러져 버린 듯한 막막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바람 한 점 어른거리지 않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나는 젖은 몸으로 누워 있었다. 망념의 늪을 향 해 다가오는 서늘하면서도 불길한 그림자는 뚜렷하되, 두 눈 뜨고 있 어도 보이지 않는 사물의 형해로부터 이미 나의 의식은 멀리멀리 벗 어나 있었다. 실내로 어둑발이 밀려들 무렵에 나는 간신히 소파에서 일어나 앉았 다. 누워 있는 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푸들은 라몽과 나의 방과 방 사이, 그 좁은 경계 벽면 앞에 가만히 앉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눈 빛이 다소 애처로워 보였으나 왠지 모르게 라몽처럼 나는 그 개에게 선뜻 정이 가지 않았다. 푸들에 대한 그녀의 애정 때문인가, 나도 모 르게 그 개를 그녀와 동일시하고 싶다는 묘한 충동이 가슴 밑바닥을 서늘하게 훑고가는 것 같았다. “야.” 몽롱한 눈빛으로 푸들을 내려다보며 나는 그렇게 입을열었다. 애처 롭고 불안정한 눈빛으로 앉아 있던 놈이 턱을 바짝 당기며 나를 올려 다보았다. “넌 이름이 뭐냐?” 묻고나서 나는 위에 걸치고 있던 녹색 셔츠를 벗었다. “임마, 이름 몰라?” 소파에서 일어나 이번에는 청바지를 벗었다. “이름이 없으니까 너도 무명이냐?” 러닝과 팬티를 벗으며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옷을 벗는 나의 동 작이 커서인지 놈의 눈빛에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너도 스타 지망생이다, 그거냐?” 알몸이 된 뒤, 손으로 푸들의 턱을 한번 툭 치고 나서 나는 욕실로 들어갔다. 시간이 瘟? 정신이 삭고, 청춘이 삭고, 인생이 삭는 것같 아 찬물로 샤워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정체된 상태로 오 래 머물러 이로울 게 도대체 뭔가. 무엇이든 고이면 썩고 멈추면 삭 는다는 생각을 또렷하게 하면서도, 라몽에 대한 이해심과 라몽에 대 한 감정이 반목구조로 심화되는 걸 어쨌거나 나는 힘겨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인준, 티모시 기획 그 사람. 찬물을 뒤집어쓰며 나는 세차게 머리를 뒤흔들었다. 이름이 없으니 까 아직 무명인 푸들, 차라리 개이름을 생각해보는 게 정신 위생상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개이름을 지어주는 것도 좋지만 앞으로 내가 처리해야 할 금전적인 문제를 생각해보는 게 더욱 좋겠 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이름, 아르바이트, 오장주, 송가희, 오백만원, 천만원...... 오, 푸들, 푸들!” 소제목 : 맙소사, 너도 여자냐?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나와 나는 알몸인 채로 푸들을 뒤집어들었다. 이름을 지으려다 문득,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는 걸 비로소 깨달은 때문이었다. 암놈인지 숫놈인지도 모르고 어떻 게 이름을 짓는단 말인가. “맙소사, 너도 여자냐?” 푸들의 성별을 확인한 뒤에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놈의 안면 을 들여다보았다. 나의 양손 안에서 뒤로 눕혀진 채 놈은 연신 앞발 을 버둥거리며 낑낑거렸다. “왜, 알몸을 보니까 얼굴이 화끈거리냐?” 피식 웃고 나서 나는 さ湧?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알몸인 채로 주방으로 가 커피물을 올려놓았다. 암놈의 개를 무시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할수만 있다면 라몽과도 이처럼 마음의 누더기를 훨훨 벗어 던진 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나른한 기분으로 잔에다 그래뉼 커피 두 스푼을 담았다. ‘지가아마사’와 ‘영사위’를 때마 다 확인하면서도 그녀와 나로 하여금 마음의 옷을 홀가분하게 벗어던 지지 못하게 하는 게 도대체 뭘까. 물이 끓는 동안 나는 접시에다 애견용품점에서 사온 드라이 푸드를 조금 꺼내 さ涌“?주었다. 먹긴 잘 먹었지만 길잃은 미아처럼 왠지 모르게 안쓰럽고 애처롭게 보였다. 커피잔을 들고 소파에 앉아 물끄 러미 그 먹는 모양새를 내려다보자 먹으면서도 불안한지 간간히 고개 를 들어 사뭇 불안한 기색으로 놈은 나를 보았다. “걱정하지 말고 먹어. 너를 미워하거나 괴롭히고 싶어하는 건 아냐. 그냥, 난 지금 마음이 편치 않을 뿐이야.” 알아듣지도 못하는 개에게 그런 식의 말을 건네고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인지하거나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어쨌거나 살아 있는 생물에게 일 방적으로 심정을 털어놓는다는 게 기이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같아서였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커피를 한 모금 “넌 모르겠지 만, 난 지금 무척 어려운 처지에 처해 있어. 스타가 되겠다는 라몽의 열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걸 희생해도 괜 찮다는 생각에는 도무지 동의하기가 어려운 거야. 너도 무명이니까 스타가 되겠다는 꿈 때문에 진정한 사랑을 무시해도 괜찮다는 쪽이 냐? 그래, 물론 무시한다고 말할 순 없겠지. 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하 는 사람은 그 대상이 마 ?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기 일 처럼 환하게 알 수 있어.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알 수 있다구. 그런 데 라몽과 난 왜 이렇게 어려워져가는 거지?” 정말 내 말을 알아듣는 듯 푸들이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았다. 개 가 오히려 나를 애처롭고 안쓰럽게 바라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 다. 라몽과 함께가 아니라 이처럼 개와 함께 해야 할 시간이 날이 갈 수록 늘어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묵연하게 뇌리를 스쳐갔다. 라몽과 함께가 아니라 푸들과 함께? 난감한 심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실내를 어슬렁거릴 때 느닷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푸들은 놀란 기색으로 벌떡 자 리에서 일어났다. 벽시계가 8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보나마나 라 몽일 거라는 생각을 하며 착잡한 심정으로 나는 수화기를 집어들었 다. 소제목 : 누구일까 “여보세요?” 나를 올려다보는 푸들을 내려다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 “여보세요.” 전화는 분명 연결되어 있는데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 나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멀고 아득한 곳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처럼, 아주 희미 하게 수화기 저쪽에서 차량의 엔진소음이 들려왔다. “......” “전화 연결되었습니다. 말씀 하세요.” 라몽이냐고 묻고 싶은 마음 굴뚝 같았지만, 오장주 형의 전화를 받 을 때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 나는 애써 태연을 가장했 다.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상대방의 의도적인 침묵이 신경을 극도 로 자극하는 것 같았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복면을 한 자객의 순간적 망설임같은 걸 느끼다 못해 나는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없는 대상을 향해 입을 열었다. 거의 동시에 뚝, 수화기 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뚜우, 뚜우, 기분 나쁜 단절음이 연해 되풀이되었다. 누구일까. 풀썩, 소파에다 몸을 묻고 나서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불쾌함 과 불길함이 쉼없이 마찰을 일으키는 와중, 지상의 온갖 나쁜 일이 나를 위해 예비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촉에 독이 묻은 날카로운 화살이 올곧게 나를 겨냥하고 있는 것같아 도무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누구일까. 감정이 평온을 잃고 있을 때 걸려온 전화라서 그 여파가 살을 파고 뼈를 뚫고 들어와 온몸으로 맹독처럼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빠르게, 그리고 치명적으로 번져나가는 독성을 중화시키기 위해 너무나 많은 것들을 나는 순간적으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위성과 가능성, 심지어는 잠재태로 머물러 있는 일들에 대해서까지 나의 검색은 촌각 을 다투듯 범위를 넓혀나갔다. 라몽과 송가희. 타당한 근거가 떠오른 것도 아닌데 전화를 걸어온 사람으로 내가 가 장 먼저 떠올린 사람이 라몽이었고, 그 다음이 송가희였다. 라몽에 대 해서는 거의 육감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송가희에 대해서는 그럴 만 한 근거가 떠오르기도 했다. 오장주 형의 머리를 맥주병으로 내려친 이후, 찜찜한 시간을 보내고 있기는 오장주 형이나 송가희나 별반 다 름이 없을 터였다. 두 사람 모두 내게 전화를 걸어오지 않은 것만으 로도 그것은 얼마든지 유추가 가능한 일이었다. 단순한 업무상의 일 로 생겨난 마찰이 아니라 선후배 사이에 생겨난 일이었으니,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감정상의 미묘함이 오죽이나 더하랴. 소제목 : 이세상 어디에 맑은 바람이 있는데? 라몽이야 어차피 나중에 확인을 할 수도 있으니까 일단 가희에게 전 화를 걸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내게 전화 를 걸었냐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난 며칠 동안 계속 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미묘한 문제를 그녀와 상의해봐야겠다는 생각 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뭐하고 있어?” 가희의 목소리를 확인하고 나서 나는 다소 어색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지금..... 소주 마시면서 코르타사르 단편집 읽고 있어.” 힘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는 대답했다. “코르타사르?” “응, 아르헨티나 작가인데...... 맘에 들어.”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 “목소리가 어떤데?” 길게 누워 있다가 일어날 때처럼 끙, 하는 소리를 내고 나서 그녀는 되물었다. “글쎄, 세상만사 다 귀찮아하는 사람 목소리 같아서......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아니, 그럴 듯해. 외로워서 그럴 거야. 뭔가가 온몸에 덕지덕지 달 라붙어서 아주 불쾌하기 짝이 없단 말야. 필요하다면 정말 이럴 때 남자랑 같이 자야하는 건데...... 너 이런 기분 알기나 해?” “너무 깊이 잠수한 거 아냐? 가끔 부상해서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 와 맑은 바람도 좀 쐬고 그래봐.” “이 세상 어디에 맑은 바람이 있는데?” 웃기지 말라는 듯한 어투로 그녀는 응대했다. “말꼬리 잡지 마. 장주 형이랑은 통화해봤어?” “아니...... 그럴 기분 아냐.” “그럼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만나서 사과주라도 한잔할까? 억지로 되지 않는 걸 어떻해? 아직 은 혼란스러워서 그 일은 그냥 묻어두고 싶어. 어느날 갑자기 화장실 에 앉아 있거나 길을 걷다가 문득 아이 참, 그때 내가 왜 그랬지, 하 는 생각이 들면 그때 전화를 하던가 사과를 하던가 그러지 뭐. 지금 같은 기분으로 마음 속이고 억눌러가면서 도대체 뭘 어쩌겠니?” 짜증스럽다는 어조로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너...... 그 문제에 대해선 생각해봤어?” “뭐?” 소주잔을 비운 모양 크흐, 하는 소리를 내고 나서 그녀는 되물었다. 소제목 : 우리 지금 만나자 “장주 형이 말하던...... 그 아르바이트 건 말야.” “권당 오백만원씩 준다던 그거?” 다소 언성을 높이며, 갑작스럽게 생각났다는 목소리로 그녀는 물었 다. “그래, 그거.” “너......” 혼란스럽다는 듯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이윽고 마음을 다잡아먹은 듯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그거 하고싶어?” “아니, 네 생각을 알고싶어.” “그날 이후 난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너 혹시 무슨 일 있 는 거 아냐?” 다그치듯 그녀는 물었다. “일은 무슨...... 그냥, 시간 보내는 게 너무 막막해서 그래. 너처럼 목표의식이 뚜렷해서 옆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앞으로만 나가는 사람 과 나는 다르잖아. 안 그래? 견디는 것도 서로 상태가 다른 거라구.” 아주 간단하게, 돈이 필요해서 그렇다는 말을 어째서 꺼내지 못하는 것일까. 일의 가치 따위는 접어두고, 오직 돈이 필요해서 그 일을 나 는 맡고싶다는 말. “류, 내가 너라면 말야. 그 시간 동안 차라리 여행을 하거나, 사랑 을 하거나, 그도저도 아니면 막노동을 하 渼? 이건 내 생각이지만, 그런 일은 돈에 대한 어줍잖은 자신감과 세상에 대한 허튼 자만심에 눈뜨게 해서 사람을 절실하거나 절박하게 만들지 못해. 그런 일에 그 렇게 쉽사리 길들여지려면 이 놀기 좋은 세상에 뭐 할 일이 없어서 창창한 청춘 썩혀가며 문학을 해?” “내 말은......” 답답해서 입을 열었지만 더이상 나로서는 덧붙일 말이 없었다. “말해봐. 뭐?” “아니 됐어. 다음에 만나서 얘기하자.” “전화 끊자구?” 어이가 없다는 어투로 그녀는 물었다. “그냥 기분 ?좀 그래.” 나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푸들을 내려다보며 나는 대답했다. 푸 들, 라몽, 돈, 아르바이트, 시, 소설, 문학, 오장주, 티모시 기획, 윤인 준...... 외견상으론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 같은데, 의외로 많은 문제 들이 난마처럼 뒤엉겨 머리 속을 어지럽게 만드는 것 같았다. “너도 기분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내가 한 가지 제안할까?” 지금까지와 전혀 다르게, 사뭇 생기가 느껴지는 어조로 그녀는 물었 다. “제안?” 놀란 눈빛으로 나는 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우리 지금 만나자.” “지금?” 나를 올려다보던 푸들이 고개를 두어번 옆으로 젓고 나서 끼잉, 하 는 소리를 냈다. “언제나 중요한 건 지금이야, 지금! ” “미안해. 지금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냐. 다음에 만나서 얘기하 자.” 눈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나는 그렇게 말했 다. “...... 정신 좀 차려라, 이놈아. 너 때문에 또 문제가 생기는구나. 이 러니 널 믿을 수가 있어야지......” “뭐라구?” 아무리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해도 이럴 수가 있는가 싶어 나는 단박 언성을 높였다. “신경 쓰지 마.코르타사르 단편집 60페이지, 지금 내가 읽고 있는 부분에 그런 대화가 나와 있어서 그냥 한번 읽어본 거야. 잘있어.” 소제목 : 이를 악물고 시를 읽었다 자정 무렵. 날 저무는 강변을 떠올렸다. 밀알같이 부드러운 저녁을 생각했다. 견 고한 어둠 속으로 떠오르는 따뜻한 등빛을 연상했다. 꽃이름으로 포 롱거리는 유년시절을 추억했다. 분말처럼 미세하게 흩날리는 절망을 되새겼다. 사랑의 이면에 누적된 기억의 잔해를 저작했다. 아득해서 차라리 눈감고 싶어지는 저린 그리움의 시간. 살라망드르가 사는 곳. 이브 본느프와의 시집을 읽다가, 내 곁에 없는 라몽은 세상에 없는 라몽과 같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그녀가 이 세상의 어느 다른 공간 에 있을 거라는 상상은 아무런 의미도 있을 수 없었다. 죽은 시간 속 의 라몽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나는 이를 악물고 시를 읽고 있었다. 죽은 이미지를 떨쳐버리기 위해, 오직 살아 있는 이미지로만 그녀를 생각하기 위해. 나는 이름 붙일 것이다 그대가 있었던 그 城을 사막이라고 그 목소리를 밤이라고, 그대의 얼굴을 不在라고 그대가 불모의 땅에 쓰러지게 될 때 나는 이름 붙일 것이다 그대를 데려간 번갯불을 허무라고 죽음은 그대가 사랑했던 나라 그러나 나는 간다 영원히 그대의 어두운 길을 통해서 나는 부순다, 그대의 욕망, 그대의 형태, 그대의 기억을 나는 연민의 정을 품지 않는 그대의 敵 나는 그대를 싸움이라고 이름붙일 것이다 나는 그대에 대해서 싸움의 자유를 가질 것이다 또한 나는 가질 것이다 내 손에 그대의 어둡게 꿰뚫어진 얼굴을 내 마음 속에 천둥치는 비바람 훤히 비치는 그런 나라를 소제목 : 돌아오지 않는 라몽 탁, 소리가 나게 시집을 덮었다. 고개를 들고 벽시계를 올려다보았 다. 어느덧 새벽 한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닥에 배를 깔고 앞발 위에다 턱을 올리고 있던 푸들이 퍼뜩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신새벽의 정적 속에서, 그놈과 나는 한동안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보 았다. 다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마음의 평형을 유지하기 어려 워서인지 말보다 먼저 한숨이 밀려나왔다. 돌아오지 않는 라몽. 조용히 소파에서 일어나 벽에 부착된 스위치를 눌렀다. 폭발하듯 사 방을 에워싸는 어둠 淡?잠시 서 있다가 베란다 쪽으로 천천히 걸음 을 옮겨놓았다. 교회의 붉은 십자가 네온사인 몇 개, 지상에서 뻗쳐오르는 빛으로 희붐하게 얼룩진 밤하늘이 보였다. 모든 게 정체돼 있는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내 몸속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가속력이 느껴지 고 있었다. 붉고 푸른 네온사인의 바다 위를 둥시둥실 떠가는 라몽이 보였다. 푸른 조명등 아래서 까르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라몽이 보였다. 희디흰 치아를 드러내고 인파 속으로 정신없이 휩쓸려가는 라몽이 보 였다. 실크 릿?유연하게 너울너울 춤을 추는 라몽, 질주하는 차량에 갈기처럼 머리칼을 흩날리는 라몽이 보였다. 돌아오지 않는 라몽. 가속력으로 움직이는 도시의 모든 곳에 그녀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 녀 자신이 도시가 되어 움직이는 듯한 가속력을 견디기 어려워 힘없 이 나는 등을 돌렸다. 잠시 어둠 속에 서 있다가 천천히 전화기 앞으 로 걸어갔다. 허리를 굽히고 수화기를 집어들었다가, 알 수 없는 제어 력을 느끼며 그대로 그것을 내려놓았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녀에게 삐삐 치고 싶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나는 거실바닥에 몸을 눕혔다. 허공의 어둠이 검푸른 이미지의 바다처럼 출렁거렸다. 불신과 회의 와 절망으로 뒤덮힌 밤하늘에서 굶주린 독수리 한 마리가 선회하고 있었다. 밝고 맑고 화사하고 경쾌한 모든 이미지, 지상의 풍요로움은 이제 더이상 신성한 대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표적 되는 모든 것에서 부패의 냄새 진동하고, 긍정의 이면에서는 구데기떼가 들끓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라몽. 신성했던 삶의 표적에 싸늘한 비수처럼 독수리의 부리가 날아들었 다. 그녀의 여린 살갗이 찢어지자 꽃처럼 붉은 피가 솟아올랐다. 파멸 의 유혹 황홀하고, 죽음의 냄새 향기롭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형언할 길 없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의 단어가 생명을 얻을 수 있 다면, 그것이 죽음보다 더한 것이라 해도 괜찮다는 극한의 정서가 독 처럼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 다는 말을 입에 물고 소리 죽여 울더라도 영원히 날 밝을 것 같지 않 은 밤__ 읽던 시의 한 토막이 피에 젖은 독수리의 부리에 물려 있었 다. 어제는 사막을 지배 玖? 나는 야생의 나뭇잎이었다 자유로이 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은 낮의 돌 속에 물의 상처를 곪게 한다 작은 골짜기의 검은 탄식으로 소제목 : 네 이름은 나몽이야 푸르스름한 빛줄기. 눈을 뜨자 세찬 바람소리가 들렸다. 닝닝거리며 전선이 우는 소리, 창틀이 덜컹거리는 소리, 높고 낮은 지붕을 넘어 시간의 경계를 벗어 나는 듯한 바람소리 때문에 잠이 깬 것 같았다. 서늘한 한기를 느끼 며 잠시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나는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5시 40분. 퍼뜩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이 있어 나는 튀듯이 몸을 일으켰다. 현 관을 보고나서 재빨리 라몽방의 문을 열어보았다. 현관과 방, 그 어느 곳에도 그녀가 돌아왔다는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새벽 두 시 넘 게까지 그녀를 기다렸으나, 내가 잠에 빠진 뒤에도 그녀는 끝내 집으 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었다. 멍한 기분으로 등을 돌리자, 소파 밑에 웅크리고 있던 푸들이 꼬리 를 흔들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아무런 생각없이 나는 그놈을 들어올 려 품에 안고 베란다 쪽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푸르스름한 새벽 풍 경, 세찬 비바람에 흔들리며 종말적인 분위기로 침침하게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잠시 밖을 내다보다가 나는 푸들에게 먹을 걸 주었다. 여러 번 심호 흡을 하며 물을 끓이고, 몇 번의 망설임 끝에 라면을 포기하고 커피 를 마시기로 했다. 단순하고 단조로운 일에도 엄청난 마음의 무게가 실려 어이없을 정도로 동작이 느려졌다. 속으로 파고드는 힘의 관성 을 이기기 위해 자주 머리를 뒤흔들었지만, 이내 정신이 몽롱해지고 사물의 형체까지 흐무러지곤 했다. 낑낑거리는 푸들을 욕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바닥에 내려놓고 잠시 서 있자 놈이 아주 작은 양의 오줌을 누었다. 다시 놈을 안고 밖으로 나와 이번에는 라몽의 방으로 들어갔다. 커튼을 치고, 세찬 비바람 소 리를 들으며 놈과 함께 라몽의 침대에 누웠다. 아침이 오지 말기를, 라몽이 돌아오지 않는 한 영원히 밤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제 네 이름이 생각났어.” 눈을 감은 채, 푸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나몽이야. 라몽이 아니고 나몽...... 무슨 뜻인 지 알겠니?” 나의 손길에 자신을 내맡긴 채 푸들은 잠잠하게 앉아 있었다. “난, 라몽이 잃어버린 걸 그리워해. 라몽을 꿈꾸면서 그녀는 오래 전에 나몽을 잃어버렸어. 그런 라몽을 이해하고 싶지만...... 시간이 흐 를수록 나는 그녀 자신이 오래 전에 망각한 나몽이 그리워져. 알겠니, 내 말?” 부드럽게 나는 나몽을 끌어안았다. 팔과 가슴의 공간으로 들어와 잠 시 움직이던 나몽, 두어 번 혓바닥을 날름거려 나의 뺨을 핥고 나서 재빨리 품을 벗어났다. 약에 취한 사람처럼 몽롱한 어조로, 눈을 감은 채 나는 중얼거렸다. “그래 네가 라몽이 아니듯, 라몽도 이제 더는 나몽일 수 없을 거야. 어차피 모든 게 꿈이고 환상일 뿐이니까......” 소제목 : 몽이도 아직 자고 있나요? 빗소리와 벨소리. 다시 눈을 떴을 때 시간은 오전 11시가 지나 있었다. 바람소리는 잦 아들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비에 젖고 있었고, 거실에서는 연해 전화 벨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푸들이 보이지 않았지만, 전화를 받기 위해 나는 정신없이 거실로 달려나갔다. “여보세요?” 잠기운을 떨쳐내고 바짝 긴장된 목소리로 나는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귀에 익지 않은 여자의 목소리. “누구시죠?” “지난번에 한번 만났었는데...... 양희진, 라몽의 학원 선배예요. 기억 나세요?” 밝고 경쾌한 목소리로 그녀는 물었다. “죄송합니다. 자다가 전화를 받아서 그만......” “아, 주무시는데...... 미안해요. 그럼 몽이도 아직 자고 있나요?” “......” 그녀의 물음이 퍽, 쐐기처럼 가슴에 와 박혔다. 윤인준이라는 사람과 결혼을 하기로 했다는 그녀, 어째서 라몽이 티모시 기획으로 갔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는 걸까. “아직 자나보죠?” 아직 자고 있으면 나중에 다시 걸겠다는 투로 그녀는 다시 물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라몽은 지금 집에 없어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가까스로 나는 입을 열었다. “외출했나요?” “아뇨, 어제 집에 안 들어왔어요. 오후에 티모시 기획으로 간다고 갔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네요.” “티모시 기획요?” 목소리가 한껏 고조되었다가 켁, 한순간에 숨통이 막힌 사람처럼 턱 없이 놀라는 그녀. “오후에 삐삐가 왔어요. 티모시 기획, 윤인준이라는 사람한테서요.” “......” “사진집 촬영 건 때문이라고 하던데...... 희진 씨는 전혀 모르고 있 었나요?” 빗물이 번질거리며 흘러내리는 창을 바라보며 나는 물었다. 소제목 : 이런 걸 두고 사랑이라고 말해? “사진집은 아직 기획 단계이고 윤인준 씨는 어제 부산 출장 간다고 했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비도 오고 해서 난 그 냥......” 사뭇 맥이 빠진 목소리로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그럼 라몽이 어디 있는지 희진씨가 좀 알아봐 주실 수 없나요?” “알아볼게요. 계속 집에 계실 건가요?” 여전히 힘없는 목소리로 그녀는 물었다. “네. 기다리는 일밖에...... 지금으로선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전화를 끊고나서 나는 나몽, 눈앞에서 사라진 푸들을 찾기 시작했다. 라몽의 침대로 같이 올라갔었는데, 내가 잠든 사이 어디로 사라진 것 일까. 거실을 둘러보고 나서 욕실 문을 열어보았지만 그곳에도 나몽 은 없었다. 내 방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그곳에도 없었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유리문을 열고 베란다를 내다보았으나 그곳에도 나몽은 없었다. “나몽, 어딨어?” 거실 한복판에 서서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나몽을 찾 기 위해 그러는 것인지, 라몽을 찾기 위해 그러는 것인지, 순간적으로 솟구치는 분노의 근원을 � 스스로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걸 두고 사랑이라고 말해?” 현관으로 달려가 신경질적으로 신발장을 열어보았다. “지가아마사, 영사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지막 사랑이 이런 건가? 영원한 사랑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고작 이따위 일뿐이냐구?” 소파 앞에 놓인 탁자 밑을 들여다보며 나는 발악적으로 소리를 질렀 다. 눈두덩이 욱신거리고, 나도 모르게 거센 악력이 손아귀에서느껴졌 다. “나와서 말을 해보라구!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고, 그래서 스타가 되고, 그 다음에 남는 건 도대체 뭐지? 사랑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 고, 도대체 뭐가 남는가 말야!” 부르르, 진저리를 쳐대며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라몽방으로 들어갔 다. 무릎을 끓고 다시 허리를 굽혀 침대 밑을 들여다보았다. 침대 밑, 그 끝쪽의 벽 앞에 오도카니 푸들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아니 나 몽이 앉아 있었고, 라몽이 앉아 있었다. 아주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 쉬고 나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가 다가오지 않으면, 나도 너에게 다가갈 수 없어.” 소제목 : 나랑 만나는 건 절대 비밀 양희진이 내게 다시 전화를 걸어온 건 오후 세 시경이었다. 그때까 지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무겁고 답답한 시간의 흐름 속에 내 자 신을 방치하고 있었다. 물론 라몽으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삐삐를 치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으나, 자발적으로 전화를 걸 어오지 않는 사람을 일방적으로 호출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어 잠시 수화기를 내려다보다가 힘없이 눈길을 돌리곤 했을 뿐이었 다. “죄송한데...... 지금 저 좀 만나 주실 수 있나요?” 무슨 이유 때문인가, 전화를 걸어온 양희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 다. 거두절미하고 자신을 만나줄 수 있겠느냐고 그녀는 물었지만, 스 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나는 담담해져 있었다. 마음 이 빈틈없이 얼어붙어 감정적인 아픔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 어 있는 것 같았다. “라몽은 찾으셨나요?” “아, 지금...... 전화로는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아요. 만나서 얘기 해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어디서 만나죠?” “혹시 운청동에 아시는 데 있나요?” 기다렸다는 듯 그녀는 물었다. “운청동......” 라몽을 두번째 만나던 금요일 오후, <트루 로맨스>를 보러 갔던 운청동이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영화를 보고나서 피자와 생 맥주를 먹고 마시던 <우드스톡>이라는 레스토랑이 퍼뜩 뇌리에 떠오 른 때문이었다. 5월, 훈훈한 봄밤의 열기와 신선한 감정이 눈을 뜨던 그때가 왠지 모르게 한세월 저쪽의 일처럼 까마득하게 여겨졌다. “거기, 아시는 데 없나요?” “기억나는 곳은 우드스톡밖에 없네요.” 그곳을 양희진과의 약속 장소로 정하는 게 선뜻 뼜걍測� 않았지만, 확실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곳이 그곳뿐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 “우드스톡...... 아, 극장 앞에 있는 이층 레스토랑 말이죠?” “네, 거기 맞아요. 거기서 만나죠.” 수화기를 왼손으로 바꿔들며 나는 말했다. “근데, 지금 바로 나오실 수 있나요? 삼십분쯤 뒤에 만났으면 좋겠 는데......” “바로요?...... 아무리 빨라도 거기까지 가려면 사오십분 정도는 걸리 겠는데요. 외출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질 않거든요.” 그 시간까지 나는 양치질도 세수도 면도도 하질 않고 샤워 를 하며 모든 걸 한꺼번에 해치운다 해도 삼십분만에 운청동까지 간 다는 건 어차피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그럼 네 시에 우드스톡에서 만나요.” “네 시.” 약속을 정하고 나서 마악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는데 잠깐만요, 하고 그녀가 다시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굽혔던 다시 허리를 세우자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가 이렇게 덧붙였다. “혹시 그 사이에 몽이가 돌아오거나 연락이 오더라도 나랑 만나는 건 절대 비밀이예요. 아셨죠?” 소제목 : 노란 비옷, 빨간 루즈 내가 <우드스톡>에 당도한 건 오후 4시 10분 경이었다. 토요일 오 후라서 시내의 교통 체증은 최악의 상태에 이르러 있었고, 운청동으 로 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30분 이상의 시간을 소모하고 말았다. 서 둘러 샤워를 하고 미처 머리가 마르기도 전에 밖으로 나섰지만, 예비 했던 모든 시간을 고스란히 길에서 날려버린 셈이었다. 양희진은 <우드스톡>의 일층 창유리 옆에 앉아 있었다. 빈틈없이 몸에 달라붙는 흰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어서가 아니라, 지난번과 달리 아주 짧은 숏 커트로 머리 모양새가 달라져 있어서 긴가민가 하 는 눈빛으로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인 직후, 비로소 나는 그녀가 앉아 있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겨놓을 수 있었다. “뭐 드실래요?” 가벼운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나서 그녀는 물었다. “그건 뭐죠?” 얼음과 레몬, 그리고 투명한 액체가 담긴 그녀 앞의 잔을 내려다보 며 나는 물었다. “이거, 진토닉이예요. 이걸로 하실래요?” 상체를 약간 앞으로 내밀며 그녀가 물었다. “그러죠. 저도 그걸로 할게요.” 대답을 하고 나서 나는 비 내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레스토 랑 앞, 커다란 플라타너스 밑에 노란 비옷을 입은 여자가 혼자 서 있 었다. 갓스물쯤 되어 보이는 얼굴, 붉은 루즈, 노란 비옷이 한데 어울 려 묘한 파격을 조성하는 것 같았다. 비 오는 날의 풍경과 동떨어져 저 혼자 화려한 고립을 즐기는 듯한 모습. “여기 오는 동안 무슨 생각 했어요?” 진토닉이 날라져 온 뒤에 그녀가 물었다. “특별하게 생각한 거 없어요.” 진토닉 잔을 들어올리며 담담한 어조로 나는 대답했다. “ 뺐� 무엇 때문에 오류씨 만나자고 했는지, 그것도 궁금하지 않았 나요?” 다소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물었다. “섣부른 상상이 마음만 힘들게 하니까요.” 대답을 하고나서 나는 진토닉을 한 모금 마셨다. “섣부른 상상이라구요?” “알고 있는 게 별로 없으니까 상상을 해봤자 끈구름 잡는 식이죠. 난 그저 라몽이 지금 어디 있는지, 그리고 어제는 무슨 일로 집에 들 어오지 않았는지...... 그런 게 궁금할 뿐이예요. 그런 부분에 대해 아 는 게 별로 없으니까 상상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다시 한 모금의 진토닉을 마시고 나서 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란 비옷, 빨간 루즈, 여전히 플라타너스 밑에 서 있었다. 소제목 : 제가 오류씨를 유혹한다면 “그럼 라몽이 어젯밤 다른 남자와 함께 있었을 거라는 상상은 전혀 안해 봤나요?” 질문을 던지고 나서 그녀는 의도적인 것처럼 나의 눈길을 피했다. 자신의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모로 약간 고개를 돌린 채 불을 붙였다. “절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뭐죠?” 냉랭한 목소리로 나는 물었다. “지금 제가 오류씨를 유혹한다면, 그럼 거기에 응해 줄 수 있나요? ” 눈을 가늘게 뜨고, 아주 조금씩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그녀는 나를 보았다. “......” 도대체 ソ� 말을 하려는 것인가, 사뭇 긴장된 눈빛으로 그녀를 보 다가 나는 남겨진 진토닉을 한꺼번에 마셔버렸다. “왜 대답을 못하죠? 라몽을 사랑하지 않나요?”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라몽을 사랑하는 것과 이런 말장난이 도대체 무슨 상관 있 죠? 더군다나 희진씨는 라몽의 학원 선배잖아요.” “선배...... 아주 제때에 좋은 말이 나왔군요. 그래요, 난 선배고 몽이 는 후배죠. 그런 식으로 말을 하자면...... 그 기집애는 선후배를 떠나 서 정말 인간도 아녜요. 자기한테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선배고 사랑 이고, 그런 거 다 필요없다고 생각한단 말예요. 아시겠어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고 나서 그녀는 남겨진 진토닉을 단숨에 마 셔버렸다. 탁, 소리나게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이내 다시 한 대의 담배를 피워물었고,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뚫어져라 나를 노려보았 다. “무슨 말인지, 좀 차근차근 얘기해 주면 안되나요?” 웨이터에게 다시 두 잔의 진토닉을 주문하고 나서, 의도적으로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녀의 감정적 난기 류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는 각성의 기운, 그런 게 온몸을 서늘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였다. “난 정말...... 몽이가 그런 애일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어 요. 아니 어쩌면, 이건 몽이의 잘못이 아닐지도 몰라요. 그 나쁜자 식......” 누구를 나쁜자식이라고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혹시, 티모시 기획...... 윤인준이라는 사람 말하는 거 아닌가요?” 내 스스로 단정을 하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런 말이 그렇 게 쉽사리 입밖으로 밀려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럼, 오류씨는 알고 있었나요?” 표정을 바꾸고, 사뭇 놀란 눈빛으로 그녀가 나를 보았다. 소제목 : 윤인준과 함께 있는 라몽 "희진씨가 그 사람과 결혼할 거라는 얘기...... 얼마 전에 들었어요. 그 리고 어제 라몽을 호출했던 사람도 그 사람이었고...... 하지만 그 이상 의 일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윤인준이라는 사 람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티모시 기획이라는 곳이 어디에 있는 지도 몰라요." 말을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모시 기획......"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고 나서 그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에 이스 오브 베이스가 흘러나오는 실내, 사람이 많 팁�서인지 소음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묘하게 일그러지는 표정 으로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윤인준이라는 사람, 그리고 티모시 기획이 어떤 곳인지 아세요?" "......" "티모시기획은 별도의 사무실이 있는 곳도 아니예요. <시티라인>이라 는 카페를 사무실 겸해서 쓰고 있고, 윤인준이라는 사람은 거기 주인 이예요. 자기 말로는 피디생활을 했다고 하지만...... 그것도 확인 해보 지 않았으니 믿을 수가 없어요."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진토닉을 한 모금 마셨다.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군요. 그렇게 믿을 수 없는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는 거야 희진씨 일이니까 그렇다쳐도...... 그럼 라몽을 그런 곳에다 소개시켜준 이유는 도대체 뭐요?" "이유요?" 다소 놀라는 표정으로 그녀는 나를 보았다. "선배라면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 거아닌가요?" "아뇨, 그건 오류씨가 잘 몰라서 그런 거예요. 윤인준을 만난 건 내 잘못이지만, 그런 곳에라도 적을 두고 싶다고 애원을 한 건 라몽이었 다구요. 이 방면으로 크고 싶어하는 애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 람처럼 항상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한다는 거 모르시는가 보죠?" "그러니까 결론은......" 온몽이 자꾸 밑으로 가라앉는 것 같아 나는 진토닝을 반쯤 마셔따. 잠시 고개를 숙이고 호흡을 가다듬은 뒤, 비장한 각오를 한 사람처럼 싸늘한 목소리로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라몽이 자기 욕망 때문에 윤인준이라는 사람을 유혹했다 그건가요?" 나와 함께 푸들을 사던 라몽과 윤인준과 함께 있는 라몽을 동시에 떠올리자 온몸이 저려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소제목 : 이젠 다 끝난 일이예요 “몽이가 유혹했다고 말한 적 없어요. 윤인준 그 인간이 먼저...... 아 마 그랬을 거예요. 어제 오후에 갑자기 나에게 전화해서 부산 출장을 가야한다고 했는데...... 아까 카페에 들러 알아봤더니 몽이가 오자마자 곧바로 함께 나갔다는 거예요.” “함께 나갔다는 것만 알지 그 이후의 일은 희진씨도 모르는 셈이네 요.” 감정과 전혀 다른 말이 입밖으로 흘러나가고 있었다. 내 스스로 생 각하기에도 내가 도대체 무엇에다 아직 희망을 걸고 있는 건지 모르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건 몰 捉� 윤인준이란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는 분명히 알아 요. 지금, 그 이상 알아야 할 게 뭐가 더 있죠?” “그런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고 한 이유가 뭐죠?” 지극히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나는 물었다. “이유요?...... 이유야 오직 한 가지뿐이죠. 그런 인간이라도 필요했 으니까요.” “필요?” “그만둬요. 이젠 다 끝난 일이예요. 그런 인간에게 한 가닥 기대를 걸었던 내가 멍청한 거니까 누굴 탓할 필요도 없어요. 그 인간, 나에 게 접근할 때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아마 몽이를 꼬드겼을 거예 요. 내가 널 키워보겠다, 나에게 모든 걸 맡겨라......” “그런 식으로 꼬드기면 맥없이 허물어지는 게 스타지망생 들인가 요?” 비아냥거리듯 나는 물었다. “오류씨가 나나 몽이 입장이 되지 않는 한 그런 건 이해하기 힘들 거예요. 반드시 지망생들의 문제가 아니라 이 판의 구조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는 걸 어쩌겠어요. 돈이 있거나 든든한 줄이 있거나...... 그도저도 없으면 때마다 몸 주고 마음 줄 수 있는 용기라도 있어야죠. 무슨 뾰 족한 수가 있나요?” 있으면 말해 보라는 표정으로 그녀는 나를 보았다. “뾰족한 수는 없다고 해도, 그런 게 뾰족한 수라는 생각은 들지 않 는군요. 세상 사람들은 스타라고 말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그런 것 의 주체는 없어요. 다만 자신이 스타라고 믿는 자기 환상의 노예가 있고, 더 많게는 스타가 되겠다는 환상의 추종자들이 있을 뿐이죠. 남 는 게 뭐죠? 허망한 환상에 시달리다 지치고 망가져버린 인생들...... 아마 그런 게 남겠죠.” 말을 하고 나서 나는 창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로 간 것일까.플 라타너스 밑에 있던 노란 澍�, 빨간 루즈가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런 실체는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곳이 휑뎅그렁하게 비어 있었다. 소제목 : 나몽이 아니고 알리마바 “그만 가 볼게요.” 힘없이 말하고나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몽롱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그녀, 사뭇 긴장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마악 등을 돌리려 할 때, 잊고 있던 말을 갑작스럽게 떠올린 사람처럼 다 급한 목소리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우리, 어디 가서 술 한잔 더하지 않을래요?”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의식에 굳은 각질이 생겨나기 라도 한 듯, 깊은 몽몽함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작 은 실개천이 강과 대양으로 흘러가는 기나긴 ㈐ㅓ낮�, 내 의식의 흐 름을 내 뜻대로 다스리기에 나는 지나치게 무기력해져 있었다. 의식 하지 않아도 이미 뭔가가 나를 떠밀거나 이끌고 가는 듯한 막연한 느 낌, 그런 것에 온몸을 맡기고 있는 게 차라리 안온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혼자야, 어차피, 산다는 것.” 몇 개의 호프집과 소주방을 눈여겨보다가 그대로 지나치며 나는 그 렇게 중얼거렸다. 편의점에서 소주 두 병과 우유 하나를 사고 나와 잠시, 젖은 도로를 잘주하는 차량의 행렬을 바라보았고, 문득 생각난 것처럼 건너편의 빌딩들을 올려다보았다. 가속력과 수직상승의 세계. 수직 하강의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와 나는 푸들에게 드라이 푸드 와 우유를 주었다. 몇 시간 동안 혼자 있어서였는지, 나갈 때와 달리 무척이나 나를 반기는 기색이었다. 정신없이 먹이를 먹는 놈을 내려 다보다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손을 들어 이마를 짚고 서 있다가, 이윽고 결정을 내린 뒤에 나는 가만히 푸들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됐어.” 손을 들어 등을 쓰다듬자, 먹이를 먹다말 � 위아래로 연신 머리를 돌리며 놈이 나의 손등과 바닥을 핥아댔다. “나몽이라는 이름,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에겐 어울리지 않아.” 앞으로 흘러내린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고 나서 나는 다시 놈의 등을 쓰다듬었다. 진정한 사랑, 진실한 사랑...... 수세기 저쪽의 전설처럼 <트루 로맨스>의 한 장면 한 장면이 잔잔하게 뇌리를 스쳐 갔다. 가슴 속에 거대한 빙벽이 일어서는 걸 느끼며, 지극히 낮은 목 소리로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나몽이 아니고 알라바마야, 알라바마.” 소제목 : 아무것도 묻지 알고... 날 가져 라몽이 집으로 돌아온 건 밤 열시가 지나서였다.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어둠 속에 앉아서 나는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복사해 준 열 쇠로 혼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그녀, 한참동안 장승처럼 현관의 어둠 속에 서 있다가 조심스럽게 실내의 한가운데로 걸어들어왔다. “불 켜지 말까?” 실내의 한복판에 우뚝 선 채 대단히 조심스런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 다. “켜지 마.” 담담한 목소리로 나는 대답했다. “류......” “......” 말없이, 바닥에 내려놓았던 소주잔을 榕� 나는 단숨에 비워냈다. 무 엇인가를 말하려던 그녀, 체념한 듯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 렸다. 불을 밝히지 않고, 그녀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지 않을 수 있 다는 게 나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오분쯤 지났을까. 그녀가 다시 자신의 방에서 걸어나왔다. 무슨 일인가, 소파 앞의 어 둠 속에 앉아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오른손 에 희끄무레한 무엇인가가 들려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그것을 펼칠 때, 비로소 나는 그것이 옥양목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쨍痔�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나는 소주병을 병째 들어올렸다. 바닥에다 옥양목을 깐 뒤에 그녀는 어둠 속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 다. 지나치게 차분해서 오히려 체념적으로 여겨지는 그녀의 동작 하 나하나를 올려다보며 나는 소주병을 입에 물었다. 어둠에 돋을새겨지 는 희붐한 알몸을 올려다보며 꿀꺽꿀꺽, 다급하게 나는 두어 모금의 소주를 마셨다. “류......” 옥양목 위에 반듯하게 눕고나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 소주병을 바닥에 내려놓고 나서 1미터도 되지 않을 거리, 양감을 느 끼게 하는 그녀의 알몸 쪽으로 나는 고개를 돌렸다. “류, 지금 무슨 말 하고 싶어하고 무슨 생각하는지 다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아무것도 묻지 말아줘. 그냥......” 그녀의 말끝에 울음이 배어나고 있었다. 애써 자제하려는 듯, 숨을 한껏 깊이 들이마셨다가 가까스로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날 가져.”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녀의 말이 순간적으로 나의 명치끝을 저리게 했다. 하나의 균열이 거대한 빙벽을 분해하고, 그것이 넘어지며 둔중 하게 지상을 두들기는 것 같았다. 소제목 : 라몽, 우리 이제 그만 끝내자 그녀는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어금니를 악다물고 나는 시간의 흐름을 견디기 시작했다. 사랑의 이름으로 내가 널 소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너의 온전한 이미지일 뿐이고, 사랑의 이름으로 내가 널 소유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순간적인 욕망일 뿐이라고 나는 속으로 절규했 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지막 사랑. 어쩌면 그것의 이미지를 그녀와 나는 사랑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랑의 대상을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이미지에 갇혀서 안 쓰럽게 허덕거린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랑한다는 믿음에 갇히면 그것의 이미지마저 빛을 잃고, 이윽고 남게 되는 게 남루한 욕망의 잔해뿐이라는 걸 어찌 그녀와 내가 알 수 있었으랴. 내가 라몽의 이미지에서 시를 꿈꾸었다면, 그녀는 나의 이미지에서 자신의 결핍감을 메우려 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에 대한 나의 욕망이 스타에 대한 그녀의 욕망을 원망하고, 스타에 대한 그녀의 욕 망이 시에 대한 나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어차피 욕망으로 서 로를 괴롭히긴 피차일반이었을 것이다. 수직과 수평의 접점을 사랑으 로 이해했던 것 자체가 과오가 아니었을까. 뿌리 없어 오래도록 햇발 아래 목을 늘이다가 바작바작 메말라가는 영혼에 몇 방울 여름비 스며드는 날 옷을 벗었네 수직으로 수직으로 불꽃나무처럼 타오르는 그대 나, 하나의 점으로라도 뿌리에 닿아 있기 위해 밤이 되어 그대 곁에 그대 곁에 주검처럼 라몽이 처음으로 옥양목 위에 누워 있던 밤, 나도 모르게 온몸을 달 아오르게 하던 시적 감흥이 묵연하게 되살아났다. 그날밤과는 판이하 게, 거의 모든 것이 깊은 의구심으로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오 늘밤처럼 그날밤에도 수직으로 쏟아져 수평의 대지를 적시던 비, 그 것이 그녀와 나의 접점으로 흘러들어 과연 굳은 토양을 부드럽게 했 던 것일까. 부드러운 흙을 열고 올라와 꽃 피고 열매 맺고 또다시 자 연으로 순환하는 무한궤도의 섭리처럼, 탐욕도 아니고 집착도 아닌 마음으로 여전히 나는 그녀의 접점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는 걸까. 옥양목 위에 반듯하게 누워 그녀가 소리죽여 울고 있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뜨거운 피를 이기지 못해 싸늘한 설원에 누워 있다고 해도, 그녀의 눈 걀� 내 뿌리가 젖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 며 나는 더욱 굳게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5월의 부신 햇살이 눈앞을 스쳐가면 두눈을 질끈 감고, 그녀의 경쾌한 동작과 해맑은 표정이 떠 오르면 세차게 머리를 뒤흔들었다. 사랑의 이름으로 이제 더이상, 네 가 아니라 나를 배신할 용기가 없다는 걸 너는 알까. 양손으로 머리 를 감싸고, 씹고 있던 독초를 뱉아내듯 갑작스럽게 나는 입을 열었다. “라몽, 우리 이제 그만 끝내자.” 소제목 : 내가 이길 수 없는 어떤 힘 11시 20분. 택시에서 내려 나는 성좌동 편의점 앞으로 걸어갔다. 가늘지만 몇 시간째 계속 내리는 비 때문인지 주변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편의 점 앞에 서서 나는 낙원장으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를 건너다보았다. 골목 안쪽에서 밀려나오는 보안등 불빛의 조명권 안에서 빗줄기가 가 늘게 너울거리고 있었다. 한동안 골목 어귀를 응시하고 서 있다가 등을 돌렸다. 밝은 불빛이 밀려나오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작은 위스키 한 병을 샀다. 陋痼� 주머니에 넣고 다시 밖으로 나와 플라타너스 밑으로 갔다. 무슨 심정 으로 또다시 이짓을 되풀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에 절로 한숨이 밀려나왔다. 내가 이길 수 없는 어떤 힘. 날이면 날마다 나를 이끌고 다니는 끈덕진 관성을 생각하며 나는 주 머니에서 술병을 꺼내 들었다. 마개를 열고 두어 모금을 마시고나서 세차게 머리를 뒤흔들었다. 참담한 감정의 그늘에서 묘한 기대감의 불씨가 눈을 뜨기 시작했다. 되풀이되는 체념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밤마다 되살아나는 이 집요한 기대감__ 내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이 기지 못해 나는 다시 한번 머리를 뒤흔들었다. 여관에서 사는 여자. 문득 라몽방에 초대되던 봄날, <트루 로맨스>를 보고나서 낙원장으 로 가던 그날밤이 되살아났다. [베티 블루], [프리티 우먼], [크라잉 게 임], [늑대와 춤을], [그대 안의 블루], [비오는 날의 수채화] 같은 영 화 포스터들과 아네트 베닝, 위노나 라이더, 이자벨 아자니, 킴 베신 저, 조디 포스터, 강수연 등의 여배우 사진들이 붙어 있던 스물 셋, 생기발랄하던 스타 지망생의 방. 은백양 잎새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아침 이슬처럼, 굵은 눈물 방울이 왼뺨을 타고 빠르게 흘러내리던 그 날밤의 라몽은 어디로 갔는가. __ 왜, 내가 여관에 사니까 아무 남자나 막 불러들이는 거 같애? 그 래서 기분 나빠진 거야? 이제 겨우 두 번 만났는데...... 근데 여관으로 오자고 했다고? 가고 싶으면 아무때나 부담없이 돌아가. 난, 류에 게...... 정말 이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의 전부라고 생각했어. 그것 뿐이야. 술병을 들어올려 다시 한 모금의 술을 마셨다. __ 난 반드시 내가 원하는 무엇인가가 될 거야. 다시 한 모금의 술. __ 내가 나라는 거...... 내가 누구인지를 세상 사람 모두에게 확인시 켜 주고 싶어. 술병에 남겨진 술을 마저 마시고 나서 부르르, 나는 격하게 진저리 를 쳐댔다. 소제목 : 짧은 사랑, 긴 침묵 낙원장. 비에 젖는 여관의 아크릴 간판을 노려보다가 나는 천천히 길을 건너 기 시작했다. 술기운이 독처럼 온몸으로 번져나가 깊은 체념을 일깨 우고 역한 분노를 부추기는 것 같았다. 라몽이 나와의 생활을 청산하 고 다시 낙원장으로 돌아간 직후부터 근 두 달 동안, 거의 날마다 나 는 감정의 지옥을 헤매고 있었다. 혼자인 상태를 그토록 오래 견뎌왔 건만, 어째서 그녀와의 짧았던 시간이 그토록 극심한 후유증을 몰고 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짧은 사랑, 긴 침묵. 라몽과 나의 생활은 그렇게 허망하게, 참으로 한여름밤의 꿈처럼 막 을 내렸다. 하룻밤 외박을 하고 돌아온 다음날 오전, 그녀는 말없이 자신의 짐을 챙겨 다시 낙원장으로 돌아갔다. 그날밤, 옥양목 위에서 아무것도 묻지 말고 자신을 가지라고 말하던 그녀에게 싸늘한 음성으 로 내가 건넨 그 한 마디 말 때문이었을까. __라몽, 우리 이제 그만 끝내자. 짐을 꾸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가슴 한구석이 괴사를 일으키는 듯한 고통을 느꼈지만, 나를 통제하는 또 하나의 나로 인해 묵시적인 눈빛 이외에 다른 아무런 말도 나는 더이상 瀆邦막� 꺼낼 수가 없었다.느 리고 힘없는 동작으로 자신의 가방에다 짐을 쑤셔넣는 그녀의 참담한 표정을 보면서도 끝끝내 악다문 어금니를 풀 수 없었던 것이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내가 저열한 질투의 감정에 포박돼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나는 얼핏 했었다. 그녀가 윤인준이라는 작자와, 그것도 양희경 식의 표현대로라면 스타가 되겠다는 욕망 때문에 동침을 하고 돌아온 것이라고 나는 단정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 이 사실이 아닐 거라는 믿음을 나는 가 � 수 없었고, 어찌된 셈인지 그녀 자신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끝끝내 언급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 던 것이다. __ 오늘밤...... 날 가져. 외박을 하고 돌아온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한 마디의 말은 오 래도록 나의 뇌리에 남아 나를 괴롭혔다. 그녀가 무슨 이유 때문에 그 말을 입밖으로 꺼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에서 내가 느낀 건 체념과 자포의 감정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다. 요컨대 그녀 에 대한 나의 감정을 결정적으로 저버리고 배신하는 말로 나는 그것 을 받아들였던 것이 �. 젊음이 함께 밤을 보낼 때. 그녀와 함께 했던 적잖은 시간 동안, 아주 여러번 나는 솟구치는 욕 정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견딘다는 게 대단한 일이라서 가 아니라, 그녀가 원치 않는 일을 다만 나는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 었다. <사랑의 이름으로 내가 널 소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이 미지일 뿐이고, 사랑의 이름으로 내가 널 소유할 수 없다면 그것은 순간적인 욕망일 뿐이다>라는 나의 절규는 그리하여 라몽이 낙원장 으로 돌아가고 난 뒤에도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었다. 소제목 : 감정의 지옥 낙원장, 라몽방 근처. 술병을 손에 들고, 느리면서도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나는 낙원장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취기 속에서도 팽팽한 긴장감과 떨쳐버리기 힘 든 기대감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가슴이 설레고 나도 모르게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라몽이 내 감정의 지옥이 되었다 해도, 그 래도 나는 그녀가 있는 곳으로 또다시 다가가고 있는 것이었다. 질 고운 잠사(蠶絲) 처럼 흩날리는 부드러운 가을비, 시간은 어느덧 자정 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낙원장 앞에 이를 때까지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근거를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초조감 때문이었다. 여관 입구의 불빛, 그 바깥쪽에서 걸음을 멈추고 아주 천천히 나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녀가 사는 201호, 이층 맨 끝방에는 여전히 불빛이 들어와 있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여관 앞쪽의 축대에다 나는 쓰러지듯 등을 기댔다. 며칠째인가. 다시 한번 그녀의 불꺼진 방을 올려다보며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술 병을 입에 물었다. 감정의 지옥에서 거센 불기둥이 살아오르기 시작 했다. 그녀가 일찍 들어와 불을 끄고 잠에 빠진 게 아니라, 며칠째 계 속해서 거처로 돌아오고 있지 않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낙원장으로 돌아간 이후, 근 두 달 동안 나는 밤이면 밤마다 어김없 이 이 골목을 찾아오곤 했었다. 감정의 근거? 밤마다 낙원장 근처로 발길을 돌리는 내 감정의 근거를 내 자신에게 조차도 나는 설명할 수 없었다. 거의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만나 지는 않는다 해도, 그녀가 거처하는 곳의 불빛이라도 보고싶다는 심 정 이외에 확인할 수 있는 건 다른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나도 모르 게 그렇게 되어지고, 그것을 이길 만한 여력이 나에겐 털끝만큼도 남 아 있질 않았던 것이다. 불꺼진 라몽방을 확인할 때마다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의 기운에 휩 싸여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분노인지 체념인지 혐오감인 지 자괴감인지,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낙원장으로 돌아가 고 난 직후부터 나는 그녀의 불 꺼진 방을 자주 목격하기 시작했다. 길 건너편에 서서, 새벽 네 시가 넘을 때까지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 기 위해 밤을 지샌 적도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꼬박 뜬눈으로 시간을 보내고, 아침이 퓽美뗌� 서둘러 여관으로 전화를 걸어보기도 했었다. __ 201호? 안 들어왔어요. 지난 두 달 동안, 그녀의 방에 불이 밝혀져 있는 걸 내가 확인한 건 불과 몇 번밖에 되질 않았다. 그녀의 생활이 극심하게 변하고 있다는 것보다, 그녀가 자기 삶을 거의 체념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 도였다. 스타가 되는 길과 어둠으로 뒤덮힌 시간, 그게 도대체 무슨 상관 관계가 있길래 그녀는 밤의로의 긴 여로를 멈추지 않는 것일까. 소제목 : 사람이 아니라 사랑 내가 집으로 돌아온 건 새벽 1시가 거의 다 되어서였다. 지칠대로 지친 몸으 로 집으로 들어서자 알라바마가 달려와 발목에다 머리를 비벼대며 정신없이 반가워했다. 놈을 번쩍 들어올려 가슴에 품고나서 나는 실내의 전원 스위치를 내렸다. 친근한 어둠. 라몽이 방관동을 떠난 이후, 그녀로 인해 마음 심란해지는 밤마다 어둠의 일 부처럼 나는 어둠 속에서 고적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둠 속에 쪼그리고 앉 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벽에 등을 기댄 채, 어둠의 깊은 속살로 소리없이 잦아들어가곤 한 것이었다. 라몽이 떠난 이 �, 빛의 세계로부터 한없이 멀어 지는 듯한 방관동__ 어쩌면 내 스스로 빛을 거부하는 심정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알라바마를 품에 안은 채 나는 소파에 누웠다. 한손으로 머리와 등을 쓰다듬 어주자 기다렸다는 듯 놈이 내 손과 목과 뺨을 핥아대기 시작했다. 라몽이 푸 들을 데려가지 않는 걸 떠날 때는 의아해했지만, 이제 나에게 알라바마는 유 일무이한 말동무이자 위안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내가 먼저 말을 건네고, 알 라바마의 말을 내가 생각해내는 기이한 소통방식에 아주 익숙해져버린 것이었 다. “혼자 있어서 심심했어?” __ 정말, 짜증나서 혼났어. 기다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해? “너를 기다리게 만드는 나도 힘들어.” __ 도대체 어디서 뭘하고 오는 거지? “여기저기..... 잘 기억이 나질 않아. 어쩌면 너를 찾아 다녔는지도 몰라.” __ 내가 여기 있는데, 어디서 날 찾아? “난, 네가 라몽인지 나몽인지 알라바마인지...... 그걸 구분하지 못할 때가 많아.” __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거야? “아니, 이건 내 문제야. 도대체 널 통해서 내가 뭘 찾으려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단 말야.” __ 류가 찾고 싶어하는 건 라몽도 아니고 나몽도 아니고 또한 알라바마도 아 닐 거야. 아니기 때문에 마음의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야. “그럼, 내가 찾으려 하는 게 도대체 뭐지?” __ 알아도 소용 없을 거야. “마음의 길을 잃고, 날이면 날마다 이렇게 지친 몸으로 돌아와 쓰러지는 것 도 이젠 지긋지긋해. 하지만 나를 몰고다니는 힘을 나는 이길 수가 없어. 도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견뎌야 하는 거지?” __ 그건 나도 몰라. 다만...... “다만 뭐?” __ 찾고자 하는 것도 견디는 것도, 류의 뜻대로는 되지 않을 거라는 것뿐이 야. “내가 찾고자 하는 게 뭔지, 그걸 말해 달라니까!” __ 류는 지금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찾고 있는 거야. 사람이 아니라 사랑.. .... 진실한 사랑. 소제목 : 제발 따라오지 마 라몽이 방관동을 떠나고 삼일이 지난 뒤, 거의 감정적인 기류에 휩싸인 채 나는 알라바마를 데리고 강변으로 나간 적이 있었다. 라몽의 이미지를 잊기 위해 의도적으로 알라바마라는 이름까지 붙였지만, 라몽이 선택한 푸들에게서 그녀의 이미지를 씻어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슨 방법이 있는가. 경원의 분빛으로 알라바마를 노려보다가 갑작스럽게 내린 결론 한 가지, 그 게 놈을 내다버리자는 것이었다. 알라바마가 내 눈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라 몽의 이미지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 같다는 극심한 위기 � 때문이었 다. 마음의 지옥을 스스로 다스릴 수 없을 때, 그때 인간은 제물을 떠올리게 되는 걸까. 목줄에 매인 알라바마를 데리고 나는 정신없이 밤의 강변으로 나갔다. 철교 밑, 공터와 계단이 있는 장소였다. 어둠 속에 서서 한동안 놈을 내려다보았 지만 아무런 마음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동안 낮선 주변을 두리번거 리던 놈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 조만간에 어둠 속에 버려질 것임에도 나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싸늘한 냉각의 시간. 눈을 감고 나는 손에 쥐었던 쇠줄을 놓았다. 철럭, 쇠줄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은 채 등을 돌렸다. 눈을 감은 채 걸음을 옮기 고, 눈을 감은 채 길을 더듬었다. 계단 앞에 이르러 눈을 떴지만, 단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나는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따라오지 마, 제발 따라오지 마. 마음 속으로 되뇌이며 계단을 다 올라가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뒤를 돌아보 았다. 나를 따라오던 놈이 높이 때문에 한 계단도 위로 올라서지 못하고 주변 을 맴돌며 낑낑거리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내가 뒤돌아보자 희붐한 수은 등빛 속에서 더욱 심하 � 몸을 흔들어댔다. 등을 돌리고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푸들에게 행운이 있다 면 나 아닌 다른 주인 만나 잘 살게 될 거라고, 푸들이 아니라 내 자신을 위 로하며 걸었다. 라몽도 푸들도 그렇게 될 거라고, 그렇게 되길 빈다고, 그렇 게 되어야 한다고, 모든 것을 방기하는 심정으로 어금니 악다물고 끝끝내 뒤 돌아보지 않은 것이었다. 둑을 벗어나 가까스로 인도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 문득 강 건너편을 돌아보았다.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전동차 한 대가 이제 마악 철교 로 접어들고 있었다. 욕망의 상징처럼 힘차게 달려오는 전동차를 보며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견딜 수 없는 분노가 온몸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욕망과 힘 , 가속력과 관성을 향해 내 자신이 하나의 벽이 되고싶다는 충동으로 치를 떨 지 않을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달려오는 전동차를 향해 정면으로 맞부딪 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정말 끔찍스런 자폭욕구였다. 아. 호흡을 멈추고 있다가 나는 순간적으로 등을 돌렸다. 격렬한 자폭의 욕구 속 에서 느닷없이 견딜 수 없는 사 岵� 감정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등을 돌리고 정신없이 오던 길을 되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두 칸 세 칸, 겅중겅중 계단을 뛰어내려가자 혼자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푸들이 미친 듯이 내쪽으로 달려왔 다. 어금니를 악다물며, 달려오는 탄력을 그대로 받아들여 나는 으스러져라 놈을 끌어 안았다. 소제목 : 회환과 안타까움과 절규 비 내리는 밤. 알라바마를 거실 바닥에 내려놓고 나는 눈을 감았다. 감정의 지옥, 타오르는 고통의 불길, 주체할 길 없는 회한의 노도가 여전히 감정의 지옥을 형성하고 있었다. 애써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시 한번만, 정말 다시 한번만,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다시 한번만 나에게 기회가 주어 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서였다. 얄팍한 욕망이 아니라 진실의 이름으로, 내가 라몽에게 참다운 의미를 지닌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 다는 마음의 외침에 그것은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으리라. 진실한 사랑이 뭔지 알기나 해? 참으로 몰랐기 때문에, 이제 나는 모든 것에 대해 용기 있는 대답을 하고 싶었다. 진실로 라몽을 사랑했었던 게 아니라, 어쩌면 내 자신을 집요하게 사랑했었는지도 모른다는 회오의 감정__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내 모든 걸 그녀에게 주고, 그녀의 모든 걸 넉넉하게 감싸안 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토록 그녀를 사랑했으면서도 어찌 그리 표 현이 인색하고 서툴렀었는지, 모든 게 후회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라몽......” 길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아주 천천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 시 움직임을 멈추고 있다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다 이마를 갖다댔다. “라몽......” 그녀를 부름에 내 모든 회한과 안타까움과 절규가 스며 있었다. 세 상에 태어나 그녀만큼 절실하게 사랑해 본 사람이 일찍이 없었음을 비로소 깨우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라몽......” 그녀만큼 사랑스럽고, 그녀만큼 내 가슴을 움직이고, 그녀만큼 내 영 혼에 깊이 아로새겨진 사람이 누구였던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나 는 옆으로 나동 溜竄낫�. 크흐, 나도 모르게 입에서 탄식이 밀려나오 고 눈두덩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라몽......” 쥐어짜듯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비 내리는 밤, 그녀도 어디에 선가 나처럼 괴로워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쳐 갔다. 스타가 되겠다는 일념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픔을 주는 심정, 그 가슴도 또한 상처 받는다는 걸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류......” 호흡을 멈추고, 한껏 긴장된 표정으로 나는 눈을 떴다. 어디에선가 틀림없이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가늘고 희미하지만, 틀림없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였다. 수만 볼트의 고압전류가 찰나처럼 온몸 을 스쳐가는 것 같아 나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류......” 소제목 : 비 내리는 밤, 누가 날 부르는가 다시 한번 내 이름 부르는 소리를 듣고나서 나는 튀듯이 몸을 일으 켰다. 신음처럼 여리고 희미한 소리였지만, 그것은 환청이 아니고 현 실 속의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분명했다. 비 내리는 밤, 누가 날 부르는가. 벽에 부착된 전원 스위치를 올리고 나서 나는 재빨리 출입문 앞으로 다가갔다. 놀란 기색으로 알라바마도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누구세요?” 출입문을 향해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의 물음에도 불구하 고 밖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환청을 들은 건가, 순간적으로 다 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아 나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밖에 누가 있나요?” “류......” 밖에서 들려오는 여리고 희미한 소리, 그것이 라몽의 목소리라는 걸 나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너무 놀라워서, 그 순간의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닌 것 같아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비 내리는 밤, 라몽이 돌아온 건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나는 맨발로 현관 바닥으로 내려섰다. 출입문 손잡이의 잠금 장치를 풀고 보조 잠금 장치를 열려 할 때, 알라바마 도 따라서 현관 募愍막� 내려섰다. 세상의 모든 소리와 세상의 모든 풍경이 순식간에 소멸돼 백색 공간으로 돌변하는 것 같았다. “류!” 밖으로 나서는 순간, 출입문 옆쪽의 벽면에 붙어 있던 무엇인가가 한순간에 내쪽으로 무너져왔다. 라몽, 그녀가 가까스로 벽에 등을 기 대고 서 있다가 기다렸다는 듯 힘없이 중심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라몽!” 빈틈없이 비에 젖은 그녀를 가슴으로 싸안으며 기겁을 하듯 나는 소 리쳤다. 그녀에게서 역한 술냄새가 훅하니 끼쳐왔다. 여전히 현관에 선 채, 알라바마는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라몽과 나를 올려다보았다. 말똥말 똥한 그 눈빛, 라몽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을 선택해 주었으나, 하루만에 라몽이 방관동을 떠나버렸으니 알 라바마가 낯선 눈빛으로 라몽을 올려다보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닐 터였다. “류...... 류 맞아?” 축 늘어진 라몽, 내게 안겨 안쪽으로 들어서며 여전히 신음같은 소 리로 중얼거렸다. 소제목 : 아무도 미워하지 마, 류 “그래 맞아. 나 류야, 라몽.” 고개를 앞쪽으로 늘어뜨린 그녀를 나는 가까스로 소파가 있는 쪽으 로 부축해 갔다. “류...... 얼마나 내가 류를...... 사랑하는지 알아?” 부정확한 발음으로, 울음을 짓이겨 내뱉는 듯한 소리로 그녀는 중얼 거렸다. “알아, 라몽. 잘왔어, 정말 잘 돌아왔어.” 그녀를 소파에 눕히며 격한 감정으로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류...... 나 미워하면 안돼. 제발 나 미워하지 마. 난......” 일단 그녀를 가슴에서 떼어내 소파에다 앉혔다. 옆으로 눕히고 자시 고 할 것도 없이, 자리에 앉히자마자 그녀는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버 렸다. “그래, 알았어. 류는 라몽을 미워하지 않......” 이게 뭔가, 굽혔던 허리를 펴다 말고 나는 경악한 표정으로 말을 멈 췄다. 이 여자가 라몽이 맞는가, 벙그렇게 입을 벌리고 나는 몸을 떨 기 시작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류만큼 사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날 용 서할 순 없겠지만...... 류에 대한 나의 사랑은 진실했어. 류...... 트루 로맨스...... 생각나?” 푸르딩딩하게 멍들고 부어오른 얼굴, 굵은 눈물줄기가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좋았던 기억을 떠올릴 때처럼 울면서도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을 내려다보자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이고 눈두덩 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누가 그녀의 얼굴을 이렇게 잔인하게 짓이 겨놓았는가.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마, 라몽. 난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있어.” 어금니를 악다물고 나는 가까스로 그렇게 대답했다. 내 몸의 어느 곳에 그토록 격렬하고 잔혹한 살의가 내재돼 있었을까. 그녀를 그렇 게 만든 인간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살의로 치를 떨며 나는 그녀의 젖 은 가슴에다 얼굴을 묻어버렸다. “류......” 그녀가 손을 들어 나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나의 호흡이 점점더 거 칠어지고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인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도 미워하지 마, 류...... 모든 게...... 모든 게 다 내 잘못이야.”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녀는 띄엄띄엄 말했다. 멀리서 파도소리, 대양 을 가로질러오는 세찬 폭풍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가 깊은 잠에 빠지고 감미로운 꿈을 꾸는 동안, 어쩌면 가공할 맨� 해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묵연하게 뇌리를 스쳐갔다. 사랑의 이름 으로 절망을 잠재우고, 사랑의 이름으로 증오를 잠재울 수 있다는 말 __ 모든 것이 부질없는 말의 성찬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의 젖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나는 격하게 진저리를 쳐댔다. 그때, 잠잠하 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류...... 불 좀 꺼 줘. 눈이 아파.” 소제목 : 여전히 라몽인 그녀 무수한 갈가마귀떼가 지상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벌판에 홀로 서서, 아무런 마음의 동요도 느끼지 못한 채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갈 가마귀가 떼지어 곤두박질치는 주변, 자세히 보니 희미한 새벽 안개 속 에서 무수한 연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연꽃잎 마다에서 라몽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오르다 이내 지워져버렸다. 여기가 어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견딜 수 없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나는 앞으로 나아 가기 시작했다. 갈가마귀가 떼지어 추락한 곳에 갈가마귀는 없고, 해체된 형태로 자음과 모음이 나뒹굴 � 있었다. 제멋대로 들러붙어 때로는 문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해괴망측한 꼴이 되기도 했다. 시선을 집중하자 일정 한 배열을 이루며 행(行)이 되고 연(聯)이 되기도 했다. 시? 설마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나의 진행과 비례해서 언어의 배열지가 그만큼 멀어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주변의 안개는 더욱 짙어지고, 연꽃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뒤였다. 걸음을 더욱 빨리하자 언어의 배열이 다시 해체되어 제멋대로 나뒹굴기 시 작했다. 걸음을 더욱 빨리했지만 그곳과 나 사이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무리진 안개가 한차례 지나간 뒤, 이제는 해체된 자음과 모음마저도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것들이 널브러져 있던 자리에 누군가가 싸늘한 주검으로 길게 누워 있을 뿐이었다. 라몽! 주검을 향해 나는 미친 듯 내달리기 시작했다. 달려도 달려도 거리가 줄어들 지 않았지만, 라몽에게 이르고자 하는 내 마음에도 또한 변함이 없었다. 숨이 턱에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릴 무렵, 사라졌던 갈가마귀떼가 또다시 나 타났다. 지상으로 떨어져내리는 게 아니라, 라몽의 주검 위를 무서운 기세로 맴돌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 안돼! 선회하던 갈가마귀 중 한 마리가 지상을 향해 빠르게 비행하기 시작했다. 그 것을 신호로 나머지 갈가마귀떼가 일제히 라몽을 향해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한쪽 무릎이 꺾이고, 곧이어 나머지 한쪽이 꺾이며 나는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었다.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어올리자 거기, 끔찍스런 광경이 펼쳐지던 자리에 엄청나게 큰 연꽃 하나가 피어 있는 게 보였다. “아......”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에 배어난 진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손을 들어 라몽을 먼저 확인해 보았다. 거기, 소파 위 에 그녀는 분명히 있었다. 갈가마귀떼도 아니고, 해체된 자음과 모음도 아니 고, 시도 아니고, 연꽃도 아니고, 주검도 아닌 라몽__ 여전히 라몽인 그녀가 거기 누워 있었다. 소제목 : 검푸르게 부풀어 오른 얼굴 “으응...... 아니, 아니...... 아니야......” 몇 시나 됐는지, 일어나서 벽시계를 보려 할 때 라몽의 입에서 이상 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신음 같기도 하고 잠꼬대 같기도 해서, 잠시 동작을 멈추고 나는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새벽비 내리는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그녀의 얼굴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눈이 아프니까 불 을 꺼 달라던 그녀, 축축하게 젖어 있던 가슴에 엎드려 있던 내가 깜 빡 잠에 빠져버린 게 몇 시였을까. “라몽?”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다 입을 갖다대고 조심스럽게 나는 그녀를 불 러보았다. 응답 대신 가느다란 신음이 연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 고 있었다. 불길한 생각이 들어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아. 거의 반사적으로 나는 그녀의 이마에 갖다댔던 손을 뗐다. 이마가 불덩어리처럼 뜨거워서였다. 심호흡을 하고 나서 다시 한번 그녀의 이마에 손을 갖다댔다. 이마와 뺨, 목을 차례로 만져보았지만, 부위를 가릴 것 없이 거의 같은 상태로 그녀의 몸에는 고열이 올라 있었다. 젖은 옷을 입은 채 그대로 잠들어서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나는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소파 옆에 머물러 있었다. 아스피린, 해열제 따위의 상비약을 떠올리다가 문득 그녀의 옷을 먼저 갈아입혀야겠다는 결정 을 내렸다. 옷을 갈아입히고 나서 안방으로 옮기고, 아스피린이나 해 열제를 먹인 다음 두꺼운 이불을 덮어주리라. “라몽......”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리며 나는 다시 그녀를 불렀다. 아주 미세하 게 속으로 잦아드는 듯한 신음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이 나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그녀의 어깨 위 � 손을 얹고 가볍게 흔들어봤지만 역시 마찬가지,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어쩌나. 잠시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 다. 벽에 부착된 전원 스위치를 올리고 나서 안방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었다. 서랍을 열고 제법 두툼한 셔츠와 운동복 하의를 꺼내들고 다 시 거실로 나왔다. 라몽의 검푸르게 부풀어오른 얼굴이 밝은 빛 속에 더욱 처참한 형상으로 떠올라 2있었다. 비감스런 기분으로 잠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나는 소파 옆 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의 등밑으로 왼손을 밀어넣고 상체를 약 간 들어올렸다. 오른손을 움직여 헐렁한 감색 셔츠를 그녀의 머리 위 로 밀어올렸다. 그녀의 입에서 다시 한번 끄응, 하는 신음이 새어나왔 다. 소제목 : 죽이겠어 셔츠를 벗겨내자 곧바로 흰 브래지어가 드러났다. 그녀의 셔츠를 손 에 든 채 나는 그대로 맥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브래지어로 가 려진 젖가슴 주변으로도 푸르딩딩하게 멍이 떠올라 있었기 때문이었 다. 내가 모르는 어떤 인간의 주먹이 그녀의 가슴을 강타하는 게 곧 장 내 몸으로 느껴지는 것같아 나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라몽......” 벙그렇게 벌린 입으로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이 새어나왔다. 무자 비한 폭력에 제멋대로 나뒹구는 그녀의 몸뚱어리가 보이고, 그녀의 입에서 밀려나오는 비명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 같아 나는 귀를 막고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 죽이겠어...... ”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어금니를 악다물고 나는 고 개를 들어올렸다. 그녀의 청바지 혁대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왼손을 허리에 밀어넣고 오른손으로 바지를 밑으로 끌어내렸다. “유우...... 모...... 훼?” 바람이 빠져나가듯 음성이 배제된 소리로 그녀가 간신히 입을 열었 다. 거의 잠꼬대인 듯한 소리로 눈을 감은 채, 그러고 나서 그녀는 다 시 잠잠해졌다. 다시 고개를 돌리고 나는 그녀의 청바지를 좀더 밑으 로 끌어내렸다. “......” 청바지를 무릎까지 끌어내리고 나서 나는 그대로 동작을 멈추었다. 피가 잔뜩 배어 있는 흰 팬티와 허벅지의 멍을 본 때문이었다. 멍도 멍이었지만, 팬티에 진득하게 배어 있는 피를 보고는 헛구역질이 울 컥 솟구쳤다. “으허......” 격렬하게 몸을 떨며 나는 그녀의 몸에서 손을 뗐다. 손을 허공에 머 물게 한 채, 공포감에 질린 사람처럼 으허, 으허, 하는 소리만 연해 토해낸 것이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 다. “라하...... 몽!” 그녀의 목을 끌어안으며 정신없이 나는 울부짖었다. 순간적으로 백 광이 밀려들어 머리속을 백지장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훼...... 휴...... 류......” 무슨 말인가, 그때 라몽의 입에서 알아듣지도 못할 말이 다시 한번 흘러나왔다. “뭐라구? 그래, 말을 해봐, 말을! 라몽, 말을 해보란 말야!” 그녀의 얼굴을 감싸쥐며 나는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소제목 : 라몽이 위험해 “훼...... 휴......” 여전히 알아듣지 못할 쉰소리를 입밖으로 밀어내며 그녀는 가까스로 입을 벙긋거렸다. 감싸쥔 그녀의 얼굴이 불덩어리처럼 뜨겁게 달라올 라 있었다. 열이 몇 도나 되는 걸까. 문득 갈가마귀떼가 떼지어 떨어 져내리던 불길한 꿈이 되살아났다. 4시 40분. 섬뜩한 위기감을 느끼며 벽시계를 돌아보고 나서 나는 튀듯이 자리 에서 일어났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뛰듯이 욕실로 들어가 수건 하나를 꺼내 재빨리 수돗물에 적셨다. 그것을 꼬옥 짠 다음, 다시 거실로 나와 벽면에 부착된 전원 스위치를 내렸다. 검푸른 어둠의 심연. 그녀의 하체에서 청바지를 완전히 걷어낸 다음,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팬티를 밑으로 끌어내렸다. 흥건하게 피가 밴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고 나서 젖은 수건을 손에 들었다. 그것을 그녀의 음부로 가져 가 조심스럽게 그곳을 닦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이 조금 움찔하는 듯 했으나 곧이어 잠잠해졌다. 수건을 바닥에다 내려놓고 나서 나는 자세를 고쳐 다시 무릎을 꿇었 다. 옷장에서 꺼내온 내 옷을 그녀에게 입히기 위해서였다. 운동복 하 의를 먼저 입히고 나서 간신히 두툼한 셔츠를 입혔다. 급한 마음에 손이 너무 떨려 옷을 뒤집어입힌 건지 거꾸로 입힌 건지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없어, 누구...... 아무나!” 감당하기 힘든 초조감을 내 자신도 알아들 을 수 없는 말로 뱉아내 며, 나는 정신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불이 밝혀진 직후,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눈빛이 시종 나의 동작을 지켜보 고 있었다는 걸 나는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주방의 싱크대 앞, 거기에 알라바마가 서서 응시하듯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알라바마, 지금 라몽이 위험해.” __ 그녀가 위험하다는 게 뭐가 새로워? 그녀는 언제나 위험했어.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냐. 그녀를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 한 단 말야.” __ 아무리 좋은 병원엘 가도 그녀의 병은 고치지 못해. 그녀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 그녀 자신뿐이야. “상관없어. 내가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역시 한 가지야. 내 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거...... 그것말고 이제 더이상 나에게 중요 한 건 아무것도 없어.” 소제목 : 필요없어, 저리 비켜 양손에 힘을 주고 나는 라몽의 어깨를 잡았다. 앞으로 끌어당겨 앉 히려 하자 끄응, 하는 신음이 그녀의 입에서 밀려나왔다. 한손으로 그 녀의 자세를 고정시키고 그 앞쪽으로 등을 돌려 갖다댔다. 잡고 있던 한쪽 손을 당겨 그녀의 중심이 앞쪽으로 쏠리게 한 다음 곧바로 등을 갖다댔다. 그녀를 등에 업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알라 바마가 내 쪽으로 달려왔다. 거의 반사적으로, 나도 모르게 신경질적 인 언사가 입에서 튀어나갔다. “필요없어, 저리 비켜!” 내가 <인성병원> 응급실에 당도한 건 새벽 5시 20분 경이었다. 여 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다행히 집을 빠져나와 곧장 택시를 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 오랜 시간이 지체된 건 아니었다. 병원 앞에 당도해서도 나이든 택시 기사가 먼저 응급실로 뛰어가 알려준 덕에 이동 침대로 그녀를 곧장 옮겨뉠 수 있었다. “사고당하신 건가요?” 이동 침대를 응급실 한복판으로 옮긴 뒤, 수련의인 듯한 젊은의사가 라몽 얼굴의 멍자국을 손으로 만지며 나에게 물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렇게 되어 있었고...... 열 이 너무 올라 혼수상태가 될 것 같아 왔는데요. ” “알겠습니다. 나가서 기다리세요.” 라몽의 눈꺼풀을 열어보며 의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 표정, 마치 내가 라몽을 때린 것으로 단정하고 있는 듯했다. 간호원이 라몽 의 겨드랑이에다 체온계를 꽂고 팔에다 혈압 측정계를 두르는 걸 보 며 왠지 모르게 찜찜한 기분으로 나는 밖으로 나섰다. 삶과 죽음의 고즈넉한 회랑__ 사람 없는 병원복도로 게거품처럼 희붐한 형광등 빛 살이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병원복도에 미련된 긴 나무의자에 엉덩이를 걸치자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녹녹해지기 시작했다.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자, 온몸이 더욱 묵중해져 지층으로 잦아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언젠가 한번, 나도 모를 언제인가 이와 동일한 상황에 처했던 것 같 다는 기이한 유사감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언제였던가. 근거 없는 기억의 늪지대에서 안개가 피어오르고, 구체적으로 기억 할 수 없는 과거의 어느 순간에선가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수세기 전부터,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내 영혼의 언저리에서 쉼없이 나의 무의식에 영향을 주던 존재__ 그녀가 바로 라몽이었던 것 같다 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응급실 문이 열렸다. “정규 진료가 시작될 때까지 일단 일반 병실로 옮기겠습니다.” 라몽이 누운 이동 침대를 밀고나오며 간호원이 따라오라는 눈빛으로 나에게 말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으로 다가가며 나는 재빨리 라몽을 내려다보았다. 팔에 링거가 꽂혀 있다는 것 말고, 별다른 치료 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소제목 : 영혼이 빠져나간 자의 표정 “열은 괜찮은가요?” 이동 침대를 따라가며 나는 조심스럽게 간호원에게 물었다. “걱정할 정도의 고열은 아니지만 일단 해열제를 주사했어요. 검진 이 개시되면 내과 정밀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애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침대를 멈추고, 내 나이와 비슷해 보이는 간호원 이 처음으로 정색을 하고 나를 보았다. “내과 정밀검사요?” 뭔가 상서롭지 않은 예감이 들어 나는 다시 물었다. 환자 전용 엘리 베이터가 4층에서 3층으로 내려오고 있을 때, 간호원이 다시 한번 나 를 보며 입을 열 駭�. “유산인 것 같은데, 자세한 건 검사 결과가 나와봐야 알 거예요. 하 혈이 다른 이유에서 올 수도 있으니까요.” 간호원의 얘기를 듣고 나서 나는 더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엘리베 이터가 1층에서 멈추고, 출입문이 열리고, 간호원이 침대를 안으로 밀 고 들어가고, 출입문이 닫히고, 층수를 알리는 숫자가 일정한 간격으 로 변하고, 9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다시 출입문이 열리고, 간 호원이 침대를 밀고 밖으로 나가고, 희붐한 형광불빛이 저홀로 졸고 있는 듯한 복도를 지나가고, 912라는 숫 愍� 입원실로 침대가 밀려들 어가고, 그곳의 한 공간에 침대를 고정시킬 때까지도 나는 주변 정황 을 전혀 의식할 수 없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자의 표정이 있을 수 있 다면, 아마 그런 얼굴로 나는 간호원의 뒤를 따랐으리라. “진료 시간까지 기다리세요.” 표정 없는 얼굴로 말하고 나서,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간호 원은 밖으로 나갔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라몽의 침대 말고도 그곳에는 세 개의 침대가 더 놓여 있었다. 라몽의 침대 와 달리 입원환자용 정식 침대였는데, ◈却〈� 열살쯤 돼 보이는 아 이가 누워 있었고, 다른 두 개의 침대에는 삼십대 초반쯤의 여자와 오십대쯤의 아주머니가 누워 있었다. 아이의 침대 옆에는 보호자인 듯한 아주머니가 등을 보인 채, 긴 보조의자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 다. “입원한 거유?” 벽쪽의 침대에 누워 있던 오십줄의 아주머니가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내게 물었다. 그 아주머니 말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잠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아뇨...... 아직 모르겠어요.” 힘없는 목소리로 가까스로 나는 대답했다. “어디가 아파서 왔는데?” 나에 대한 친근감을 표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러듯, 아주머니는 금새 반말투로 물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정밀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다는군요.” 대답을 하고 나서 나는 라몽의 침대로 고개를 돌렸다. 링거액은 일 정한 간격으로 떨어져내리고 있었고, 라몽은 여전히 혼수 상태에 있 는 것 같았다. 소제목 : 처단 당하지 마라, 라몽 “아주 젊은 것 같은데......” 아주머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역겨운 클로로포름 냄새보다도, 아주머니의 다음 질문이 두려워 나는 출입문을 열고 입원실을 빠져나 왔다. 입원실 출입문 앞에 잠시 서 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복도 끝쪽의 창앞으로 다가갔다. 아침이 오는 풍경. 여전히 비에 젖고 있었지만, 세상을 뒤덮고 있던 어둠은 말끔히 밀 려나가고 그곳에는 어느덧 푸르스름한 날빛이 충만해 있었다. 9층에 서 아주 멀리까지 내려다보이는 도시는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며 젖은 ㅇ�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머잖아 끔찍스런 광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또다시 휘말려들어가게 될 도시의 아침, 곤한 잠에 빠져 있던 욕망의 주체들이 하나씩 둘씩 눈을 뜨는 기척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같아 나는 나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처단당하지 마라, 라몽......” 거의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것이 무엇을 의식한 발언인지도 모른 채, 다만 절박한 심정으로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입밖으로 밀려나온 것이었다. 밤 사이 몇 명의 신생아가 태어나 고 몇 명이 숨을 거두었는지 알 수 없지만, 살아 있는 어떤 자들의 욕망에 의해서도 나는 그녀가 희생되거나 처단되어서는 안된다는 생 각에 본능적으로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이 라몽에 대한 본호본능 때 문인지 세상에 대한 나의 분노 때문인지 알 수 없어도, 어쨌거나 그 래서는 안되다는 생각 한 가지로 나는 철옹성처럼 굳건해져가고 있었 다. 나, 세상에 태어나 누굴 사랑했던가. 세상에 눈 뜬 이후,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는 세 상을 살아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에게 무엇인가를 베푸는 故릿�, 남에게 무엇인가를 더이상 뺏기지 않기 위해 극도로 긴장된 나날을 살아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상에 대한 무관심, 세상에 대한 무욕 이 그런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다는 걸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나는 아무것도 구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두 명의 아버지가 한 명의 아버지만도 못하다는 걸 깨달은 뒤부터, 세상은 내게 거대한 미망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버지라는 존재, 내 출생과 삶의 뿌리를 부 정하지 않았다 해도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는지 모르리라. 기질적 인 문제가 아니라 해 �, 내가 태어난 세상은 내게 그런 걸 가르쳤다. 세상을 스승으로 둔 모든 자들이 그러하듯, 구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되고 구하는 모든 것이 단죄의 대상이 된다는 걸 나는 너무나도 일찍 깨달아버린 것이었다. 라몽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래, 라몽이 나타나기 전까지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었다. 아무 도 사랑하지 않았고, 또한 아무도 사랑할 수 없었다. 치기어린 기만과 감정의 줄다리기로 권태스런 시간을 교묘하게 비켜갔을 수는 있었으 리라. 깊고깊은 에고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청춘, 적어도 라몽이 내게 나타나기 전까지 <진실한 사랑>이라는 게 내 인생의 항목에는 들어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진실한 사랑. 이제 비로소 그것에 눈뜨는 아침, 세상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 었다. 라몽은 여전히 혼수에 빠져 있었고, 도시는 잠에서 깨어나고 있 었다. 그것이 나를 에워싼 현실이 되어 있었고, 이제 나는 그것을 부 정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험하고 고통스 러워도, 라몽이 난파당한 욕망의 난바다에서 어떻게 홀로 벗어날 수 있으랴. “제발 처단당하지 마 �, 라몽......” 소제목 : 발열의 원인 오전 9시 40분 경, 일단의 의사들이 912호실로 들어왔다. 오십대쯤으 로 보이는 의사가 가장 먼저 안으로 들어오고, 뒤를 이어 수련의로 보 이는 네 명의 젊은 의사들과 간호사 한 명이 따라들어왔다. 정기적인 회진인 것 같았지만, 나이든 의사가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라몽의 침대였다. “여긴가?” 입원실로 오기 전에 이미 환자에 대한 간단한 브리핑이 이미 있었던 모양, 의사는 라몽의 침대 옆으로 바투 다가서며 간호사에게 물었다. 열이 많이 내린 상태 � 아니었지만, 그때 라몽은 의식이 돌아와 눈을 뜨고 있었다. “발열의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나?” 멍자국이 푸르게 번져 있는 라몽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의사가 느닷없 이 고개를 뒤로 돌려 이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여의사에게 물었 다. 방심하고 있던 그녀, 얼굴이 빨개지면서 당황한 표정으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직......” “염증에 의한 게 아닐 경우, 뚜렷한 발열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면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시간을 놓치는데, 그런데도 아직이야?”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의사는 간호사에게 환자의 상태가 기록된 체 크판을 달라고 했다. 건성인 듯 그것을 들여다보고 나서 의사는 전문 적인 의학 용어를 써가며 간호사에게 몇 가지의 검사를 지시했다. “아침에 커피들 마셨어?” 라몽의 침대에서 등을 돌려 다른 환자의 침대로 옮겨가며 나이 든 의 사가 전혀 엉뚱한 말을 꺼냈다. 좀전에 한방 먹은 여의사, 그 뒤를 따 라가며 터무니없다는 표정으로 옆에 선 동료 의사에게 입을 쑥 빼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회진하다 말고 느닷없이 커피는 웬 커피? __ 요컨대 나이 든 의사의 언행을 도무지 종잡지 못하겠다는, 그래서 헷갈려 죽겠다는 표정이었 다. 회진팀이 입원실을 빠져나간 직후, 나는 라몽의 침대 옆으로 바투 다 가섰다. 눈을 뜨고는 있지만, 초점이 허공의 어느 지점엔가 붙박여 내가 다가 섰음에도 그녀의 시선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괜찮아?” 붓고 멍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나는 물었다. 아무런 변화도 없 이, 그녀는 계속 넋나간 표정으로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으며 나직한 목소 �로 나는 다시 한번 그녀를 불러보았다. “라몽......” “......” 무엇에선가 깨어나듯 그녀의 시선이 비로소 내쪽으로 옮겨졌다. 소제목 : 이러지 마, 류 “어때?”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나는 어색하게나마 그녀에게 웃음을 지어보였 다. 아주 잠시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그녀, 느닷없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인상을 일그러뜨린 게 아니라 갑 작스럽게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류......” 옆으로 고개를 돌린 채,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녀는 입을 열었다. “말해. 듣고 있어.” “이러지 마, 류...... 나, 그냥 내버려둬. 신경 쓰지 말구...... 그냥 내버려 두란 말야. 난......” 그녀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나는 재빨리 손을 들어 그녀의 입을 막 았다. “더이상 말하지 마. 무슨 말 하고 싶어하는지 다 알아. 말하지 않아 도 안다구.” 그녀의 눈에서 밀려나오는 뜨거운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주자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말없이, 아주 잠시 그녀와 나는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붓고 멍들어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자 나도 모르게 눈두덩이 욱신거리고 금방 눈물이 핑 돌았다. “빨리 나아. 그래야 집으로 가지.” 풋, 괜스레 비감스러워지는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들고 억지스럽게 웃 는 표정을 지었다. “류......”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그녀가 모기소리만하게 나를 불렀다. “왜?” 허리를 굽히고 그녀 쪽으로 바투 얼굴을 갖다댔다. “아직...... 나 사랑해?” 간신히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아직 라몽을 사랑하냐구?” 허리를 펴고 나는 그녀의 물음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그렇다고, 그걸 말이라고 묻냐고, 나는 라몽을 사랑한다고, 처음의그때처럼, 아니 처음 의 그때보다 훨씬 더 깊고 높고 넓게 사랑한다고, 그렇게 소리치고 싶 은 충동이 뭉클하게 가슴에서 솟구쳐 올라서였다. 그때 입원실 출입문이 열리고 아까의 그 간호사가 다시 나타났다. 안 으로 들어서자마자 곧장 라몽의 침대로 다가와 잠깐만요, 하고 나에게 뒤로 물러나 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손에 노란 고무줄과 꽤 큼직한 주 사기가 들려 있었는데, 어찌된 셈인지 주사기 안에는 주사액이 들어 있지 않았다. 소제목 : 재밌지? 라몽의 침대에서 물러나 나는 간호사의 동작을 지켜보았다. 라몽의 팔에 고무줄을 묶고, 혈관을 고르려는 듯 간호사는 두 개의 손가락을 사용해 라몽의 팔을 세심하게 훑어나갔다. 잠시 뒤 주사바늘이 라몽 의 팔, 간호사에게 포착된 혈관 속으로 밀려들어갔다. 라몽이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주사기 안으로 라몽의 붉은 피가 뽑혀올라오는 걸 보며 나는 은밀하 게 몸을 떨었다. 가슴이 저리고 아리고, 그러면서도 묘하게 설레는 것 같아서였다. 간호원이 입원실을 빠져나간 뒤, 나는 다시 라몽의 침대 옆으로 다가섰다.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나 사랑해? 좀전의 질문을 되풀이하듯, 갈망의 기운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맑고 선연한 한 줄기의 플륫소리__ 어디선가 그 런 소리가 흘러와 이 세상 모든 소음을 잠재우고, 탁한 세상을 잠잠 하게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냐는 그녀의 물음 에, 사랑한다고 선뜻 대답하지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해야 할 시기를 놓쳐버린 것 같다는, 그러니까 다시 그런 기회를 잡기가 왠지 모르게 어려울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과 그것은 조금도 다르지 않았 다. “푸들...... 생각나?” 부드럽게 웃어보이며 나는 입을 열었다. “푸들......”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그녀가 나의 말을 받았다. “라몽이 골랐던 그 푸들 말야.” “푸들......” 비로소 생각난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표정이 변했다. “내가 이름을 지었는데...... 뭔지 알아?” “......” 말없이, 좌우로 아주 조금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알라바마라고 지었어. 알라바마, 누군지 생각 �?” 검지로 머리를 두드리며 나는 환하게 웃어보였다. “트루...... 로맨스?” 분명하게 생각난다는 표정으로, 의식을 회복한 이후 처음으로 그녀 는 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라몽이 없는 동안, 알라바마하고 난 무척 친해졌어. 티격태격 싸우 기도 하고, 껴안고 자기도 하고, 수다를 떨기도 하고, 같이 쇼핑을 가 기도 하고.... .. 재밌지?” 나의 의도적인 너스레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두 눈에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고여 있었다. 뭔가에 쫓기는 듯한 심정으로 나는 다시 입을 열 駭�. “라몽이 완쾌되면 셋이 함께 여행 갈까? 캠핑 도구 다 챙겨 가지고 산이나 강으로...... 아니면 바다도 괜찮고...... 암튼 알라바마도 무척 좋 아할 거야.” “......” 소제목 : 산부인과 검진실 “그래, 바다로 갔으면 좋겠다. 난 한번도 그런 적은 없었지만...... 아 침 바다에서 해가 떠오르는 걸 보고싶어. 일출을 보면...... 왠지는 모 르겠는데 내가 모르고 있던 모든 것들을 다 알게 될 거 같애. 그래서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아침 바다의 일출을 보고싶어했는데...... 이젠 나 혼자만이 아니고 셋이 함께 갔으면 좋겠다.” “......”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라몽의 얼굴 위로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를 때, 다시 입원실 출입문이 열리고 아까와 다른 간호사가 안으로 들어왔 다. “잠깐만 비켜 주세요.” 간호사가 내 앞쪽으로 나서며 주사선을 들어 링거의 흐름을 살폈다. 주사액이 빨리 떨어진다고 생각했는지 주사선에 부착된 조절기를 만 졌다. “좀 비켜 주세요.” 힐끔 나를 뒤돌아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간호사가 말했다. “네?” 왜 비켜 달라는지를 모르겠어서 나는 다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검진실로 옮기는 거예요.” 침대를 밀고 나오며 간호사가 문을 열어달라는 시늉을 했다. “검진실......” 재빨리 문을 열어주며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중 箚킹홱�. 운명의 그 늘에 엎드려 있던 거대한 잠재태가 눈을 뜨고, 이제 비로소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인가. 간호사가 입원실을 빠져나가고 나간 직후, 출입문을 닫고 나도 밖으로 따라나섰다. 간호사는 복도의 끝쪽에 있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침대를 밀고갔다. 엘리베이터는 2층에서 3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곧이어 문이 열렸는 데, 그때 간호사가 나를 보며 갑작스럽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죄송해요.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주실래요?” 자신이 잡았던 침대의 손잡이를 내게 가리키고 나서, 그녀는 곧장 등을 돌려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병원 복도의 중간쯤까지 거의 뜀걸음으로 갔는데, 위치로 보아 간호원실로 들어가는 것 같았 다. 엘리베이터는 3층에서 4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자?”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는 라몽을 내려다보며 나는 물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걸로 보아 다시 잠에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6층에서 7층으로 올라오고 있었 다. 고개를 돌리자 간호원이 손에 흰 종이 한 장을 들고 경보대회에 출 전한 선수처럼 총총히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다시 한번 라몽을 내 려다보고, 엘리베이터 층수를 확인하고, 그러고 나서 간호원을 보았 다. 땡! 8층에서 9층__ 엘리베이터의 정지를 알리는 신호음과 거의 동시에 간호원은 돌아왔다. 나는 침대를 다시 그녀에게 넘겨주었고, 그녀는 그것을 밀고 곧장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따라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이렇게 입을 열었다. “6층 눌러 주세요. 산부인과 검진실로 가야 돼요.” 소제목 : 임신 초기였다는 거 아셨죠? 세브린느, 오후 두 시에서 다섯시 사이 네 샅은 열린다. 비가 내리고 비는 꽃잎을 적신다. 꽃잎은 시들지 않고 더욱 꽃 핀다. __ 이건 사랑과는 달라요. 세브린느, 네 추억은 너를 보지 못한다. 세브린느 세브린느, 부르는 소리 등 뒤로 흘리며 오후 다섯시 네 샅은 시들고 사랑을 찾아 나는 비 개인 거리에 선다. 너 보고 싶은 마음 안개 속에 있고 진흙 속에 있다. 희멀건 하늘에 있고 연못 바닥에 모로 누워 있다. 세브린느, 너 꽃잎으로 피었다 지면서 바람 부는 날 코피 쏟고 눈감으면 또 아침과 만난다. 눈이 눈을 덮고 겨자씨를 덮는 그런 겨울밤에 나는 죽는 꿈을 꾸었지만 죽음은 없고, 없는 것이 너무 좋아 갈잎에 듣는 이슬방울을 세브린느, 나는 그만 꿈에서 보고 만다. 누군가의 시 한 편이 시종 뇌리를 떠나지 않았을 뿐, 몇 시간이 어 떻게 흘렀는지 기억을 할 수가 없다. 라몽이 검진실로 들어가고 난 이후, 이상하게도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나는 병원 곳곳을 정신 없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12층에도 올라가보고, 1층에도 내려가보고, 병원 밖으로도 나가보았 다. 물상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숨막히는 진공감만이 빈틈없이 나를 에워싸는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딘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다시 9층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912호 로 가기 위해 복도 중간쯤을 지날 때, 왼편의 간호사실 문이 열리며 잠깐만요, 하고 누군가 나를 불렀다.아까 라몽의 침대를 6층으로 옮긴 바로 그 간호사였다. “잠깐만 안으로 들어오실래요?” 출입문을 좀더 열어주고 나서 그녀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인 가,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나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간호사들이 사용 하는 사무실인 듯했는데, 그녀 말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테이 블 위에 올려져 있던 크고작은 종이 몇 장을 집어들고 나서 간호사가 다시 내쪽으로 등을 돌렸다. “한참 찾았어요. 검진 결과가 아까 나왔는데...... 별다른 이상이 없 으니까 퇴원해도 된대요. 이거 수납에 가서 계산하시고 조제실에서 약을 받아 오세요. 산부인과 검진 결과, 하혈은 처음 예상대로 유산으 로 인한 건데...... 일주일 정도 약을 복용하면서 안정을 취하면 괜찮을 거예요.” 크고작은 종이 몇 장을 내게 건네며 그녀는 거침없이 말했다. 넋나 간 듯한 표정으로 내가 그걸 건네받자, 뭔가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임신 초기였다는 거 아셨죠?” 시치미를 떼는 사람을 은근히 힐난하는 듯한 표정으로 묻는 그녀에 게, 길게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나는 대답했다. “네...... 알고 있었어요.” 소제목 : 벽에 걸린 코르크판 기나긴 침묵의 터널. 잔뜩 흐리고,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는 오전이었다. 소파에 앉아 휘 몰아치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나는 굳은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 다. 알라바마는 거실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 고, 라몽은 안방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라몽도 알라바마도 내가 제 공한 아침을 먹고난 뒤였고, 시간은 어느덧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었 다. 악령의 집인가. 견딜 수 없는 자괴감 때문에 나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깊은 혼돈과 의구심 속에서, 시간이 우리 모두의 덫이 되고 있는 것 같았 다. 라몽은 병원에서 퇴원한 그날 이후부터 오늘까지 꼬박 닷새 동안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처음엔 미음을 끓였고, 그 다음엔 죽을 끓였고, 그 다음엔 샐러드를 만들어 권해 보기도 했지만, 지난 닷새 동안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음식을 드는 둥 마는 둥 그녀는 매 번 넋나간 듯한 표정으로 강산바라기를 했을 뿐이었다. 유산? 어쩌면, 그것이 이유가 될 수도 있으리라. 나에 대한 극심한 죄책감 때문에 기나긴 침묵의 터널로 빠져들어간 거라면, 그런 거라면 窄? 든지 이해가 가능한 문제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했었으므 로 퇴원하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단 한번도 그 문제에 대해 입 을 열지 않았다. 그녀가 방관동을 떠난 뒤에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 는지, 이제와서 그런 걸 따져 무엇하겠는가. 라몽에 대한 나의 극단적 의구심은 병원에서 퇴원한 라몽을 집으로 데려온 바로 다음날 오전에 일어났다. 그녀에 대한 나의 복잡한 감 정은 성좌동의 낙원장에 이제 더이상 그녀를 머물게 할 수 없다는 쪽 으로 단호하게 기울어졌고, 그것으로 인해 퇴 幣?다음날 오전에 나 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곧장 낙원장으로 혼자 갔다. 물론 그녀의 짐을 다시 방관동으로 옮기기 위해서였다. 성좌동, 낙원장, 라몽방. 이제 더이상 라몽을 그런 곳에 혼자 방치해 두어서는 안된다고, 그 녀가 아무리 스타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해도 그래서는 안된다고, 그 녀의 삶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겠다는 일종의 다짐이라도 하듯 굳은 마 음을 먹고 나는 그곳으로 갔다. 낙원장 주인아줌마에게 라몽이 미처 계산하지 못한 방세를 대신 내고 나서 나는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 다. 나의 다짐에 쐐기를 박듯, 약 오분도 지나지 않아 무엇인가가 섬 뜩하게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 벽에 걸린 코르크판을 보고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수 만 볼트의 고압전류에 감전된 사람처럼 선 자리에서 한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책을 만들기 위한 것인 듯, 아트지에 인쇄된 여러 장의 라몽 사진이 바로 그 코르크판 가득 부착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제목 : 삐삐번호나 적어두세요 라몽의 나신(裸身). 단순한 사진이 아니라, 코르크판에 꽂혀 있는 것은 놀랍게도 전라의 사진들이었다. 흔히 말하는 누드 사진집을 위한 사진들 같았는데, 배 경은 한여름의 계곡과 숲, 바다와 샐내 등 다양했다. 중요한 부분을 양손이나 포즈로 간신히 가리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그것들을 예술성 이 있는 누드 사진으로 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딘지 모르게 조악 스럽고, 억지스럽고, 또한 부자연스럽게 보인 때문이었다. 이상한 건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그 모든 사진들 위에 붉은 매직펜 으로 거칠게 X자가 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몽이 자신의 사진 위 에다 스스로 매직펜을 그은 건가. 스타가 되고 싶다는 욕망과 원치 않는 누드 사진__ 그 사이에서 극심하게 갈등했을 그녀의 심정이 상 채기처럼 매직펜 자국에 깊이 스며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결국은 촬영에 응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티모시 기획, 윤인준이라는 인물. 막막하고 어렴풋하던 의구심에 한꺼풀 막이 벗겨지는 것 같았다. 라 몽에게 500만원의 돈을 건네받은 티모시 기획에서 가장 먼저 알선해 준 일이 고작 누드 사진집이었단 말인가. 가능성 있는 신인 모델들의 사진집에 동참하게 됐다며, 그것을 기념하는 의미로 푸들을 사달라던 라몽의 표정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무엇을 기념하기 위한 푸들인가. 모든 일에 하나하나, 자연스럽게 연결고리가 생겨나는 것 같았다. 푸 들을 사러간 그날, 윤인준의 호출을 받고간 라몽은 끝내 집으로 돌아 오지 않았었다. 양희경의 말대로라면 그날 라몽은 윤인준과 함께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방관동을 떠난 이후에도 윤인준과 라몽의 관계는 계속 지속됐고, 그동안에 누드 사진집을 위한 촬영이 진행됐 을 거라는 얘기가 되는 셈이었다. 임신과 유산. 결국 라몽은 방관동을 떠나 있던 여름 동안 임신을 한 거고, 으깨진 몰골로 유산을 한 뒤에 다시 방관동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윤인준이 라는 인간의 파렴치한 꾐에 넘어가 그렇게 된 것이건, 자신의 욕망을 이기지 못해 그렇게 된 것이건, 결국 참담한 파국 이외에 라몽에게 남겨진 건 더이상 아무것도 없게 된 셈이었다. __ 몽이 이젠 학원에도 안 나와요. 그만뒀다는 거 알고 있었나요? 양희경이라는 학원 선배, 라몽이 짐을 꾸려 성좌동의 낙원장으로 돌 아가고 난 얼마 뒤에 다시 내게 전화를 걸어와 그런 말을 건넨 적이 있었다. 라몽과 윤인준에 대한 저열한 보복심리에 사로잡힌 여자처럼,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녀는 내게 몇 번인가 만나자는 요구를 했었다. 왠지 도발적인 기운이 감도는 것같아 끝내 거절하긴 했지만, 묘한 여 운을 남기는 듯한 목소리로 그때 그녀는 내게 이런 말을 남겼었다. __ 언젠가 오류씨 스스로 나를 찾을 날이 있을 거예요. 나중에 후회 하지 말고 지금 삐삐번호나 적어두세요. 소제목 : 붉은 X자 “양희경......” 라몽의 누드 사진이 꽂혀 있는 코르크판 앞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양 희경의 삐삐번호를 생각했다. 주머니에서 전화번호 수첩을 꺼내 재빨 리 뒷부분으로 넘기자, 거기 마지막 부분에 양희경의 무선호출기 번 호가 기록돼 있었다. 어쨌거나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수첩을 주머 니에 넣고나서 나는 천천히 코르크판을 향해 걸음을 옮겨놓았다. 부정당하는 나신. 거칠고 흉하게 대각을 이룬 붉은 X자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다가, 겹 쳐진 아래쪽의 사진을 들춰보기 위해 좌측의 사진 하 じ?넘겨보았 다. 사진크기와 규격은 동일했지만 사진이 아닌 종이 하나가 아래쪽 에 가려 있었다. <후기>라는 제목이 붙은 글이었는데, 본문의 활자가 너무 작아서 눈을 가까이 갖다대지 않고서는 도저히 읽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뭔가. 안되겠다 싶어 아예 압정을 빼고 나는 그 종이를 코르크판에서 떼어 냈다. 아마도 그것은 누드 사진집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할 인쇄물 인 것 같았다. 사진집에 동참하는 여자들의 이름, 그리고 간단한 인상 기가 그곳에는 적혀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나서 나는 차 苛酉?그것 을 읽어내려갔다. 성민경 : 미팅을 한번 했다가 어긋나서 촬영이 취소됐는데, 또다시 두번째 미팅이 우연히 이루어져 만난 지 8개월만에 촬영을 하게 된 경우. 나이가 어린 탓인지 순진하고 언제나 밝은 웃음을 보여준다. 하 루종일 말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를 않아 화가 났거나 불만이 많 은 줄 알고 걱정했는데, 스탭들을 대하기가 왠지 어려워서 말을 하지 못했다고 슬며시 고백했다. 점차 친숙해지자 별로 웃기지도 않는 말 에도 혼자 까르르 까르르 잘도 웃는 그녀는, 연기자가 되고 싶 紵舊? 만 엄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연기는 일단 접어두고 지금은 가야금을 배우고 있다. 조은희 : 분위기는 매우 섹시하고 관능적이었는데, 무술영화에 여자 주연으로 출연하게 됐다고 해서 의아함을 던져주기도 했다. 시원시원 한 성격에 곧바로 사람들과 친해져 미팅이 있던 날부터 스탭진들을 스스럼없이 대했다. 그녀의 일을 돌봐주는 매니저의 얘기로는 예의 바르고 약속을 잘 지켜 그녀와 같은 모델만 있으면 일을 하는 것 같 지도 않다고 자랑했다. 정영아 : 첫 미팅,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는 ?일행은 쫓겨나야만 했 다. 그녀의 얼굴이 어려보여 미성년자로 오해를 받은 때문이었는데, 신분증까지 지니고 있지 않아서 도리없이 장소를 옮겨야만 했다. 작 곡을 전공하고 있는 그녀는 노래도 곧잘 부른다. 미팅 때 촬영에 대 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는데도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는지 촬영 도중 에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어쨌든 귀엽고 예쁜 얼굴을 지닌 그녀, 고 집도 세지만 주관이 뚜렷한 게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소제목 : 전라의 몸 한수희 : 그녀의 야외 촬영 장소를 잊을 수가 없다. 누드신 때문에 한적한 곳을 찾느라 일주일 동안 장소를 물색해서 찾아낸 곳은 공교롭게도 비포장 도 로를 30분이나 걸어서 들어가야 하는 곳에 자리잡은 깊은 계곡이었다. 더구나 장소 헌팅을 왔을 때는 멀쩡했던 길이 볼도져로 파헤쳐져 일행은 아연실색하 지 않을 수 없었다. 물러설 수 없다고 판단한 촬영팀은 이를 악물고 계곡에 도착했고, 촬영은 오후 4시에 끝이 났다. 온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공사 진척 상황을 물었더니, 공사 관계자들은 오후 7시가 되어야 길이 뚫린다고 杉? 어쩔 수 없이 일행은 계곡에서 물장난을 치며 시간을 보냈는데, 그녀는 촬영 이 끝나고 입은 옷이 거추장스러운지 전라의 몸으로 수영을 하기도 했다. 박정아 : 완벽한 두 얼굴의 여자. 그래서 몇 번씩 우리를 놀래켰던 여자. 메 이크 업을 한 얼굴은 관능적이고 섹시하지만 화장기 없는 그녀의 얼굴은 섹시 라는 단어와는 상관 없고, 오히려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촬 영 전날, 휴양림의 포커판에서 싹쓸이를 하는 바람에 스탭들이 다들 거지 신 세가 되었지만, 다음날 바닷가에 나가 신선한 회를 듬뿍 안겨주는 여유를 보 이기도 했다. 라면을 좋아해서 하루에 한 끼는 라면을 먹어야 하는 여자. 안지예 : 누구보다도 눈이 크고 예쁘다. 게다가 그녀로부터 전해들은 데이트 얘기는 너무나도 낭만적이고 감동적이었다. 넉넉하지 못했던 그녀의 집안, 남자 친구 또한 여유가 없었던 탓에 영화 스토리 같은 연애를 해야만 했다. 각자 2,000원씩을 가지고 나와 커피 한잔(1,500원)을 마시며 3시간을 때우고 , 새우깡 한 봉지를 사들고 거리를 걸어다니며 이야기하고, 남자 친구하고 헤 어져 버스 타고 집에 가면 동전 한 닢 남지 않았다는 얘기. 오 燻?: 한 마디로 백치미를 느끼게 하는 여자. 남자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 을 것 같다. 무표정하게 있을 때나 웃을 때는 천진난만하다 못해 백치미를 느 끼게 하는 그 모습 자체가 아름답게 느껴진다. 게다가 애교 또한 만점인 그녀 __ 말끝이 분명하지 않아 반말 같기도 하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 그 특유의 억양 속에 애교가 배어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전혀 기분을 상하 지 않게 한다. 아버지가 작곡가인 탓인지 노래를 곧잘 부르는데, 비음이 섞인 독특한 음색이 그녀의 맥력을 한껏 느끼게 한다. 이금지 : 처음 만났을 때 캐스팅 담당자는 그녀가 너무 어려 보여 미성년자 인 줄 알았다고 한다. 신선하고 산뜻한 이미지의 모델을 찾고 있었으니, 사실 속으로는 은근히 반갑기도 했다. 그러나 1차 카메라 테스트 결과는 실제보다 성숙해 보이고 통통해 보여 다소 실망감을 느끼게 하기도 했었다. 모기 소리 처럼 들릴까말까한 목소리 때문에 촬영이 계속되는 동안 큰소리 한번 내지 못 하고 조심해야만 했다. 소제목 : 초보딱지 김미애 : 에로물 영화 배우로 주가를 올렸다는 얘기에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는 글래머를 연상했었다. 하지만 막상 만나보니 예상이 빗나갔다. 예전에는 살이 있어서 가슴도 다소 볼륨이 있고 관능미가 있었다는데, 빈약할 정도로 살이 빠진 탓에 예전의 이미지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연기자를 벗어나 전 문 모델로 남고자 모델 에이전시를 다시 찾아가 신인들과 함께 워크샵을 하며 의욕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었는데, 섹시함보다는 악마적인 매력을 느끼게 하 는 것 같다. 이지희 : 나이가 어린 탓에 호기심도 많고 물어보는 것 ?많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녀의 눈에는 신기해 보이는 모양이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사람들 을 대하는 모습이 네살바기 아이 같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 가방에 뭐가 들었 는지 궁금해서, 일행들이 가방을 열 때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이대 곤 하는 그녀 때문에 스탭들이 작업에 방해를 받을 정도라고. 그녀가 가장 좋 아하는 것은 노래 부르기. 노래방에 갔을 때 그녀의 또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율동과 함께 가끔 허리를 흔드는 배춤까지 곁들여 섹시하고 귀엽게 노래 부르는 그녀__넋을 잃고 바라보던 스탭들이 종내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 신경애 : 친구 따라 강남 간다더니, 그녀가 바로 그 케이스다. 아마츄어 모 델도 해본 적이 없는 그녀는 모델 활동을 하는 친구가 본사의 카메라 테스팅 을 받으러 왔을 때 구경삼아 따라왔었다. 내친 김에 카메라 테스팅이나 받아 보라는 권유에 장남삼아 응하게 되었는데, 이미지가 너무나도 청순하여 친구 를 제치고 본사 모델을 하게 된 인연. 수영복을 입고 카메라 테스팅하는 것조 차도 너무 수줍어 어쩔 줄 모르는 그녀였기에, 스탭들은 차마 나무라지도 못 하고 끙끙대느라 진땀을 뺐다. 윤성주 : 그녀 ?만나면 일본 여성을 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지금은 부산에서 지낸다는 그녀는 동경에서 태어나 동경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기 때 문인지 왠지 그녀의 말씨나 행동거지가 일본 여자를 연상케 해 종종 우리를 당황하게 했다. 일이 끝난 후 맥주 한잔하러 그녀와 동행했었는데, 한참 얘기 가 오가는 중에 그녀가 빈 맥주병을 양팔에 낀 채 테이블을 치우려고 일어서 는 게 아닌가. 여기는 한국의 카페이고 테이블은 이곳 종업원들이 치울 것이 니 직접 치우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했는데, 그런 순간에도 그녀의 여리고 여 성스런 면모 ?엿볼 수 있었다. 장인경 : 그녀는 너무나도 열심히 촬영에 임해 우리 모두를 감동시켰다. 지 금이야 영화 주연도 하지만 본사의 일을 할 때만 해도 초보 딱지를 떼지 못해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굳은 표정이 되어 주위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었다 촬영 도중, 잠깐 탈의실로 들어 간 그녀가 감감 무소식이었다. 진행자가 궁 금하여 살며시 들여다보니 그녀가 혼자 거울을 들여다보며 어색한 표정을 지 우려고 열심히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유난히도 진지하고 귀여워 보였다. 소제목 : 누가 라몽인가 라몽은 어디 있는가. 누드 모델들에 관해 언급한 인쇄물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녀의 이 름은 눈에 띄지 않았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한동안 멍한 표정으 로 나는 코르크판에 꽂힌 라몽의 누드 사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누드 사진집에 동참한 건 분명한 것 같은데, 어째서 그녀의 이름은 빠져 있는 것일까. 어쩌면! 대략 오분 정도 사진과 인쇄물을 번갈아보다가, 섬광처럼 뇌리를 스 쳐가는 생각이 있어 나는 다시 손에 든 인쇄물을 들여다보기 시작했 다. 13명의 모델들 중, 과연 누 ?라몽인가. 그녀의 이름이 그 인쇄물 에 빠진 이유를 나는 그녀가 ‘라몽’이라는 이름 대신 다른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누가 라몽인가. 찬찬히 인쇄물을 들여다보며, 모델에 관한 언급을 나는 다시 살펴나 가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라몽일 수 있는 가능성과 라몽일 수 없는 가능성을 가름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오분도 지나지 않아 그와 같은 방식이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걸 이내 깨우칠 수 있었는데, 그 건 13명의 모델에 관한 언급 중 그녀일 수 있는 가능성이 너무 많았 ?때문이었다. 결국 라몽일 수 없는 결정적 이유를 찾아내는 일이 훨씬 효과적일 거라는 쪽으로 나는 생각을 굳혔다. 첫번째 모델 성민경__ ‘만난 지 8개월만에 촬영을 하게 된 경우’ 라는 게 라몽과 무관. 8개월 전이라면 아직 그녀의 꿈이 무궁무진할 때라서 누드사진집 근처엔 얼씬거리지도 않았을 것. 두번째 모델 조은희__ ‘분위기는 매우 섹시하고 관능적이었는데’ 라는 언급이 라몽과 무관. 아무리 되새겨봐도 라몽은 섹시하고 관능 적인 분위기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점. 세번째 모델 정영아__ ‘작곡을 전공’한다는 점에서 무관. 네번째 모델 한수희__ ? 다섯번째 모델 박정아__ ‘포커판에서 싹쓸이’를 할 수 있을 정도 가 아니라 아예 포커를 못한다는 점과 ‘하루에 한 끼는 라면을 먹어 야 하는 여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무관. 여섯번째 모델 안지예__ ‘영화 스토리 같은 연애’를 혹시 라몽이 나를 만나기 전에 했을는지 모르겠지만, 2,000원을 들고 나가 커피 한 잔 마시고 새우깡 한 봉지 사들고 몇 시간씩 거리를 헤매야 할 만큼 그녀가 절박하게 가난하지는 않았다는 점. 일곱번째 모델 오혜린__ ‘백치미를 느끼게 하는 여자’라는 점, ‘ 아버지가 작곡가’라는 점이 무관. 여덟번째 모델 이금지__ ? 아홉번째 모델 김미애__ ‘에로물 영화로 주가를 올렸다’는 점에서 무관. 열번째 모델 이지희__ ? 열한번째 모델 신경애__ 티모시 기획의 알선으로 누드 사진집에 동 참하게 됐을 거라는 점에서 ‘모델 활동을 하는 친구’를 따라갔다가 옷을 벗게 되지는 않았을 것. 열두번째 모델 윤성주__ ‘동경에서 태어나 동경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점에서 전혀 무관. 열세번째 모델 장인경__ ‘지금이야 영화 주연도 하지만’이라는 점 에서 도무지 연관이 있을 수 없는 처지. 소제목 : 섹시하고 귀엽게 한수희, 이금지, 이지희. 라몽일 가능성이 없는 여자들을 제외하자 세 명의 여자가 가능성을 가진 대상으로 남았다. 그녀들에 관한 언급을 찬찬히 다시 읽어나가 며, 가명 속에 숨어 있는 라몽을 찾기 위해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수희라는 여자, 촬영이 끝난 뒤에 전라의 몸으로 수영을 했다는 언급이 얼핏 라몽처럼 느껴졌지만, 그것 이외에 다른 언급이 전혀 없 어 라몽이라는 확신을 갖기엔 왠지 모르게 어설픈 느낌이 들었다. 이금지라는 여자, ‘신선하고 산뜻한 이미지의 모델’이라는 언 乍? 는 신빙성이 있는 것 같았지만, 옷을 벗고 행한 카메라 테스트에서 ‘실제보다 성숙해 보이고 통통해 보여서 조금 실망했었다’는 언급 에서는 왠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누가 남는가. 이지희 : 나이가 어린 탓에 호기심도 많고 물어보는 것도 많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녀의 눈에는 신기해 보이는 모양이다. 초롱초롱 한 눈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이 네살바기 아이 같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 가방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해서, 일행들이 가방을 열 때마다 하던 일을 饅煞?고개를 들이대곤 하는 그녀 때문에 스탭들이 작업 에 방해를 받을 정도라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노래 부르기. 노래방에 갔을 때 그녀의 또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율동과 함 께 가끔 허리를 흔드는 배춤까지 곁들여 섹시하고 귀엽게 노래 부르 는 그녀__ 넋을 잃고 바라보던 스탭들이 종내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 결국 이지희라는 여자가 라몽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결론을 나는 내렸다. 라몽의 짐을 꾸리는 동안에도, 그것을 방관동으로 옮기는 동안에도, 그리하여 나의 뇌리에서는 ‘이지희’로 표현된 라몽이 쉼없이 어른 거렸다. ‘호기심도 많고 물어보는 것도 많’은 그녀가 어른거렸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그녀가 어른거렸고, ‘율동 과 함께 가끔 허리를 흔드는 배춤까지 곁들여 섹시하고 귀엽게 노래 부르는 그녀’가 또한 어른거렸다. 섹시하고 귀엽게 노래 부르는 그녀. 누드 모델이 된 라몽을 연상하는 일이 내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느껴졌다. 그녀와 나의 두번째 방관동 생활은 그렇게 우울하게 막을 올렸지만, 어쨌거나 라몽에게 시간이 필요할 거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모든 걸 함구해 버리기로 작정했다. 다만, 조만간에 기회가 나면 라몽 의 학원 선배였던 양서경이나 한번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을 은근히 키 워나갔을 뿐이었다. 여러가지 정황들. 일테면 그동안 일어났던 일련의 일들에 석연찮은 점이 너무 많은 것 같았고, 그것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라몽을 위해 언 제까지나 침묵하고, 함구하고, 못본 척하는 게 과연 능사일 수 있을 까. 설령 이전까지는 그랬다 해도, 이제부터는 내 자신이 괴롭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鵑? 그러지 않으리라 아주 여러번 나는 내 자신에게 다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의 이름으로 침묵하는 건, 어쨌거나 사 랑의 이름으로 사랑을 방관하는 것과 아무것도 다를 게 없다는 나름 대로의 결론을 내린 때문이었다. 소제목 : 보고싶은데, 나올래? 흐리고 바람부는 오후. 집안 분위기는 여전히 깊고 어두운 침묵의 터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조심스럽게 안방문 을 열고 나는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무릎을 세우고 침대 위에 오도카 니 앉아 있던 라몽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침대 위에 무 릎을 세우고앉아 있다가 나를 돌아본 것인데, 그 표정이 얼핏 세상살 이에 대한 희망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의 그것처럼 이를 데 없이 허전 하고 막막해보였다. 아주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보고나서, 아무런 말도 없이 그 녀는 다시 창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할 말이 없거나, 있어도 하고싶지 않다는 뜻인 것 같았다. 가도가도 빛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침묵의 터널이 너무 난감하게 여겨져서, 그래서 도리없이 나는 그녀의 뒷모 습을 뜻없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삭풍이 휘몰아치는 황량한 벌판이 보이고, 마지막 잎새까지 털어낸 겨울나무가 보이고, 이윽고 거대한 옥양목처럼 드넓게 펼쳐진 설원이 보였다. 이제 라몽에게 남겨진 게 뭔가. 자신의 뜨거운 피를 식히기 위해 눈덮인 설원에 엎드려 있는 라몽을 떠올리고 있을 때, 거실에서 느닷없이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라 몽을 향한 끈끈한 연민을 도리없이 끊어내고, 천천히 등을 돌려 나는 다시 거실로 나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오류? 나 송가희야.” “가희......” 사뭇 놀라는 표정을 지을 때, 푸들이 다가와 발목에다 얼굴을 비벼 댔다. “지금 뭐해?” 상당히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는 물었다. “지금...... 그냥 있어.” “보고싶은데, 나올래?” “지금?” 푸들을 들어올리려 허리를 굽히다 말고 다시 한번 놀라는 표정으로 나는 되물었다. “그래, 지금 나와. 그동안 우리 너무 적조했던 거 아냐?” “글쎄...... 지금은 곤란한데......” 라몽이 있는 안방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래, 그럴 줄 알고 아예 집부근까지 왔어. 여기 방관동이란 말야” 내 수를 훤하게 읽고 있다는 듯 그녀는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지?” 도리없게 됐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수화기를 바꿔들었다. “버스정류장 부근 ?있는 육교 건너오면 동방그룹 빌딩 있잖아? 그 지하에 있는 호프집이야. 하이델베르그.” “알았어. 금방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소제목 : 문학과 돈과 사랑 송가희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다시 안방으로 들어갔 다. 라몽은 여전히 등을 보이고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등 을 향해,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는 말했다. “잠깐 나갔다올게.” “......” 나의 말을 듣고도 그녀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친구가 찾아왔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더이상 그녀의 반응을 기대하지 않고 나는 곧바로 등을 돌렸다. 내 가 사용하는 작은방으로 들어가 반바지를 벗고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위에 걸치고 있던 흰 셔츠도 벗고 헐렁한 감색으로 갈아입었다. 준비 가 끝난 건가, 잠시 서 있다가 서랍을 열어 지갑을 꺼내들었다. 지갑 에는 천원짜리 지폐 몇 장이 남아 있을 뿐, 만원 권은 단 한 장도 남 아 있지 않았다. 지갑에 꽂혀 있는 현금카드를 확인하고 나서 나는 곧장 집을 빠져나 왔다. 은행에 가서 필요한 만큼의 돈을 찾으면 되겠지만, 내 구좌에는 예금 잔액이 삼십만원도 남아 있지 않을 터였다. 그것으로 얼마나 버 틸 수 있을까. 왠지 모르게 모든 것이 최악의 상태로 몰려가는 것 같 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육교 앞의 은행에서 오만원의 현금을 인출하고 나서 나는 맥빠진 걸 음으로 육교를 올라갔다. 돈을 인출하고 나서 확인한 잔액은 모두 23 만 7천원 정도였다. 한 달도 버티기 힘들 거라는 생각에 온몸이 지레 나른해지는 것 같았다. 건 당 오백만원씩, 두 건에 천만원. 두어 달 전, 오장주 형이 나와 송가희에게 제시한 출판사 아르바이 트 건이 문득 뇌리를 스쳐갔다. 그때 그걸 수락했으면 어쨌거나 지금 쯤은 돈이 수중에 들어왔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라몽에게 건 넨 오백만원이 아까워서 그런 건 결코 아니 駭? 다만 송가희의 결정 에 내가 부화뇌동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는 생각, 그런 게 때늦은 후 회처럼 가슴을 묵지근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였다. 송가희와 같은 문학적 신념이 내게 있는가. 육교의 건너가며 나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와같은 신념도 없고 필요한 건 오직 돈뿐이었는데, 어째서 그때 나는 송가희의 편에 서서 오장주 형을 턱없이 폄하했던 것일까. 이제 내가 선택할 수 있 는 길은 오직 두 가지, 남겨진 23만원의 예금이 바닥나기 전에 돈 될 만한 일을 찾거나, 악의 경우에는 집으 ? 들어가 다시 한번 구차스럽 게 손을 벌리는 일뿐이었다.그것 말고 다른 출구는 전혀 없어보였던 것이다. 문학과 돈과 사랑. 그런 게 이상한 연결고리로 꼬이고 꼬여 기분을 턱없이 난감하게 만 드는 것 같았다. 문학은 문학, 돈은 돈, 사랑은 사랑__ 아무리 곱씹어 봐도 본질적으로 무관할 것 같은 그것들이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길 래 상피붙은 듯 한데 뒤엉겨 기분을 이를 데 없이 찜찜하게 만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문학에서도 사랑에서도 뚜렷한 출구를 찾아내지 못한 채 나는 여전히 돈의 족쇄와 싸우고 있는데, 어찌된 셈인지 송가희와 오장주 형은 문학과 돈의 영역을 당당하게 점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소제목 : 송가희 맞아? 호프집 <하이델베르그>. 내가 실내로 들어가자 맞은편 벽쪽에 앉아 있던 송가희가 가볍게 손 을 들어보였다. 그녀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 가며 뭔가가 이상하 다는 표정으로 나는 유심히 그녀를 살폈다. 단정한 숏 커트 헤어 스 타일과 함께 옷차림이 예전과 판이해졌다는 걸 이내 알아차릴 수 있 었다. 청바지에 헐렁한 셔츠나 남방을 걸치는 게 그녀의 전형적인 차 림새였는데, 어찌된 셈인지 오늘은 검정색 상하의에 감색과 올리브 그린이 섞인 스웨이드 박스 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목에는 에스닉풍의 목걸이까지 걸고 있었다. “송가희 맞아?” 사뭇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나를 위한 것인 듯 1000cc의 생맥주 한 잔이 미리 올려져 있 었고, 안주로 감자튀김이 나와 있었다. 읽으려고 산 것인 듯, 그녀의 생맥주잔 옆에는 계간 문예지 [문학세계] 가을호가 놓여 있었다. “왜?...... 안 어울려?” 자신의 차림새를 한번 내려다보고 나서 어색하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물었다. “오장주 형처럼 너도 인생관이 바뀐 거야?” 왠지 모르게, 송가희의 차림새가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나타나 사 람을 놀라게 하던 두어 달 전의 오장주 형을 생각나게 했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오장주 형 얘기는 왜 꺼내느냐, 하는 표정으로 그녀는 생맥주잔을 들어 내게 건배를 제안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데?” 생맥주잔을 들어 그녀의 그것에다 맞부딪치며 나는 물었다. “오늘...... 아주 중요한 날이야.” “뭐가 중요해?” 잔을 턱 밑에서 멈추고, 뭐가 중요한지 이유나 알고 마시자는 표정 으로 나는 물었다. “부끄러운 얘긴데......” 말을 멈추고 나서 그녀는 잠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뭔가가 잘 믿 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한번 흔들고, 그러고나서야 가까스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나 등단했어.” “......” <등단>이라는 말,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는 잠시 멍 하니 앉아 있었다. “[문학세계] 신인상에 당선됐단 말야. 여기......” 다소 쑥스런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생맥주잔에 옆에 놓여 있던 계 간지를 그녀는 내 앞으로 내밀었다. “등단...... 그러니까 소설가가 됐다는 거구나?” 다른 나라 사람의 말을 간신히 알아들은 듯한 표정으로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소제목 : 류, 날 쳐다봐 “소설이 내 인생의 목표라는 생각으로 살아온 건데...... 막상 되고 나니까 기분이 이상해. 분명 기쁘긴 한데 그만큼 허망하기도 하고...... 암튼 묘해. 그래서 당선 됐다는 통지를 받고도 한동안 아무 곳에도 연락을 할 수 없었어. 잡지가 오늘 나왔는데...... 왠지 너한테 내가 소설가가 됐다는 걸 제일 먼저 알려 주고 싶은 거야. 그래서 여기까 지 왔어.”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수줍음을 타는 소녀처럼 조용히 고개를 숙였 다. 평상시의 그녀가 전혀 아닌 것 같아 나는 다소 어색한 기분으로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소설가가 됐다는 소식을 어째서 그녀는 내게 가장 먼저 알리고 싶어한 것일까. “암튼 축하해. 자, 건배.” 부자연스런 느낌을 떨쳐버리기 위해 이번에는 내가 건배를 제안했 다. “정말 축하하는 거야?” 잔을 부딪치고 나서 그녀가 물었다. “가짜 축하도 있나?”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이런 일을 알리고 함께 기뻐할 사람이 내 주변에 너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소리야.”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 갔다.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나도 그녀처럼 맥주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뜻하던 대로 등단을 했으니까 이젠 소설만 열심히 쓰면 되겠구나. 적어도 진로를 놓고 더이상 고심하지 않아도 될 거 아냐.” 잔을 내려놓고 나서 나는 <문학세계>의 표지를 들여다보았다. “아냐, 무척 겁이 나.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모든 게 너 무 막막해. 작은 널판 하나 의지하고 망망대해에 떠 있는 거 같단 말 야.” “아냐, 그래도 넌 잘해 나갈 거야. 문학에 대한 신념도 있고, 그걸 관철해 나가는 추진력도 있으니까 그동안 해 온 것처럼만 해 나가면 잘 될 거야.” 말을 하고나서 나는 다시 몇 모금의 맥주를 마셨다. “넌 어때?” 이상하리만큼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가 나를 건너다보았다. “나...... 뭐?”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는 되물었다. “시 말야.” “시......?” 힘없이 웃어보이며 나는 다시 몇 모금의 맥주를 마셨다. 잔을 내려 놓고 나서 사뭇 자조적인 표정으로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문학이라는 거...... 날이 갈수록 자 탔?없어. 문학이 아니라 인생 이 자꾸 꼬여드는 것 같아 숨이 막힌다구.” 말을 하고 나서 나는 시선을 돌려 오른쪽 벽면에 부착된 작은 조명 등을 올려다보았다. “류, 날 쳐다봐.” 소제목 : 여자인 송가희 가희의 말을 듣고 나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팽팽하게 긴장된 눈빛으로 그녀 가 올곧게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 왜?” 탁자 위에다 팔을 괴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나는 물었다. “날 어떻게 생각해?” 긴장감이 더욱 고조돼 팽팽한 위기감을 느끼게 하는 얼굴로 그녀는 물었다. “너...... 송가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구?” “그래 나, 송가희.” “넌 내 동기이고, 친구이고, 오만하고, 자존심 센 여자애고...... 그리고 지금은 소설가잖아.” “그게 다야?” “뭘 원하는 거지?” 맥주잔을 들어올리며 나는 다시 물었다. “이성으로서 날 어떻게 생각하냔 말야. 여자인 송가희.” “여자인 송가희...... 글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아닌 것 같은데 왜 할 말이 없어지는 거지?” 말을 하고나서 나는 맥주를 몇 모금 마셨다. “나 지금 어렵게 견디고 있는 거니까 말 돌리지 마. 넌 정말 날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으면 내가 여길 왜 나와? 그러지 말고 말을 쉽게 풀 어봐.” “좋아. 내키진 않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난 지금도 여전히 널 좋아하 고 있어. 학교 다닐 때도 이런 말을 할 기회가 있었지만...... 네가 날 의도 적으로 피한다는 걸 알고난 다음부터는 자존심 때문에 마음을 억누르고 지금 까지 지내온 거야. 하지만 그때의 감정이 나에겐 지금도 여전히 유효해. 그리 고...... 지금 난 견딜 수 없을 만큼 외로워. 외로워서 미칠 지경이란 말야. 알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그녀는 나를 보았다. “......” “날마다 너에게 전화하고 싶고, 날마다 너에게 이런 고백을 하고 싶다는 생 각이 들었지만...... 정말 자존심 때문에 그럴 수 없었어. 하지만 자존심이 뭐지?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오히려 당당한 자존심 아닌가?” 두 눈에서 그렁거리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꼿꼿하게 앉 은 채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그녀는 말을 마쳤다. 일거수 일투족, 그녀가 송 가희라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내게는 낯설고 충격적으로 보였다. 소제목 : 나에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소설가가 된 기념으로 사랑을 고백하겠다는 건가. 흐리고 바람부는 날, 느닷없이 펼쳐진 상황 앞에서 나는 미묘한 비감을 느끼 기 시작했다. 어째서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해야 하는가, 어쩌면 그런 데서 생 겨난 자괴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 행동의 어떤 우유부단한 면이 송가희의 가슴에 상처를 만들어 줬다면, 그것도 또한 비감의 근거나 동기가 될 수 있을 터였다. 나와 송가희. 맥주를 거의 바닥까지 비우고 나서 나는 마음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송가희 의 느닷없는 고백과 나의 현실적인 처지를 생각한다면 해답은 이미 나와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또다른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쨌거나 나는 냉정해질 필요가 있었다. 오늘 하루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게 더 오랜 동안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길일 수 있다면 달리 어쩌겠는가. “미안해. 내가 널 싫어하는 게 아니라 나에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그리 고...... 솔직히 말하겠는데, 지금 그녀와 나는 방관동에서 같이 살고 있어. ” “......” “난 문학에 대한 재능도 자신감도 없지만, 그녀를 만나면서 진실한 사랑에 대한 가능성 같은 걸 느꼈어. 아니 진 피?사랑이라고 말할 자신도 지금은 없는지 몰라. 하지만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것 한 가지로 난 만족해. 문학보다도 내 진실이 통할 수 있는 사랑을 실현할 수 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더이상 바랄 게 없어.” “......” “그녀는 스물세살이고 스타지망생이야.” “......”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기도 했어. 내 말은...... 내가 조건과 싸우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게 결코 아니란 뜻이야. 담백하게 말하자면 사랑한 다는 거고, 더 담백하게 말하자면 사랑한다는 것뿐이야. 뭐가 더 필요하지?” “......” “만약 내가 뜻한 대로 진실한 사랑이 구현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 면 시 같은 건 영원히 못 쓰게 돼도 좋아. 어차피 사랑을 구현하지 못하는 거 라면 결국 사랑만 못하다는 얘기 아닌가?” 말을 마치고 나서 나는 잔에 남은 맥주를 마저 비워냈다. 내 속의 어느 곳에 이런 냉기가 내재돼 있었는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시대에 그렇게 진실한 사랑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눈물을 흘리던 좀전과 달리, 서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그녀는 물었다. “뭔가를 얻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어. 채점표 나오듯 결과가 명확해지 기를 원하지도 않아. 네 말처럼, 그냥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쏟아지는 사랑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뿐이야.” 소제목 : 편집장님, 안녕하쇼? “...... 그래, 알았어.” 참담해진 표정으로 그녀는 내쪽으로 내밀었던 [문학세계]를 거두어갔다. 가 방을 열고 책을 그 안에다 넣은 뒤, 좀전까지와 전혀 다른 표정으로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잘해 봐. 그리고......” 말을 멈추고 그녀는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망설임없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 났고, 그런 뒤에 냉랭한 목소리로 나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입을 열었다. “이제 다시는 널 볼 수 없을 거야...... 잘 있어.” 송가희가 <하이델베르그>를 빠져나간 뒤, 혼자 앉아 나는 다시 한잔의 생맥 주를 마셨다. 정작 비참해진 건 가희가 아니라 나일런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 이었을까. 처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맥주잔이 비워졌다. 다시 한잔을 주문 하고 나서 나는 실내의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가희와의 만남이 촉발시킨 또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서였다. “편집장님, 안녕하쇼?” 오장주 형의 목소리를 확인하고 나서 나는 다소 풀어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 했다. “자식아, 한가할 땐 전화 한 통 없다가 하필이면 이렇게 바쁠 때를 골라서 전화할 게 뭐냐?” 내게 한 마디 쏘아붙이고 나서, 수화기를 손에 든 채 그는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이, 미쓰김, 팩스 들어왔어? “편집장님, 그동안 적조했는데 오늘 술이나 한잔 합시다.” 정말 꼭지가 돌아버릴 만큼 대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꺼낸 말이었다. “새꺄, 바빠.” 단호하게 잘라말하고 나서 쓰펄, 팩스가 아직도 안왔어? 하고 그는 짜증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탱자거리다가 내가 전화하니까 귀찮아서 그러는 거 아뇨? 연극하는 거 아 니냐구.” “이 자식, 정말 세상 돌아가는 거 모르는구만.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서 오 늘자 낙원일보 사봐라. 2주 전에 나 ?우리 출판사 책이 초고속으로 승승장구 해서 금주 베스트셀러 종합 2위로 떴다, 2위. 그런데 어찌 바쁘지 않겠냐? 그 러니 술은 다음에 하고 우선 전화부터 끊자. 담에 전화하라구.”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이제 다시는 널 보지 않 을 거야’라던 가희의 말이 문득 뇌리를 스쳐갔다. 가희가 했던 말을 오장주 형에게 그대로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잠시 수화기를 손에 든 채 멍하니 서 있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며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씹새끼.” 소제목 : 사랑한다고, 사랑했다고 바람 부는 세상을 걸어나갔다. 바람은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뒤흔들 고 싶어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세상의 물상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흔들리지 않는데 유독 나만 흔들리며 갈길을 못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송가희는 소설에 뿌리를 내리고 오장주 형은 자본주의적인 일에 뿌 리를 내렸으니, 이제 더이상 그들은 흔들릴 필요가 없을 터였다. 나는 흔들리면서, 타인들은 흔들리지 않아서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__ 이상하게도 저리고 아픈 기운 같은 게 얼핏 뇌리를 스쳐갔다. 흔들리다가 흔들리다가 흔들리지 않는 날의 외로움 무성한 파뿌리처럼 사방으로 자랄 때 다시 흔들리는 곳으로 흔들리면서 흔들리면서 떠나는 사연. 흔들림 비로소 비행이 될 때까지 서서 웃다가 서서 울다가 화장도 아니 지운 삐에로처럼 돌아와 누우면 얼룩진 눈물자욱 기나긴 노래 되는 사연. __ 사, 랑, 한, 다, 고 __ 사, 랑, 했, 다, 고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신문 가판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주머니 에서 동전 세닢을 꺼내 오장주 형이 말하던 낙원일보를 샀다. 그가 뽀求?책광고가 21면 하단에 게재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지면에 ‘종합’과 ‘교양과학’으로 나뉘어진 베스트셀러 목록이 실 려 있었다. [영혼의 여행자들]. 그게 오장주 형이 송가희와 나에게 아르바이트 건으로 제공했던 바 로 그 책이라는 걸 단박 알 수 있었다. 신문을 접어 가판대 옆의 쓰 레기통에다 던지고 나서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겨놓았다. 분명하진 않 았지만, 내 자신이 나도 모를 향방으로 정신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생 각이 들었다.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완강하게 나를 이 끌어가며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것 같다는 희미한 자각이었다. 화류시장, 스타 스페이스, 왕창백화점. 뚜렷하게 그곳을 의식한 것도 아닌데, 어느덧 나는 전적으로 라몽을 환기시키는 기억의 삼각지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변함없이 번잡한 화 류시장의 맞은편, 스타 스페이스의 건물을 잠시 올려다보고 나서 나 는 곧바로 시장으로 접어들었다. 여전히 흐리고 바람이 휘몰아치는 세상, 나의 뇌리에서는 현실과 전혀 다른 장면이 영사되고 있었다. 소제목 : 우연을 가장한 필연 하얀손, 5월, 스타 스페이스. 현실 속으로 떠오르는 전혀 다른 장면을 목도하며 나는 천천히 시장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마디가 길고 유난히 희게 보이는 손, 분홍 - 연 두 - 노랑 - 빨강 - 녹색 - 하양 - 보라의 스카프 물결, 빨간 잠바 속에 샛노란 티셔츠를 걸치고 검정 타이츠를 입은 스물셋, 단발머리 를 찰랑거리며 5월의 부신 햇살을 가르고 경쾌하게 걸어오는 여자. “라몽......” 기억의 세계에서 어른거리는 라몽이 그리워서 나는 걸음을 휘청거렸 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어깨에 부딪칠 때 떪?5월의 부신 햇살이 번 득번득 눈을 찌르는 것 같았다. 맺힌 것도 없이 뭐가 이리도 절박하 게 사무쳐 있는 걸까. 아랫배에다 한껏 힘을 주고 안간힘을 다해 나 는 시장을 가로질러갔다. 백수건달인 나는 보았네 하얀 손이 하얀 스카프를 훔치는 증발의 백주...... 라몽을 처음 만나던 그날의 우연 속에도 시적 감흥이 숨겨져 있었 다. 운명을 조성하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와 나의 만남 속에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 다. 라몽과 오류, 스타 지망생과 시인 지망생, 수평의 세계를 좋아하 는 오류와 수직의 세계를 좋아하는 라몽,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와 사랑을 포기하더라도 기필코 스타 가 되겠다는 라몽. __ 따분했는데, 정말 재밌었어요. 없던 걸로 할 테니 커피 한잔 사 요. 여기까지 따라온 정성도 있으니까. __ 좋아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첫째, 커피 마시는 동안 절대 나 한테 반말하지 말 것! 둘째, 약점 잡아서 사람 약 올리지 말 것! 세째, 커피값은 각자 낼 것! 됐어요? 왕창백화점 5층 커피숍. 라몽을 처음 만나던 날 들어갔던 그곳에 내가 당도한 건 오후 5시가 조금 못 되어서였다. 몸은 한껏 지쳐 있었지만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혼란스럽던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아간다는 것이었 다. 차분해지는 게 아니라 마음에 날카로운 성에가 끼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곳에 당도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있었다. 모카 커피 한잔을 주문하고 나서 나는 곧바로 실내의 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수첩에 적힌 양희경의 무선호출 번 ８?먼저 누르고, 신호 가 떨어진 뒤에 재빨리 커피숍 전화번호를 눌렀다. 한번으로 미심쩍 어 다시 한번 되풀이하고, 이번에는 커피숍 전화번호 뒤에다 8181(빨 리빨리)까지 찍었다. 소제목 : 그렇게 물을 수 밖에? 자리로 돌아와 뜨거운 모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났을 때 카운터의 전화벨이 울렸다. 호출을 하고 나서 2, 3분쯤 지났을 때였다. 설마, 이 렇게 빨리 응답이 오지야 않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카운터 쪽으로 귀가 기울어졌다. 거의 동시에 호출하신 분, 하는 소리 가 들렸다. 전화기를 가슴에 안고 있다가 호출을 받은 건가. “여보세요.” 카운터의 주인으로부터 수화기를 건네받고, 어쩌면 양희경이 아닐지 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호출하셨나요?” 사뭇 도전적인 목소리로 묻고 있었지만, 양희경의 목소리가 맞는 것 같았다. “희경씨?” “네, 양희경인데...... 누구세요?” 금방 떠오르지 않는다는 듯, 이번에는 사뭇 위축된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저, 오류예요.” “어머, 오류...... 씨?” ‘오류’를 길게 늘어뜨리다가 느닷없이 ‘씨’에서 억양이 올리니 까 아주 이상한 여운이 남는 것 같았다.‘오류’라는 종자의‘씨앗'? “어디 있는데 이렇게 빨리 전화를 거는 거죠?” “지금 분식집에 있어요. 근데 오류씬 어디 있는 거죠? 그리고 평생 연락하지 않을 것처럼 말하더니 어쩐 일로 호출까지 한 거죠?”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듯 그녀는 엄청 빠른 속도로 말을 뱉아냈다. “전 지금 화류시장 근처에 있어요. 희경씨를 만날까 해서 왔는 데...... 괜찮을까요?” “거기가 어딘데요?” “여긴 왕창백화점 5층인데...... 희경씨가 있는 곳은 어디죠?” “아, 그럼 잘됐네요. 저도 근처에 있어요. 학원 끝난 뒤에 친구하고 쇼핑했거든요.” “귀찮은 부탁 드리는 거 아닌지 모르겠군요.” “몽이 땜에 그러는 거죠?” 느닷없이, 마치 나의 심중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그녀는 자신 만만하게 물었다. “그렇게 묻는 이유가 뭐죠?”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암튼 20분 내로 제가 그리로 갈 게요.” “그렇게 물을 수밖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는 중얼거렸다. 미처 의식할 겨를도 없이 그때 이미 양희경의 전화는 끊어져 있었다. 소제목 : 누드 사진집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양희경이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뭘까. 식은 커피잔을 들어올리 다 말고 멍한 시선으로 나는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라몽, 윤인준, 양희경. 내가 철저한 국외자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쳐갔다. 양희경과 윤인준 사이에 라몽이 개입하면서부터 문제가 복잡하게 얽 힌 것 같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내가 아는 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라몽이 개입하면서부터 양희경과 윤인준의 관계가 악화되고, 라몽과 양희경의 관계도 또한 악화됐을 거라는 추측. 라몽이 스타 스페이스 를 그만두게 된 것도 양희경에 대한 정신적 부담감 때문일 거라는 추 측. 그렇다면 라몽이 방관동으로 돌아온 날의 폭력과 임신과 누드 사 진은 도대체 뭔가. 한숨을 내쉬며 나는 고개를 돌려 백화점 매장을 오가는 사람들을 내 다보았다. 시선을 고정시키자 사람들의 모습이 차츰 흐려지면서 송가 희와 오장주 형의 모습이 떠올랐다. 송가희가 내게 남긴 ‘이제 다시 는 널 만나지 못할 거야’라는 말과‘다음에 연락해’라는 오장주 형 의 말이 잠잠하게 되살아났다. 말의 의미가 분명히 다름에도 불구하 고, 본질적으로 그 두 가지 말이 동일한 의미망을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가 필요한 시간. 송가희와 오장주 형의 모습이 스러지면서 흰 바탕에 붉은 꽃 프린트 가 찍힌 미니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떠올랐다. 목에는 가늘고 긴 스 카프를 매고 있어 전체적으로 대단히 화사하면서도 발랄한 분위기의 차림새였다. 그녀가 양희경이라는 걸 나는 이내 알아차릴 수 있었다. “ 윷?기다렸죠?” 고개를 까닥하며 그녀는 환하게 웃어보였다. “아뇨,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뭐 마실래요?” “저요?...... 음, 아이스크림 먹을게요. 쫄면하고 떡볶이 먹었더니 너 무 매워서 지금도 얼얼해요.” 입을 동그랗게 오무리고, 거기다 부채처럼 손을 갖다대고 흔들며 그 녀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친구분은 갔나요?”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고 나서 나는 물었다. “내가 같이 가자고 했더니 싫대요. 걔도 몽이를 아는데...... 여기 오 면 불편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드나봐요.” “불편하다구요?” 자세를 고쳐앉으며 나는 물었다. “걔도 사실은 내가 소개해서 티모시 기획에 속해 있던 애거든요. 근데 거기서 얼마 전에 그만뒀어요.” “이유가 뭐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결정적인 건......” “누드 사진집요?” 소제목 : 몽이가 마음에 걸려요 “누드 사진집 얘길 어떻게 아세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가 물었다. “그냥...... 정확한 건 몰라요.” “요즘도 몽이 만나나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눈빛으로 앉아 있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 다. “만나다뇨...... 얼마전에 다시 방관동으로 돌아왔어요.” “다시...... 돌아왔다구요?” 탁자 위에 올려지는 아이스크림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두 눈을 동그 랗게 뜬 채 그녀는 나를 쳐다보았다. “다시 돌아온 거죠. 근데 희경씬 어떻게 된 거죠? 티모시 기획, 윤 인준이라는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라몽과의 관계...... 그런 거에 대해 사실 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오늘 호출을 한 것도 사실은 그런 데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어요.” “......” 갑작스럽게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탁자 위에 올려 진 아이스크림을 그녀는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희경씨와 전,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얘기를 주 고받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닌가요?” 그녀를 독려하듯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 가지가 너무 복잡하게 얽혀서......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 게 시작해야할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몽이에 대해 미 안한 감정도 있구요.” 고개를 들어올리긴 했지만, 시선을 여전히 아이스크림에다 고정시킨 채 그녀는 입을 열었다. “몽이에게...... 희경씨가 미안해 해야 할 이유가 뭐죠?” 정말 의아한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티모시 기획 윤인준이라는 사 람과 결혼을 하려 했던 여자가 바로 그녀가 아니었던가. 라몽의 출현 으로 윤인준과의 관계가 악화됐다면, 아무리 도량이 넓은 여자라도 저런 말은 쉽사리 입 邦막?꺼낼 수 없으리라는 게 내 판단이었다. “티모시 기획하고 관계됐던 일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꼭 한 가지 몽이가 마음에 걸려요. 괜히 나 때문에 나쁜 인간에게 걸려든 거 같고......” “나쁜 인간이라뇨?” 자세를 고쳐앉으며 다소 긴장된 목소리로 나는 물었다. 소제목 : 그 자식은 인간도 아녜요 “티모시 기획도 그렇고 윤인준이라는 인간도 그렇고...... 다 속은 거 예요. 제가 그 인간에게 속았기 때문에 몽이나 다른 몇 명의 애들까 지 피해를 보게 된 거라구요.” “윤인준이라는 그 사람, 전에 방송국 피디도 하고 그 분야에 발이 넓다고 하지 않았나요?” 윤인준이라는 미지의 인물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건 그것이 전부였 다. “그 자식은 인간도 아녜요. 몽이가 그렇게 된 것도 몽이가 나빠서 가 아니라 그 자식의 술수에 넘어갔기 때문일 거예요. 내가 맨 처음 티모시 기획에 寗撻? 것도 아는 언니의 소개 때문이었는데...... 아무 것도 모른 채 나도 몽이처럼 그 자식의 꾐에 빠져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어요.” “결혼하기로 한 사이 아니었나요?” “속아넘어간 내가 바보예요. 자기 모든 걸 걸고 나를 스타로 만들 어 주겠다는 말에 앞뒤 살피지도 못한 채 깜빡 속아넘어간 건데...... 나를 티모시 기획에 소개해 준 그 언니와 그 자식이 그렇고 그런 사 이였다는 걸 난 까맣게 모르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희경씨도 이미 몽이 같은 처지를 경험했다는 건가요?” “배역이 바뀐 것뿐이지 다른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땐 내가 그 언 니를 배신한 꼴이 된 거고 지금은 내가 그 언니 입장이 된 거죠 뭐. ”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윗부분이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스푼으로 걷어냈다.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면 누구나 그렇게 쉽게 넘어가 나 보죠?” 양희경이 아니라 라몽을 염두에 두고 나는 그렇게 물었다. “...... 그런 건 말하고 싶지 않아요. 어차피 꿈을 꾸는 것같은 일인 데, 꿈을 꾸면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순 없잖아요. 몽이가 그 자식과 그런 관계가 됐을 때, 솔직히 말해 전 몽이를 무척 원망했었 어요. 그 일로 난 티모시 기획을 그만둔 건데...... 시간이 흐르면서 아 무래도 뭔가가 이상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사람을 시켜 그 자식 뒷조사를 해봤어요.” “......” “사기 전과 두 번, 폭력 전과 한번...... 그리고 방송국 피디였다는 것도 샛빨간 거짓말이었어요. 티모시 기획이란 곳이 뭐하는 덴 줄 아 세요?” 고개를 들고 올곧게 나를 바라보며 그녀가 물었다. “......” 대답 대신 나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긴 정식 모델 에이전시도 아니고 <티모시>라는 이름의 카페예 요. 소속 모델들이나 모델 지망생들이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런 곳이예요. 그러 거 저런 거 그 자식의 정체를 다 알고난 뒤에 내가 소개해서 그곳에 적을 두게 된 몇 명의 애들 땜에 정말 무척 맘 이 괴로웠어요. 그래서 얼마 전에 하나하나 걔네들을 만나서 사실을 전부 알려줬어요. 아까 분식집에서 만났던 친구도 그 중의 하나예요. ” “그럼 몽이도 만났나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으며 나는 물었다. 소제목 : 미안하다고 전해 주세요 “몽이를 포함해서 내가 그곳에 소개해 준 애들이 모두 세 명이었는 데...... 내 얘기 듣고 나서 나머지 둘은 거길 그만뒀어요. 하지만 몽이 는 나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뭔지, 도무지 날 만나려고도 하지 않 아요. 그만둔 두 명도 누드 사진집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다가 내 얘 길 듣고 곧장 그만 둔 건데......” “근데 그 누드 사진집은 어디서 만드는 거죠?” 낙원장, 라몽방에서 보았던 사진과 제작 후기를 떠올리며 나는 물었 다. “그거...... 사실은 불법인데, 윤인준 그 자식이 이상한 출 퓨玲?손 잡고 직접 제작하는 거예요.” “참가하는 모델들이 꽤 많은 것 같던데, 그 여자들은 누구죠?” “여기 저기 수소문하면 그런 거라도 찍겠다고 나서는 애들 부지기 수예요. 열여섯, 열일곱살짜리 여고생들도 있는 걸요. 그리고......” 모르면 가만 있어라, 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고 나서 뭔가를 주저 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그리고 누드 사진집 말고도 뭔가를 기획하는 눈친데...... 몽이가 걱 정이예요. 돈 오백만원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너무 꽤심해서 그만둔 얘들하고 전 그 자식을 사기죄로 고소를 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데...... 몽이가 너무 순진해서 그 자식의 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 같애요. 지금은 소속된 애들도 거의 없으니까 악착같이 몽이를 놓 아주려고 하지 않을 텐데......”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윗부분이 거의 다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을 물 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놓아주지 않는다는 건 이용할 거라는 뜻인가요?” “당연하죠. 거기 있던 애들, 윤인준에게 크건 작건 일을 하고도 모 델료 한푼 받지 못했으니까 알 만 ?거잖아요. 암튼......” “......” “암튼 몽이한테 미안하다고 전해 주세요. 전 다음달쯤 일본으로 갈 예정이라서 어쩌면 평생 못 보게 될지도 모르는데......” 거의 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숟가락으로 천천히 저으며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일본은 무슨 이유로?” “이제 이 지긋지긋한 꿈에서 깨어나고 싶어서요. 나이 더 들기 전 에 일본 가서 한 일년쯤 디자인 공부나 해야겠어요. 저도 오류씨 같 이 좋은 사람 만났으면 이렇게 힘겹고 황당무계한 꿈에서 더 일찍 깨 어날 수 있었을 텐데...... 암튼 몽이한테 잘해 주세요. 걘 내가 스타 스페이스에서 만난 애들 중에 가장 심성이 맑고 착한 애였어요.” “......” 소제목 : 나몽과 라몽 권유인지 부탁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얘기들이 이윽고 마음 을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그녀의 얘기는 요컨대 심성 이 아무리 착하고 맑은 사람일지라도 한번 스타의 꿈에 빠지기 시작 하면 모든 걸 망각할 수도 있다는 얘기에 다른 아무것도 아닌 것 같 았다. 스타. 대중에 의해 존재하고, 대중을 위해 존재하고, 대중에 의해 만들어지 는 존재가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그 강렬한 욕망의 이면엔 철저하게 '자신에 의한 자신을 위한 자신의 스타’라는 자기 망상이 내재돼 있 는 것 같았다. 라몽이 그와같은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 엇을 위해 나는 앞날을 견뎌야 하는가. 나몽과 라몽.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분명하게 이원화된 인물이 거기, 허공에 매달려 선택을 종용하듯 시야를 어지럽혔다. 내 가 원하는 건 라몽이 아니라 나몽이야, 하고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소망은 뚜렷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나몽을 이루는 게 라몽이라는 자각이 꼬리를 물고 뇌리를 스쳐간 때문이었다. 이게 진정 선택의 문제인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라몽이 아니라 나몽을, 그러니까 맑고 깨끗한 심성의 소유자를 원한다 해도 현실적으로 그건 실현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라몽으로 존재 하고, 라몽으로 자신을 부각시키고 싶어하는 그녀의 현실적 욕망을 무슨 수로 내가 거세시킬 수 있단 말인가. “몽이하고......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어떤 쪽으로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내가 좆Ю黴피?표정으로 앉 아 있을 때 양가희가 조심스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상태...... 나도 잘 모르겠어요. 지금 그녀는 깊은 침묵의 늪에 빠져 있지만, 그게 태풍 전야의 정적 같아서 은근 히 두렵기도 해요. 희경씨 생각엔 제가 그녀를 위해 뭘 어떻게 해주 는 게 가장 좋을 거라고 생각하죠?” 정말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나는 자세를 고쳐앉으며 물었다. 그녀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고, 아주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눈빛으로 내 등 뒤쪽을 응시했다. “오류씨가 몽이 錤?해 줄 수 있는 거......” 말을 하면서도 다소 쑥스럽다는 듯 그녀는 연한 매니큐어가 발린 오 른손 중지 손톱을 왼손으로 연해 만지작거렸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 가, 이번에는 거의 단정적으로 양손을 탁자 밑으로 내리고 재빨리 이 렇게 입을 열었다. “몽이의 꿈이 저절로 깨질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주는 일밖에 없을 거예요.” 소제목 : 달 없는 그믐 밤 무질서한 시간 속으로. 백화점 커피숍에서 나온 직후, 양희경과 나는 사뭇 어색한 분위기로 헤어졌다. 그 어색함이 어디에서 기인된 건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어색함의 저변에 기이한 동류의식 같은 게 어른거려서 나는 더욱 난 감한 기분으로 그녀에게 등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라몽과 양희경 뿐 아니라 내 자신까지 그들과 처지가 대단히 흡사해진 것 같다는 자 각은, 요컨대 청춘의 희망봉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엄습하는 일종의 우울 증세 같은 것이랄 수 있었다. “양희경......” 바람 부는 도심을 걸어나가며, 마음의 이정표를 헤아리지 못한 채 나는 휘청거렸다. 빌딩과 빛과 사람들이 나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끝 없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열어 주세요, 부드럽게 열어 주세 요, 하는 노랫소리가 귓전으로 밀려들었다. “라몽......” 스물 다섯이라는 나이를 분명하게 자각하고 싶었다. 어떤 흔들림이 나 망설임도 없이, 사랑에 대해서건 인생에 대해서건, 뚜렷하고 명징 하게__ 라몽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그녀의 꿈이 깰 때까 지 기다려 주는 일뿐이라 해도 뚜 피?자각만 있다면 괜찮겠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래 그래, 자각이 자신감으로 전이될 수만 있다면 아무 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가희......” 정신없이 나는 걸음을 옮겨놓았다. 빌딩의 물결, 자동차의 물결, 사 람의 물결이 시선끝에서 희붐하게 지워지고, 안개가 일고, 시 같은 게, 아니 그런 느낌이, 수세기 전의 전설처럼 희미하게 오감을 건드리 는 것 같았다. 아무리 건드려도 나를 일깨울 수 없다고, 이미 깨어 있 기 때문에 더이상 일깨울 수 없을 거라고, 내 자신에게 단호하게 소 리치고 싶었다. 신념을 넘어서는 게 부드러운 자연스러움이라는 걸 나는 안다고, 그런 흐름 속에 내재돼 있는 게 시라고, 나 아닌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소리치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건 어느 것 한 가지도 노래가 되지 않았고, 소리치고 싶다는 어설픈 충동만 세상의 완강한 벽에 부딪쳐 섬뜩한 반향의 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달 없는 그믐밤, 내가 정녕 사막의 길을 가고 있는가. 길 없는 곳에서 길을 찾는 인간이여 어리석음이 어리석음을 뒤덮어버리듯 지도를 지니지 않고서는 潁렝?건널 수 없으리 사막의 지도 안에는 보이지 않는 비밀 비밀뿐인 세상의 모든 것이 숨겨져 있다네 길 없는 길의 사막에서 마음의 눈이 길처럼 어두워질 때 무엇이 없는 눈의 눈처럼 길 없는 길의 등(燈)이 될 수 있으리 마음의 빛을 잃고도 빛의 환상에 시달리는 너 중심 없는 중심에 몸을 의지한 인간이여 지도를 지니지 않고서는 사막을 건널 수 없으리 소제목 : 빛이 닿지 않는 곳 그믐밤, 달 없는 하늘을 몇 번이나 올려다보며 우울한 심정으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라몽을 위해 뭔가 먹을 걸 사고 싶었지만, 묵중한 감정의 무게에 짓눌려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빌라 입구로 들어서서 무심결에 위를 올려다 보았지만 어쩐 일인지 집에는 불이 밝혀져 있지 않았다. 자나? 고개를 갸웃하며 나는 걸음을 좀더 빨리 했다. 어쩌면 내가 나간 이후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먹지 않은 채 라몽이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을지도 모 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계단을 뛰다시피 올라가서 곧장 벨을 눌렀다. “알라바마?” 나오라는 라몽은 나오지 않고 문안에서 알라바마가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 다. 다시 한번 벨을 누르고, 30초쯤 지난 뒤에 다시 한번 눌렀다. “라몽!” 여전히 아무런 기척이 없어 꽤 커다란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두어 번 출입문을 두드려보았다. “나간 건가?” 난감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혹시나 해서 나는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가지 고 나가지 않은 기억이 분명하니 주머니에 열쇠가 있을 턱이 없었다. “어디로 간 거지......?” 등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며 나는 난감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불길하고 상 서롭지 않은 예감이 순식간에 머리속을 점령하는 것 같았다. 체념과 분노의 감정이 거의 동시에 가슴 속에서 뒤섞이며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 같았다. “이제 다시는, 제발, 라몽......” 애원하고 기도하는 심정이 되어 나는 중얼거렸다. 골목 이곳저곳을 두리번거 리며 다시 불빛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골목이 끝나고 차도가 보 이는 지점에 서서 아주 여러번 사방을 두리번거려보았다. 불빛이 있는 어느 어디에서도 라몽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 섬광처럼 뇌 ??스쳐가는 생각에 사로잡혀 나는 입을 벌렸다. 어쩌면, 어쩌 면 빛이 닿지 않는 곳에 라몽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뜩한 예감 때문이었다. “빛이 닿지 않는 곳......” 어둠 속에 라몽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각!__ 그것은 의외로 나를 절망스럽 게 만들었다. 심한 갈증을 느끼며 골목의 이곳저곳,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 을 나는 정신없이 둘러보았다. 라몽에 대한 나의 생각이 그토록 비관적인 것 으로 뒤바뀐 것인가, 라몽의 인생이 실제로 어둠에 휩싸인 것인가. 소제목 : 둥실둥실 떠흐르는 라몽의 환영 빛이 닿는 곳과 빛이 닿지 않는 곳을 두리번거리며 나는 초조한 심정으로 골 목을 빠져나갔다. 인도에 서서 불안에 사로잡힌 눈빛으로 좌우를 살폈다. 빌 딩 건물이 있는 맞은편을 보고 나서,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나도 모르 게 어둠이 깃든 쪽으로 시선이 쏠리고 있음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강......” 불야성의 세계가 아니라 어둠이 넘실거리고 있을 강쪽을 바라보며 나는 뭔가 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중얼거리며 천천히 그곳으로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어둠, 라몽, 강......” 불길함에 강도를 더하듯 섬뜩한 예감이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온몸 이 맥진해지는 것 같았지만, 그것을 이기기 위해 나는 어금니를 악다물고 걸 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길을 건너고, 강쪽으로 나가는 인도로 접어든 뒤부 터는 정신없이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라몽, 제발......” 다시 한번 기도하고 애원하는 심정으로 나는 정신없이 달리며 중얼거렸다. 어둠의 흡반같은 강, 그곳에서 둥실둥실 떠흐르는 라몽의 환영이 자꾸만 눈앞 에 어른거려 금방이라도 허방을 짚을 것처럼 마음이 다급해졌다. “라몽......” 歐曆?접어들자마자 나는 다시 평상적인 보행으로 돌아갔지만, 마음의 행보 는 여전히 뜀걸음처럼 다급하고 위태로웠다. 둑길에 드문드문 세워진 보안등 빛으로 계단을 헤아리며, 아주 천천히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사선으로 내려 다보이는 전방에 젊은 남녀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우뚝 걸음을 멈추고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살펴보았다. 남자는 몸집이 상당 히 좋아보였는데, 상대적으로 몸집이 작고 가늘어보이는 여자의 어깨 위로 그 의 팔이 한겨울의 목도리처럼 풍요롭게 둘려 있었다. 여자의 뒷모습, 그녀의 헤어 스타일만으로 ?나는 그녀가 라몽이 아니란 걸 단박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라몽처럼 단발이 아니라 아주 짧은 숏 커 트 모양새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시선을 전방으로 옮기며 나는 앞쪽으로 걸어나갔다. 여전히 사선으로, 오십여 미터쯤 앞의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 누군가 혼자 앉아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걸음을 좀더 빨리 하며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라몽이 방관 동을 떠난 뒤, 그녀에 대한 견딜 수 없는 감정 때문에 알라바마를 버리러 왔 던 바로 그 부근의 경사진 계단이었다. “라몽......” 걸음을 멈추고 譯瑩?계단을 내려다보며 나는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거기, 계단의 중간쯤에 홀로 앉아 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 그녀가 라몽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차린 때문이었다. 소제목 : 그믐밤의 강 같은 라몽 걸음을 멈추고 서서 나는 라몽의 뒷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순간적으로 발목을 부여잡는 망설임, 그것이 그녀에게로 선뜻 걸음을 옮기지 못하게 했다. 홀로 뒷모습을 보이고 앉아 있는 그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세상에 대한 완강한 거 부감 같은 게 느껴진 때문이었다. 어쩐다?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달 없는 그믐밤, 낡은 빌로드 같은 대공에 드문드문 별이 돋아난 게 보였다. 길게 한숨을 내 쉬며 다시 그녀의 뒷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그녀를 홀로 내버려두는 게 지금은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움푹, 발목이 땅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 았다. 홀로인 상태가 외로워도, 홀로인 상태가 차라리 나을 때__ 더러는 그럴 때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선험적인 주관처럼 묵연하게 뇌리를 스쳐갔다. 정말 견딜 수 없는 게 뭔가. 정말 견딜 수 없는 건 내 자신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며 한 칸, 나는 돌계단 을 밟고 아래로 내려섰다. 그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라몽의 뒷모습을 내 려다보며, 아주 단순하게 뭔가에 대해 격렬하게 분노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분노하고 통곡하고 싶은 마음, 쟁투하고 물어뜯고 싶은 마음__ 그 억압된 울분을 어떻게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그믐밤이야......” 벌떡 몸을 일으키고 다시 한 칸, 나는 돌계단을 밟고 아래로 내려섰다. 그때 흠칫 놀라는 기색으로 라몽이 뒤를 돌아보았다. “......” 그녀의 시선에 포박당한 채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설원을 훑고가는 삭 풍과 눈보라 속에서 그녀와 나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접착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세기 전부터 시작되어온 사랑이 희망과 좌절, 비상과 추락을 거쳐 이제는 끈끈한 연민으로 서로의 가슴을 저리게 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저 렇게도 하지 못하게 하는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힘__ 스스로 출구를 찾아내지 못하면 영원히 병(甁) 속에 갇혀 있어야 하는 건가. 그믐밤의 강 같은 라몽.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한 칸 한 칸, 나는 주술에 걸린 사람처럼 천천 히 돌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도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나의 동작을 지 켜보고 있었다. 그믐밤의 강, 건너편 아파트 단지에서 밀려나온 불빛이 표류 하듯 수면 위에서 느리게 일렁이고 있었다. 돌계단, 그녀가 서 있는 곳까지 내려가서 나는 그녀와 마주되게 섰다. 앉아 야 할지 서야 怒? 어느 쪽으로도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눈빛 으로 물끄러미 그녀를 보자, 힘없이 그녀가 내 가슴으로 무너져왔다. 소제목 : 섬뜩한 고적감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나는 조심스럽게 돌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상체를 여전히 내 가슴에 의지한 채, 고개를 옆으로 들어 그녀는 다시 강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물비늘 위에 건너편의 오렌지빛 불빛이 얹 혀 방금 떨어진 꽃잎처럼 하롱이고 있었다. “왜 혼자 이런 곳에 나왔어?” 강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나는 물었다. “......” “겁나지 않아?”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증발해 버리고, 이 지상에 그녀와 나 단 둘만 남겨진 것 같다는 섬뜩한 고적감을 느끼며 나는 다시 물었다. “아니...... 너무 답답해서 나왔어.” “그럼 알라바마라도 데리고 나오지.” “......” 그녀가 자신의 손바닥을 내 무릎 위에 얹었다. “난 사계절 중에 겨울을 가장 좋아해.” “류......” 손가락으로 내 무릎 위에다 뭐라고인가 글씨를 쓰며 그녀가 나를 불렀다. “왜?” “류는 부모님 보고싶지 않아?” “......” “......” “난 겨울도 좋아하지만 비발디는 더 좋아해. 너무 좋아서 음반도 사지 않아 . 너무 좋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해녀들이 전복이나 해 岾?따러 바 다로 들어가지만 가장 크고 좋은 건 결코 따지 않는대. 왜냐하면...... 뭍으 로 간 님이 오시는 그날을 위해 은밀하게 남겨두는 거래.” 말을 하면서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자꾸 딴말을 하는 거야?” 문득 상체를 세우고 그녀가 나를 보았다. “햇볕이 따사로운 가을날, 맨발로 도보 여행을 하면 참 좋을 거야.” “......”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녀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소제목 : 라몽이 내곁에 있는 한 “맑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가재를 잡는 것도 좋을 거야.” 그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물비늘이 일렁이는 강을 내려다보며 나는 혼 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류......” “익어가는 옥수수나 콩을 따서 들판에 앉아 구워 먹어도 좋을 거야. 잠자리 를 잡거나 메뚜기 같은 걸 잡을 수도 있겠지.” “미안해, 류......” 그녀가 나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자신의 이마를 나의 뺨에다 갖다댔다. “흘러가는 뭉게구름......” 변함없이 강을 내려다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미안해...... 다시는 부모님 얘 ?꺼내지 않을게.” “......” “왜 우린 이렇게 힘들 때 정신적으로 의지할 사람이 없는 거지?”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마.” 싸늘하고 냉랭한 목소리로 나는 잘라말했다. “부모님 얘기?” 고개를 들고, 젖은 눈으로 그녀가 나를 보았다. “아니.” “그럼...... 무슨 얘기?”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말.” “......” 놀란 표정으로 그녀가 입을 벌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 미안해” “적어도 라몽을 만난 이 캤壙?나는 오랫동안 내가 고심해오던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어. 부모와 가족...... 내가 인정할 수 있는 것과 내가 인정할 수 없는 것...... 라몽이 내 곁에 있는 한 그런 문제로부터 영원히 자 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어. 왜인 줄 알아?” 묻고났다. “......” 나를 올려다보며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 소제목 : 사랑이 완성될 수만 있다면 “그건 내가 라몽을 가족의 개념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야. 지상에서 내가 인 정한 최초의 가족, 그게 바로 너였던 거야. 알아?” 말을 하고나서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빛으로 그 녀가 여전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강을 내려다보았다. 바람이 부는가, 잘디잔 물비늘이 강 이쪽으로 잠잠하게 밀려나오면서 파문처 럼 크기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류...... ”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녀가 내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내려다 보자 눈물에 젖은 눈빛으로 나를 올 졍暮만?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앉으면 안돼?” 애처로운 눈빛, 안타까운 표정__ 이것이 내 입장을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그녀를 위해서도 아니고, 그녀와 나를 위해서도 아니고, 오직 내 자신을 위해 뭔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쨌 거나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꿈꾸어온 모든 것. 그런 것들이 풍요로운 기억으로 잠잠하게 뇌리를 스쳐갔다. 잘디잔 물비늘이 바람에 밀려 이윽고 물무늬마저 없어지는 과정을 내려다보며, 그것이 실현 가능하고 온당한 꿈이었는지를 나는 되새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명의 아버지를 두고도 끝내 아버지를 부정하고자 하는 의식의 고집__ 그 것으로 키워온 내 꿈 속에 고아의식의 결기 같은 게 또아리를 틀고 있었는지 도 모를 일이었다. 조건이 아무리 좋은 삶일지라도, 인생은 어차피 혼자 떠나 는 무전여행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교리처럼 마음에 아로새긴 스물 다섯, 이방인이나 주변인처럼 끈덕지게 홀로된 삶을 나는 사수하려 한 게 아 니었을까.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라몽이 내 눈앞에 나타나던 어느 봄날부터 나는 오래 ?꿈에서 깨어나기 시 작했다. 깨어나서 또다른 꿈 속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다. 홀로이고자 하는 마음의 빗장을 처음으로 열고, 내 인생에 있어 단 한 명, 그녀를 내 삶의 영 역으로 받아들여 홀로됨의 많은 어려움을 함께 견뎌가고 싶어한 것이었다. 사랑으로 완성되고 동반으로 끝나는 꿈. 그것이 아무리 허망한 꿈이었다 해도 후회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녀와의 사 랑이 완성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시를 포기해도 좋다는 생각을 했었다. 시뿐 아니라, 그것이 무엇이든 사랑을 위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포기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나는 했었다. 포기하지 못할 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소제목 : 현실적으로 우린 뭐지 라몽의 꿈을 내가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녀가 스타가 되고자 하는, 그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욕망의 뿌리가 얼 마나 깊은지를 내가 모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다만 그녀의 꿈 에 사랑이 함께 깃들 수 있기를 바랬을 뿐이었고, 그런 게 실현 불가능 한 일이라는 생각을 결코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게 잘못이라면 잘못 일 수 있었다. 세상에 사랑을 전적으로 도외시할 수 있는 꿈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꿈일 수 없을 거라는 판단__ 요컨대 그런 믿 ? 을 나는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무엇이 그녀와 내게 남겨졌는가. 어둠을 싣고 더욱 깊어지는 강을 내려다보며 나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라몽과 나 사이에 생겨난 아픈 거리감이 어둠에 젖은 강보다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거리감을 수용하는 그녀와 나의 태도에 더 큰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시 그녀 옆에 앉아야 한다면, 어차피 그 런 것에 관해 그녀와 나는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으리라. 개뺐?라몽에 관해 아는 게 과연 뭘까.” 강에다 시선을 고정시키고 아주 천천히 돌계단에 다시 앉으며 나는 입을 열었다. “......” 말없이, 어깨를 움츠리며 그녀는 나를 보았다. “오늘 대학 동창을 만났어. 그 친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소설가가 됐고, 다른 선배 한 사람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 사람도 흔들림 없 이 열심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더군. 누구에게나 자기 앞의 생이라는 게 있을 테니까.... .. 그들의 현실적인 변화 때문에 흔들리는 건 아니지만, 어떤 땐 그들 처럼 나도 적극적인 변화를 시도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대학시절에 입에 올리던 이상과 정의, 그런 걸 사회에 나와서도 굳세 게 지켜가야 한다고 고집하는 건 아니지만, 주변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길을 가는 걸 지켜보면서.. .... 그래, 나도 모르게 자꾸만 뇌리에 ‘현실’이라는 말이 이상한 소 용돌이를 이루고 있어.” 말을 하고나서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 고개를 숙인 채 그녀는 돌계단의 아랫부분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몽과 나...... 현실적으로 우린 뭐지?” “...... 미안해, 류.” 들릴락말락하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아니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싶어서 꺼낸 말이 아냐. 그냥 모든 게 답답하고 안타까워서 그러는 거야.” “...... 다 나 때문이야. 모든 게 다......” 그녀의 흐려지는 말끝에 진한 울음기가 배어 있었다. 소제목 : 미워할 수 없다는 거 “아니, 그렇게 말하지 마. 이건 누구의 잘못을 따져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거야.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벌써 오래 전에 난 널 포기했 을 거야.” “류......” “......”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솔직히 말해 줘. 날 증오하지?” 힘도 열정도 말끔히 증발해버린 듯한 눈빛으로 그녀가 나를 보았다. “증오의 힘 때문에 내가 라몽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 야?” “류가 아직도 날 사랑한다는 게...... 아니, 아니야. 이런 말을 하려 했던 게 틈祁?.....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어.” 갑작스럽게 그녀는 자신의 무릎 사이에다 얼굴을 묻었다. “모든 게 다 설명될 수 있는 건 아닐 거야. 힘들면 말하지 마.” 마치 내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그녀의 등을 내려다보며 힘없는 목소리 로 나는 중얼거렸다. “이제 더이상 난 류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난 모든 걸 다 잃어버 렸어. 왜 살아 있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 이렇게 추하게 더럽혀진 몸과 마음으로...... 내가 왜 아직 류에 게 짐이 되고 있는 거지?” 무릎과 무릎 사이에다 얼굴을 묻은 채,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 다.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마. 다 지나가는 과정일 거야.” 조심스럽게 나는 그녀의 등에다 손을 얹었다. “나...... 정말 후회 많이 했어.” “뭘?” “내가......” 어깨를 들먹이며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 말없이, 나는 그녀의 등에 얹은 손을 그녀의 어깨로 옮겨갔다. “...... 류에게 내 모든 걸 다 주고싶었는데......” 문득 고개를 들고 눈물 젖은 얼굴로 그녀는 나를 보았다. 정지된 시선이 순간적으로 당혹스러워서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꼼작도 할 수 없었다. 입언저리를 일그러뜨리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마...... 이제 난 류에게 아무것도 줄 수가 없어.” “무엇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같은 건 처음부터 하지 않았어. 모든 게 내 속에서 시작된 일이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내가 아는 건 아직도 내가 라몽을 사랑한다는 것뿐이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미워할 수 없다는 거야.” 소제목 : 류!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녀 가 물었다. “우리......” 말을 끊고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와 나, 그리고 우리에 대 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시선을 돌려 강을 내려다보며 아주 나직 한 목소리로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어. 라몽이 지니고 있는 꿈...... 그게 우리의 미래를 가로 막고 있다는 말은 할 수 없겠지만...... 그러면서도 왠지 모르게 그게 자꾸 마음에 걸려.” “내...... 꿈? ? 다소 놀란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그래, 스타가 되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고 싶다는 라몽의 꿈 말야.” “아니...... 이제 나에겐 그런 꿈도 없어. 한때는 그런 생각으로 하루 하루를 꿈꾸듯 살았지만...... 이제는 아냐. 이젠 그런 꿈이 내게서 다 날아가버렸단 말야.” 무릎과 릎 사이에다 다시 얼굴을 파묻고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가슴이 아렸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등에다 손을 얹지 않았다. 그래, 네 속이 후련해질 때까지 많이 울어라......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 ? 가슴 속에서 맴돌이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꿈이 날아가버렸다는 건...... 그걸 포기했다는 뜻인가?” 잔물결 이는 강의 수면에다 시선을 고정시키고 나는 물었다. “...... 이렇게 더럽혀진 몸과 마음으로...... 이제 더이상 내가 무슨 꿈 을 꿀 수 있겠어? 그래서 난...... 류와 함께 있는 것도 괴롭고 고통스 럽단 말야.” 사이사이, 그녀는 말을 멈추고 솟구쳐오르는 오열을 토해냈다. “나와 함께 있는 게 괴로워?” “응, 내가 무슨 염치로 류에게 이런 대접을 받고...... 내가 무슨 양 심으로 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겠어? 죽고싶다는 생각밖에 없어.” “......” “그러지 말고...... 차라리 날 증오해. 증오하고 저주하고...... 그리고 거리의 여자처럼 아무렇게나 대해 줘. 그러는 게 차라리 편할 거 같 애, 류......”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나를 보았다. “아니, 그렇게 말하지 마.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아직 도 내가 라몽을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 힘들고 어렵지만, 그런 마음을 고쳐먹는 건 더욱 힘들고 고통스러워. 억지로 되는 문제가 아니란 말 야. 알아?” 말을 하고 나서 나도 역시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그녀를 돌아 보았다. “류!” 나의 말을 듣고 나서 그녀가 갑작스럽게 내 가슴에다 얼굴을 묻었 다. 엉겁결에 그녀의 상체를 감싸안자,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그녀 가 사시나무처럼 온몸을 떨어대기 시작했다. 소제목 : 내 속의 악마여! “됐어, 이제 그만......”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나는 말했다. 긴 말, 이제 더이상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류......” 계속 어깨를 떨며 그녀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했다. 더이상 입을 열지 말라는 의미로 그녀의 상체를 감싸안은 팔에 나는 더욱 힘을 주었다. 머릿 결이 찰랑거리는 그녀의 어깨 너머에서 여전히 물비늘을 일으키는 강__ 견 딜 수 없는 힘이 독처럼 온몸으로 번져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부르 르, 이번에는 내가 몸을 떨었다. 무슨 힘인가. 목구멍을 치밀고 올라오는 역한 무엇인가를 느끼며, 나는 안간힘을 다해 아랫배에다 힘을 주었다. 뭔가를 억제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순간적인 위기감__ 이를 악물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칼날처럼 번뜩, 그때 뇌리를 스 쳐가는 누군가의 시가 있었다. 벼랑에서 만나자. 부디 그곳에서 웃어주고 악수도 벼랑에서 목숨처럼 해 다오. 그러면 나는 노루피를 짜서 네 입에 부어줄까 한다. 벼랑에서 만나자, 벼랑에서 만나자...... 하는 말을 나는 연해 마음 속으 로 되뇌었다. 벼랑에서 목숨처럼 나누는 악수...... 노루의 피가 아니라 내 피를 짜서 그녀의 입에 부어주고 싶다는 충동에 나는 다시 한번 몸을 떨었 다. 강물이 크게 흔들리는 게 보이고, 그 흔들림 속에서 더 크게 불빛이 흔 들리는게 보였다. 내 속의 악마여! 마음 속으로 울부짖으며 나는 그녀의 등을 쓰다듬던 손을 멈추었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오른손을 그녀의 등에 밀착시키고 아주 조금씩 그것을 위 쪽으로 옮겨갔다. 핏속으로 독이 녹아드는 듯, 그것이 피를 타고 온몸을 순 환하는 듯, 서서히 눈앞이 흐려지고 이마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무슨 황홀경인가. 그녀의 어깨를 지나는 손의 감촉을 음미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손등에 그 녀의 머릿결이 닿아 깊고 강렬한 자극을 유도하는 것 같았다. 손아귀에서 꿈틀거리는 악력__ 벼랑에서, 벼랑에서...... 라는 말을 다시 되뇌이며 나 는 눈을 감았다. 달 없는 그믐밤. 사방을 에워싼 어둠 속에서 강렬한 빛의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출구 없는 삶으로 방황했던 모든 기억들에 피와 살이 덧붙고, 어둠의 이면에서 아주 조만간 부신 빛살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느리게 움직이던 손이 그녀 의 목덜미에 이르렀을 때, 나의 흥분을 거의 절정에 달해 있었다. 소제목 : 괜찮아, 류...... 내 속의 악마여! 행복에 겨운 심정으로 이 세상 모든 것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어 둠이 걷힌 세상, 온전한 빛항아리 같은 세상, 라몽과 나의 순수한 의지가 사철 내내 꽃처럼 피어날 수 있는 세상...... 그런 걸 꿈꾸며 나는 라몽과 나를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는 물상의 세계를 잠잠하게 잊어가기 시작했다. “류......” 나의 오른손이 그녀의 목덜미에 이르자 그녀가 흠칫 어깨를 떨며 내 이름 을 불렀다. 한 세상 밖, 수세기 전에 나를 관류해간 누군가가 아득한 목소 리로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한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황홀 경이 온몸을 나른하게 하는 것 같았다. “...... 말이 꽃피지 않는 세상, 너와 나는 벼랑에서......” 나도 모르게 입이 열리고, 주술같은 말이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아주 부드 럽게 나는 그녀의 목을 뒤에서 감싸쥐었다. “류......” 어깨를 움츠리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녀가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불렀다. 주술에 대한 화답처럼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절실하게 어울리는 순간이었 다. “...... 사랑의 위력으로 사랑이 죽는 세상, 너와 나는 벼랑에서......” 그녀의 목덜미를 거머쥔 손에 아주 조금씩 힘을 가하며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파하는 모든 것들, 절망하는 모든 것들, 방황하는 모든 것들의 이름을 대신하여. “괜찮아, 류, 괜찮아......” 고개를 들고, 눈물 젖은 얼굴을 내 뺨에다 비벼대며 그녀는 말했다.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이 고스란히 허공에 각인되는 시간. “...... 벼랑에서, 내 피를 너에게, 벼랑에서......” 그녀의 등에 머물러 있던 손을 마저 이끌어올려, 이윽고 나는 그녀의 목을 두 손아귀에 담을 수 있었다. “류...... 편하게 해줘. 괜찮아......” “......” 눈을 감은 채 나는 그녀의 말을 들었다.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가 뱉아낸 말의 파장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파장이 잦아들기 전, 거부의 몸짓이 아 니라는 걸 분명하게 느끼게 하며 그녀가 조심스럽게 내 손아귀를 벗어났다. 내 속의 악마여, 내 속의 악마여! 눈을 뜨고 그녀를 보았다. 아주 희미하게 그녀가 강을 등지고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초점이 변하지 않는 내 눈빛을 올곧게 들여다보며 그녀가 편안 한 표정으로 이렇게 입을 열었다. “괜찮아, 류......” 소제목 : 별이 보여....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뒤쪽으로 활처 럼 둥글게 휘어져나간 돌계단, 그 위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밀려내려 왔다. 고개를 들어올리고,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는 이마 위로 흘 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악마여, 제발! 절박하고 초조한 눈빛으로 나는 그녀를 보았다. 의식의 초점이 흐려 지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조바심이 생겨났다. 지상에 태어나서 단 한번, 이것도 사랑의 이름으로 행할 수 있는 행위라는 생각을 굳히기 위해 나는 한껏 긴장하고 있었다. 보고 듣고 느껴온 모든 것들의 이 름을 무화시키고, 오직 하나 사랑의 이름으로 온전한 빛항아리가 되 길 기대했던 라몽! “이제 됐어.” 긴장과 초조로 한껏 팽창된 내 눈을 응시하며 그녀는 말했다. 내 시 야에서 주변의 사물이 부옇게 흐려지는 동안, 깊고 감동적인 생명력 을 느끼게 하는 동작으로 아주 천천히 그녀는 내게 등을 보였다. 적 연부동한 세상의 심연__ 나와 반대되는 쪽으로 다리를 곧게 뻗고, 잠 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녀는 돌계단 위에 반듯하게 자신의 몸을 눕혔 다. “......” 거꾸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말없이 나는 내려다보았다. 그녀와 내 가 주고받고 싶어하는 모든 말들이 스러져, 그녀와 나를 에워싸는 기 류로 잠잠하게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움지이지 마라, 그대여, 움직이 지 마라.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한 칸, 돌계단 아래쪽으로 나는 내려 갔다. 약간의 거리가 있긴 하지만, 그녀와 나의 얼굴이 평행을 유지하 는 지점을 선택하기 위해서였다. “류......” 무릎을 꿇고 싸늘하게 식은 나의 두 손을 그녀의 가녀린 목에 가져 다대자, 눈을 뜬 채 그녀가 나를 불렀다. 불안과 공포에 질려서가 아 니라, 이를 데 없이 차분하고 담담한 표정__ 이루 말할 수 없이 나를 떨리게 하는 평온함이 그녀의 얼굴에는 가득 번져 있었다. 놀란 기색으로 내가 동작을 멈추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별이 보여.” “......” “......별.” 말을 하고 나서 평안한 표정으로 그녀는 눈을 감았다.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하듯 아주 잠시 나는 눈을 감았다. 그녀와 나를 두고 묵묵 히 흐르는 강, 그것의 심연으로부터 거대한 굉음이 떠오르는 것 같았 다. 강 전체를 밀어올리고 조만간에 세상 전체를 뒤덮을 듯한 전조가 그 점진적인 고조 속에서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소제목 : 죽은 별들! 악마여, 제발! 다급한 심정으로 나는 눈을 떴다. 상체를 굽히고 그녀의 목에 댄 손 에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망설임이 스러지자 나도 모를 힘이 순간적 으로 배가되는 것 같았다. 아니 내 등뒤에서 누군가 보이지 않게 엄 청난 힘을 내게 불어넣고 있는 것 같았다. 악마여! 라몽의 육신이 꿈틀거리는 게 분명하게 느껴졌지만, 나의 내면에는 이제 더이상 아무런 제어력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제어력이 아니라 가속력이 느껴질 만큼 나는 무엇으로부터인가 강렬한 충전을 받고 있었다. “크으...... 류 ......” 라몽이 손을 들어 나의 손목을 잡았다. “안돼, 라몽!” 머리를 들어올리고 나는 눈을 감았다. 강의 심연에서 부상하는 듯한 거대한 굉음, 그것이 속도감을 타고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그 소리에 침해를 받아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은 없어. 저건......” 굉음이 강 건너편으로부터 빠르게 내쪽으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눈 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친 듯 나는 소리쳤다. 강 건너편에서 밀려드는 소리 때문인지 내 목소리도 제대로 분간이 되질 않았다. “네가 본 모든 별들......” 내 등 뒤쪽에서 강이 뒤집히고, 그것이 해일이 되어 금방이라도 내 뒤통수를 후려칠 것 같았다. 손아귀에 마지막 안간힘을 다하며 나는 온몸을 떨었다. “스타라구? 네 눈에 들어왔을 때, 그 별들은 이미 죽은 별들이야, 죽은 별들!” 내 손목을 접고 하체를 버둥거리는 라몽__그녀의 몸부림을 온몸으로 대신하듯 이번에는 내가 몸을 떨었다. 모호하던 굉음은 그때 이미 분 명하게 분절된 뒤였고, 그것 하나하나가 나도 모를 사이에 날카로운 쐐기처럼 내 등판으로 날아와 박혔다. “류!” 엄청난 분절음 속에서, 분명히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 렸다. 초조와 불안을 이기지 못한 채 나는 기어이 뒤를 돌아보고 말 았다. 사이, 그녀의 목에 가하던 힘이 풀리고 순간적으로 명치가 저리 기 시작했다. 아. 뭔가가 울컥, 제대로 느낄 사이도 없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그 녀에게서 떨어져, 구르듯 나는 돌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거기, 어둠이 널브러진 땅에다 머리를 처박고 거의 발작적으로 나는 토악질을 해대 기 시작했다. 내 정신에 깃들어 있던 오물의 일시적 방출__ 신경이 끊어지고 근육이 터질만큼 끔찍스런 고통을 느끼며 나는 땅을 짚고 미친 듯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기나긴 전동차가 유유히 철교를 관통하는 그믐밤. 소제목 : 지옥의 기억, 악마의 시간 맑게 개인 가을 아침. 알 수 없는 소리가 연해 귓전으로 밀려들어 불현듯 눈을 떴다. 몸을 돌려 반듯하게 누우며 아주 잠시 나는 긴장된 눈빛으로 허공을 올려 다보았다. 주방 쪽에서 나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고, 그릇과 그릇 이 가볍게 맞부딪는 소리라는 것도 또한 알 수 있었다. 무슨 변화? 피식, 웃음을 짓고나서 나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라몽이, 아마 도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 때문이었다. 천국과 지옥의 경계를 연일 넘나들며 아픈 시간을 보냈지만, 이제 시간의 자 정 능력처럼 그녀와 나 사이엔 또다른 변화와 평안이 도모되고 있었 다. 자정능력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를 서로가 간구한 결과로 새로운 변화의 시간이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밤, 지옥의 강기슭. 묵연하게 떠오르는 아픈 기억의 중압감을 이기지 못한 채, 눈을 감 으며 아주 길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강변에서 라몽의 목을 조르던 게 어느덧 닷새 전의 일로 밀려나고 있었지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멍자국처럼 그것은 되새길 때마다 견딜 수 없는 아픔과 자괴감을 동 시에 몰고오곤 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아무런 의식의 저항감 없이, 사람이 사람을, 그것도 사랑의 이름으로 죽일 수 있으리라는 공포스 런 자각! 그날밤 늘어진 라몽을 부축해 집으로 데려오는 동안, 끔찍스런 공포 감에서 이제 막 벗어난 사람처럼 나는 내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허망한 해체감과 자괴감,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자기 혐오감 같은 것 깨문이었다. 그때 전동차가 내 충동의 집중력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나는 정말 라몽을 죽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랑을 부정 하고 싶다는 악마적 욕망도 결국은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질 수 있다 는 이율배반적 실행력__ 인간인 내 자신에 대해 그날 밤이 지새도록 그리하여 나는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지옥의 기억, 악마의 시간. 그로부터 거의 삼일 동안 라몽과 나에게는 그런 시간이 지나간 것 같았다. 나는 내 방에, 그녀는 그녀의 방에 틀어박힌 채, 거의 아무것 도 먹지 않고 그녀와 나는 서로 다른 인내의 시간을 보냈다. 몇 번인 가 그녀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 냉장고 문이 열리는 소리, 조심스럽게 물을 마시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뇌리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배가 고플 때마다 알라바마는 내 방문 앞에서 낑낑거렸고, 그럴 때마다 나 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세우고 밖으로 나가 접시 하나 가득 드라이 푸 드를 담아 놈에게 내밀곤 했다. 미안해, 알라바마, 우리를 이해해 줘. 아무런 잘못도 없이 수난을 당하는 알라바마가 정신없이 혀를 놀려 먹이를 먹는 걸 볼 때마다, 왠지모를 연민으로 나는 어김없이 눈두덩 이 욱신거리곤 했다. 알라바마를 사던 날부터 시작된 라몽과 나의 파 국__ 그것이 도대체 언제까지 지속될런지 혹시 알라바마는 알고 있을 까, 하는 의구심이 공연히 눈을 뜨기도 했다. 소제목 : 미워하지 못한다! 쓸쓸한 조락의 계절. 깊은 밤, 눈을 뜨고 있으면 거리로 밀려나가는 바람소리가 아주 가 끔 귓전으로 밀려들곤 했다. 깊고 깊은 정적의 성에 유폐된 듯, 그럴 때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고아의식으로 오래오래 몸서리를 치곤 했 다. 라몽과 내가 남이 아니라, 파렴치한 부모들에 의해 함부로 버려진 오누이 같다는 생각__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라몽의 방 으로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고 목놓아 울고 싶다는 충동이 나를 뒤흔 들곤 했다. __오류, 너는 라몽을 미워하지 못한다! 그렇게 몽롱하게 삼일이 지나가는 동안, 내가 내린 마지막 결론은 그것 한 가지뿐이었다. 어쩌면 그런 정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내 속 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고, 그런 것이 무의식의 부 력을 받아 그녀에 대한 살의로 돌변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죽음 이 외에 달리 더는 내가 그녀와 갈라설 수 없다는 것. __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빛을 보아라, 오류! 삼일째 되던 밤, 깊은 허기 속에서도 나는 격렬한 열정으로 몸을 떨 었다. 그녀로 인해 내가 고뇌했던 모든 시간들, 그녀로 인해 내가 받 은 모든 마음의 상처, 그것이 바로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저 력이 될 수 있으리라는 이상한 깨달음이 온몸으로 엄습해온 때문이었 다. __ 그래 류, 이제 가라! 삼일째 되던 그제 밤, 새벽 한 시가 지난 시각에 나는 라몽의 방으 로 갔다. 말없이 그녀의 침대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나는 들어갔다. 그녀를 안지도 않았고, 그녀가 깨어 있는지를 묻지도 않았다. 어둠이 뼈처럼 견고한 허공을 향해, 그녀를 전혀 의식하지도 않고, 다만 내가 해야 한다고 믿어지는 말들을 나는 했을 뿐이었다. “듣지 않아도 상관 없어. 내가 해야 한다고 믿고, 하지 않으면 안된 다고 생각하는 말을 하기 위해서 왔을 뿐이야.” “......”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나는 다시 입 을 열었다. “너에게 일어난 변화와 아무런 상관 없이, 여전히 난 널 사랑해. 사 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원망한다 해도, 그래도 나로선 어쩔 수 없 어. 너의 목숨을 내가 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악마적인 힘도, 어쩌면 그런 선한 의지에서 비롯된 건지도 몰라.” “......” “어쩔 수 없어. 어떤 경우에도 난 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 이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상식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그래서 난 홀가분할 수 있어.” “......” 소제목 : 단 한번의 사랑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모든 걸, 할 수만 있다면 다시 회복하고 싶 어. 처음부터 다시, 너와 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처음의 그때처 럼 다시...... 모든 걸 다시 시작하고 싶어.” “......”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 알아.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해서 포 기하고 싶지도 않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어쩌면 포기 할 수 없는 걸 거야. 내 힘으로 되지 않는 거.” “......” “시를 영원히 못 쓰게 돼도 상관 없어. 시가 단 한번의 사랑을 완 성하는 일보다...... 적어도 지금은 무가치한 세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다지 아파할 건덕지도 없어. 다만 한 가지......” “......” 깊고깊은 곳에서처럼, 그때 그녀의 한숨소리가 어둠이 빼곡한 허공 으로 밀려나왔다. “너의 꿈을 스타가 아니라 사랑 쪽으로 수정해 줬으면 좋겠어. 내 가 시를 포기해도 좋다고 말한 건...... 그건 내가 현실적으로 너를 생 각하겠다는 뜻이야. 현실적으로 너를 생각하고, 현실적으로 너를 사랑 하고......” “......” “그리고 취직을 해야겠어. 너와 나를 위해, 너와 나에게 필요하다면 그 이상의 일이라도 할 수 있어. 이게 설령은 극단적인 선택이라 해 도...... 어떤 뒷날에도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나는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미흡한 느낌 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것 같 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녀는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고, 가늘고 조 심스런 한숨을 아주 가끔 내쉬었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그녀 가 깨어 있다는 걸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나는 조용히 그녀의 침대에 서 빠져나와 내 방으로 돌아왔다. 숙고의 시간을 보낸 것일까. 침묵 속에서 또 하루의 가을날이 막막하게 흘러갔다. 그녀에게 내 의사를 전하긴 했지만 날이 밝고, 낮이 가고, 다시 어둠이 내려도 그 녀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다시 한번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해 보자는 나의 제안을 그녀는 단지 침묵으로만 거절하려는 것일까. 소제목 : 먼길 적적한 밤. 불을 끄고 창으로 밀려드는 가을달빛을 조명삼아 나는 소주를 반 병쯤 마셨 다. 강, 그 끔찍스럽던 지옥의 기억으로부터 정확하게 4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 홀짝홀짝 소주를 마시며, 알 수 없는 조바심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어 쨌거나 오늘밤엔 그녀의 방으로 가지 않으리라, 취기 속에서도 나는 굳게굳게 마음을 다져먹었다. 영원히? 그래, 그녀가 침묵으로 거부의 의사를 전해 온다면, 그것이 설령 영원으로 이어질지라도 이제 두번 다시는 나의 속내를 그녀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겠다 , 하는 생각을 나는 했다. 한 병의 소주를 비우고 나른한 심정으로 자리에 눕 자, 깊은 밤, 사람들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아무도 없는 지상에 나 홀로 어둠을 지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로 된다는 것. 간단히 요약하자면 그런 감정이었다. 코스모스 핀 오솔길을 홀로 걷거나, 인 적이 끊긴 가을 바다를 홀로 걷거나, 늦가을 비 추적거리는 둑길을 홀로 걷거 나, 낙엽이 지천으로 깔린 숲길을 홀로 걷거나, 잠자리떼 잠잠하게 비행하는 들길을 홀로 걷거나...... 아, 정말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것이 모든 것에 대한 체념이라 해도, 지상에서 홀로 된다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먼 길. 누군가, 아스라한 지평선 저쪽에서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황량한 벌판을 가 로질러오고 있었다. 몇 마리의 갈가마귀가 그 사람의 등 뒤쪽에서 선회하고, 하늘은 암회색으로 잔뜩 끄무러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뇌성벽력이 세상을 뒤 흔들 것 같은 분위기, 왠지 모를 위기감으로 지상의 사물이 하나같이 팽팽한 긴장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누가 오는가. 수십년 동안 벌판을 혼자 지켜온 사람처럼 나는 가슴이 설레는 걸 느꼈다. 그가 누구일지라도, 그의 출현은 오랜 벌판에서의 내 삶에 가장 의미심장한 사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와같은 인간의 출현을 기다리며 나는 벌 판에서의 힘겨운 삶을 견뎌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견딘다는 건 이미 누군가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이고, 예견하는 것이고, 어쩌면 확신하 는 것일 수도 있을 터였다. 나는 그대를 기다렸노라 바람과 비와 눈과 이끼의 시간을 다스리며 그대 홀연히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날까지 태양이 떠오르는 것도 믿지 않고 달이 지는 것도 믿지 않고 오직 그대에 대한 기다림만으로 견고한 시간의 탑을 쌓아왔노라 이제 그대가 걸어오는 길에서 내 기다림이 꽃으로 피어나고 또한 밟힐지라도 억겁의 기다림은 꽃보다 아름답고 피보다 붉어서 다시 죽어도 여기가 내 무덤이요 다시 태어나도 삶의 터전이 되리니 피보다 진한 그리움으로 또다시 눈뜬다 해도 나는 그대를 하염없이 기다리리라 소제목 : 누군가 벌판을 가로질러오는 사람. 그를 맞이하기 위해 나는 딱딱하게 굳은 무릎을 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 났다. 그 사람이 내쪽으로 다가올수록, 왠지 모르게 주변의 정적이 더욱 깊어 지는 것 같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호흡을 가다듬고, 눈을 가늘게 뜨고, 다 가오는 사람을 이윽한 눈빛으로 나는 바라보았다. “오오, 세월을 동여맨 신화의 빛이여!” 나도 모르게 입에서 영탄의 말이 흘러나왔다. 오랜 세월 동안 빛과 어둠을 꿰뚫고 온 그의 행색은 말이 아니게 바래 있었지만, 그 사람에 대한 예감의 기운으로 나는 이내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잠시 전방을 헤아리기 위 해 그가 고개를 들어올렸을 때, 무수한 인연의 역사를 체득한 듯한 그의 눈빛 을 얼핏 나는 보았다. “오오, 저 눈빛!” 나는 거의 심장이 터질 듯한 감동에 사로잡혀 몸을 떨었다. 그것은 신화 속 에 묻혀 있던 억겁 세월 저쪽의 내 사랑을 섬뜩하게, 그것도 한순간에 일깨우 는 눈빛이 분명했다. 그를 맞이하기 위해 정신없이 나는 그가 올라오고 있는 언덕길을 내려갔다. 그가 올라오고 있을 때, 공교롭게도 나는 그가 올라오고 있는 길을 내려간 것이었다. 오르막과 내리막. 순간적으로 길이 엇갈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오르막과 나의 내리막 사이에 찰라와 같은 스침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순간은 정지되지 않았다 . 거의 동시에 그와 나는 서로를 뒤돌아보았지만, 다음 순간부터 모든 것은 시간의 아뜩한 거리감 속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까마득한 지평의 세계. 너무나도 오랜 동안의 기다림과 인내와 외로움이 일시에 살아올라 심장이 찢 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했다. 소리쳐 그를 부르고 싶었지만 어찌된 셈인 지 의도한 소리가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고, 몸을 돌려 그의 오르막을 따라잡 고 싶었지만 나의 내리막은 끝없이 계속 이어져나갔다. 허우적거리며, 하우적 거리며, 안타까움에 질려 서서히 나의 의식은 깊은 농무 속으로 잦아들기 시 작했다. 누군가. 눈을 떴을 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놀람과 안도감 속 에서 나는 달빛이 희미하게 밀려드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내 옆에 누군가 누워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나는 꿈 속의 인물과 내 옆의 인물을 동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을 동여맨 신화의 빛!__ 꿈을 되새기자 갑 작스럽게 눈두덩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삶의 뿌리가 소멸된 듯한 안타까움 과 허망함, 그런 게 견딜 수 없이 명치끝을 저리게 한 때문이었다. 소제목 : 듣고 싶은 말 “꿈을 꾼 거야?” 내 어깨에다 이마를 갖다대며 라몽이 물었다. “......” 꿈의 여운을 걷어낼 수 없어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몸을 많이 떨었어. 무슨 꿈을 꾼 거야?” “...... 꿈에서 너를 본 거 같애.” “나?” “그래, 아주 이상한 꿈이었는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라몽이 라는 생각이 들었어.” 말을 하고 나서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 왜 왔냐고 묻지 않아?” “간단하게 생각하고 싶어. 오늘 하루 종일 널 기다렸으니까...... 같 이 있고 싶어서 왔겠지 뭐. 그렇지 않다고 해도 할 수 없지만.” “아냐 맞아. 그래서 온 거야. 그리고...... 나도 말하고 싶어. 어젯밤 류가 내게 와서 했던 말에 대한 대답.” “...... 대답?” 놀란 목소리로 나는 되물었다. “거창한 대답 하려고 온 게 아냐. 그냥 한 가지만 묻고 싶어. 우리, 정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야?” 점점 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녀는 물었다. “그건 라몽이 자신에게 물어봐야지. 나로선 어젯밤에 했던 말밖에 할 수가 없어.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거......” 나머지는 전적으로 라몽의 선택과 결정일 뿐이라는 여운을 남기며 나는 말끝을 흐렸다. “알아. 하지만...... 자신이 없어. 그러고 싶다는 생각, 그래서 이젠 정말 마음 편하게 먹고 조용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 그런 생각 하 루종일 했어. 하지만......” “하지만 뭐?” 몸을 모로 눕히며 나는 물었다. “오래오래 난 류에게 미안해질 거야. 그래서 도무지 결정을 내릴 수 없었어.”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마.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냐.” “그럼, 류가 내게 듣고 싶어하는 말은 뭐야?” 조심스럽게 내 가슴에 손을 얹으며 그녀는 물었다. 소제목 : 류의 여자 “스타가 되겠다는 너의 꿈...... 그게 나에게는 장애감으로 느껴질 때 가 많아.” “아냐, 류. 이젠 그런 걱정하지 마. 지금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거나...... 그도저도 아니면 모든 걸 다 포기해버리고 싶다는 거야.” “그럼, 이제 스타에 대한 꿈을 포기하겠다는 건가?” “...... 류의 여자로 남고 싶다는 거야.” 간신히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이마를 나의 어깨에다 갖다댔다. “류의 여자......” 그 말의 여운에 깊이 사로잡히며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류......” “......” 바다가 눈을 뜬다, 바다가 눈을 뜬다, 라는 말을 나는 연해 속으로 되풀이했다. “나...... 용서해 줘.” “......” 거대한 물구비 사이로 난반사되는 빛에 대한 강렬한 예감. “용서해 준다는 말...... 해주면 안돼?” “용서......” 수천 수만 개의 빛, 그것들이 날카로운 화살촉처럼 가슴에 와 박힌 다. “......” 숨을 죽이고, 아주 미세하게 그녀는 떨고 있었다. “감정을 어렵게 만들지 마. 용서는 내 몫이 아니야. 내가 아는 건, 아직도 내가 널 사랑한다는 것뿐이야. 그런 걸 빼고 나면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고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어.” “......” “모든 걸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얘기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시 점으로 환원하자는 의미가 아냐. 너와 나 사이에 생겨난 상처와 멍자 국을 그대로 간직하고...... 어차피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더 굳고 견 실한 사랑을 꿈꾸고 싶다는 거야. 그리고 그 꿈은 아주 소박한 거야. ” “...... 알아, 류.” 자신의 이마를 나의 뺨에다 갖다대고 비비며 그녀가 울먹이는 소리 로 말했다. “이제 됐어. 이런 얘기는 오늘밤으로 끝이야. 더이상 입에 담지 않 기로 약속할 수 있어?” 나의 말에 그녀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어깨를 가늘게 떨며 숨죽 여 울던 끝, 갈라진 목소리로 아주 간신히 그녀는 이렇게 입을 열었 을 뿐이었다. “...... 사랑해, 류.” 소제목 : 감동적이야 오전 아홉시경. 가을 아침의 부신 햇살이 밀려드는 식탁에서 라몽과 나는 함께 식사 했다. 라몽이 준비한 아침식사는 샌드위치와 계란 후라이, 쥬스와 커 피가 전부였지만 그것을 나는 몹시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얼마만에 함께 앉아 보는 자리인가. 잠잠한 눈빛으로 나는 연두색 셔츠를 걸치고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라몽의 얼굴을 건너다 보았다.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만든 음식을 대하고 신선한 기분을 숨기려 하지 않는 나의 표정을 그 녀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는것 같았다. "어때?" 다소 쑥스런 표정으로, 내가 토스트를 베어 물자 그녀가 재빨리 물 었다. "감동적이야." "정말?" "정말." 정말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다행이야. 냉장고에 변변한 재료가 없어서......" "그렇구나. 계란도 없고 쥬스도 없었는데, 어떻게 된거지?" 커피잔을 내려 놓으며 놀란 눈빛으로 나는 그녀를 보았다. "아침에 나가서 사왔어." "후후, 더욱 감동적인 맛이 되네, 이거?" 적당히 구워진 토스트를 들어 보이며 나는 과장된 표정으로 웃었다. "오늘 뭐 할 거야?" "오늘......"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나는 그녀를 보았다. 지난밤, 라몽이 다녀간 뒤 부터 나름대로 생각했던 계획을 이 아침,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벌써 깜빡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인상을 찡그리며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외출해야 돼." "어디루?" 다소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물었다. "음, 사실은 어젯밤에 생각한 건데...... 나 취직할 작정이야." 소제목 : 선택과 책임 "취직?" 손에 들고 있던 토스트를 접시에 올려 놓으며 그녀가 나를 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 모든 걸 현실적으로 받아 들이겠다는 말...... 빈말 이 아냐." "어디로 취직을 해?" 어디 정해 놓은 데라도 있느냐, 하는 표정으로 그녀는 물었다. "그것 때문에 오늘 출판사에 근무하는 선배를 찾아가 보려구." 썩 내키진 않는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이제 그런 따위의 감정적 오 만은 필요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내가 라몽과 함께 생활하기 위 해선 어쨌거나 돈이 필요한 거고, 그걸 위해 이제 나는 직장을 찾아 볼 참이었다. 몇 번인가 집으로 들어가 다시 한번 손을 벌려 볼까, 하 는 생각도 물론 나는 했었다. 집으로 들어가 다시 한번 손을 벌린다는 것. 그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라몽과 나의 사랑을 근원적으로 구 차스럽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걸 나는 무시할 수 없었다. 좀더 구체적 으로 말하자면 내가 선택하고, 내가 꾸려나가는 삶을 나는 택한 것이 었다.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라몽이 동반돼 있다는 걸 어쨌거나 나는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녀를 내 스스로 책임지고 싶었던 것이다. 류의 여자로 남고 싶다던 라몽의 말. 지난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깊은 내면의 떨림을 느껴야 했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녀와 나를 옭아매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힘 같은 걸 뚜렷하게 자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자기 방으로 돌아가고 난 뒤부터, 그래서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전혀 다른 차원의 문으로 들어설 때처럼 깊은 떨림과 긴장감 속에서, 그녀와 나의 인생에 대한 선택과 책임을 아주 여러 번 내 자 신에게 확인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밤에 늦게 들어와?" "아니 선배 만나고 나서 곧장 집으로 돌아올 거야. 아마 오후 두세 시 쯤?" 쥬스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되겠네!" 갑작스럽게 밝은 표정이 되며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가 된다는 거야?" "응, 냉장고도 비고해서...... 오후에 류하고 시장보러 가고 싶었거든. 반찬거리......" 토스트를 손으로 찢으며 조심스럽게 그녀는 내 표정을 살폈다. "아, 그래? 그거 좋지!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한 번 먹게 되는 건가?" "응...... 기대해 봐." 다소 수줍은 듯,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소제목 : 우리 같이 자자 "볼일 보고나서 곧장 들어올게. 기다리고 있어." "응, 알았어." "아 참, 그리고......" 커피잔을 들어올리다 말고, 지난 밤에 떠올렸던 생각 한가지가 문득 되살아나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무슨 일인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가 나를 보았다. 망설이지 않고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밤부터 우리 같이 자자." 고개를 숙이고 나는 재빨리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 갔다. "......?" 무슨 말인가, 여전히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는 나를 보았다. "그냥...... 따로 자지 말고 같이 자자는 거야. 그게 더 좋지 않아?" 그게 뭐가 이상하냐, 천연덕스럽게 나는 말했다. "......" 계속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그녀, 깊고 촉촉하게 젖은 눈빛으로 나 를 건너다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히 느리지만 긍정의 표 시가 분명한 동작이었다. 맑고 화창한 가을날. 원색의 세상, 움직이는 모든 것들로부터 전혀 다른 생명감을 느끼며 나는 오장주 형을 만나러 갔다. 눈에 익은 세상이었지만, 아주 오랫동 안 내 마음의 눈은 그 세상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의 눈에 어둠 내리고, 그 어둠 위로 찬서리 내려 오래오래 세상에 주눅들게 하던 시절--잊지 않으리라. 나, 오류! 아무 것에서도 이제 두 번 다시는 비켜 서지 않으리라, 굳게 굳게 마음 다져 먹으며 나는 빌딩 지하의 커피숍으로 들어가 오장주 형의 출판사로 전화를 걸었다. 마침 그는 자리에 있었고, 어찌된 셈인지 지 난번과는 사뭇 다른 태도로 부드럽게 전화를 받았다. "빌딩 지하 커피숍?" 내가 그 곳에 와 있다고 하자 그는 갑작스럽게 언성을 높였다. "지금 시간 좀 낼 수 있어요?" 농담 제하고, 사뭇 담담한 어조로 나는 물었다. "시간? 그럼, 낼 수 있지. 오분 이내로 내려갈 테니까 내 커피까지 주문해놓고 기다려." 그가 원하는 대로,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두 잔의 커피를 주문했다. 오전 열시 반 경의 썰렁한 커피숍, 손님이라곤 나와 신문을 코밑에 들이대고 읽고 있는 사십대 후반쯤의 사내가 전부였다. 소제목 : 취......직? "웬 일이야, 이런 시간에?" 세련된 회색 양복에 자주빛 넥타이를 맨 베스트 셀러 출판사의 편집 장은 주문한 커피와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사무실에서 커피를 주문 해 놓고, 몇 분뒤에 그것이 탁자 위로 올려지는지를 실험하기 위해 날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는 게 일과의 전부인 사람처럼 보 일 정도였다. "취직 부탁 좀 하려고 왔어요." 그를 올곧게 직시하며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농담 이 아니다, 하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취......직?" 커피잔을 입에 댄 채, 눈을 한껏 치뜨고 그가 나를 건너다 보았다. "취직하기로 마음을 굳혔어요." "그럼 시는?" 여전히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커피잔을 탁자 위에 올려 놓으면서 도 그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시요?" 말을 하고 나서 씁쓰레한 표정으로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이제 시를 포기하겠다, 그거야?" 자신을 변절자로 몰아부치던 문학적 열정은 어디로 갔느냐, 요컨대 그런 질문을 그는 건네고 있는 것 같았다. "형도 시 안쓰고 잘 사는데 나라고 해서 못 살 거 없잖아요?" "이거야 정말......" 어이 없고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그는 의자에다 아주 깊숙히 몸을 묻 었다. "놀랄 거 없어요. 시보다 돈이 더 절실해서 내린 결정이예요. 어디 일자리 있으면 알아봐 달라구요." "너한테 돈이 왜 필요한데?" 신문을 하는 형사와 같은 눈빛으로, 나의 돌연한 태도 변화가 도무 지 사리에 맞이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는 물었다. "잠깐 쓰고 말 그런 돈을 말하는 게 아니예요. 생계를 내 스스로 해 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일자리를 찾는 거라구요." 알겠냐, 하는 표정으로 나는 그를 보았다. 소제목 : 지난 봄부터 "뭐 결혼이라도 하게 됐냐?" "결혼은 아니지만...... 별로 다를 것도 없어요. 여자와 같이 살고 있으 니까." "지금?" 날벼락을 맞은 듯한 표정으로 갑작스럽게 그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지난 봄부터." "너......" 벙그렇게 입을 벌린 채 그가 나를 보았다. 하아, 정말 기막히다는 듯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정말 대단한 놈이다. 그래 같이 사는 여자는 내가 아는 여자냐?" "모르는 여자예요." 무표정한 얼굴로 나는 대답했다. "혹시...... 송가희 아냐?" "형이 모르는 여자라니까요." 쓸 데없는 걸로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 하는 표정으로 나는 잘라말 했다. "흐음, 상황이 그러면 어쨌거나 직장을 구하긴 구해야 겠구나." 아주 천천히, 그제서야 상황을 어느정도 이해하겠다는 표정으로 그 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능하겠어요? 안 되면 다른 데라도 알아봐야 되니까......" "마침 우리 출판사에서 서너 명쯤 직원을 더 채용할 계획이긴 한 데......" "그래요?" "그런데 우리 출판사 같은 데서 너 일할 수 있겠냐?" 뭔가가 미심쩍다는 듯 그가 힐끔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출판사가 어때서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는 물었다. "우리 출판사에서 만드는 책, 아르바이트 일도 안하겠다던 사람이 어떻게 날마다 출근을 해서 일을 할 수 있겠느냐...... 그런 얘기지." "이런......"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번에는 내가 의자에다 깊숙히 몸을 묻었 다. 아르바이트 제안을 했다가 송가희와 나에게 어이 없이 당한 봉변 을 그가 꼬집고 있다는 걸 비로소 알아차린 때문이었다.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다소 냉랭한 표정으로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형은 따질 거 다 따지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난 절박해서 형을 찾 아온 거요." "아, 왜 그렇게 말을 고깝게만 듣냐? 아무리 내가 몸담고 있는 출판 사지만, 거기도 문제는 있는 거야. 그걸 네가 견딜 수 있을까, 그런 것도 한번쯤 생각해봐야 되는 거 아니냐?" 정색을 하고 그가 나를 보았다. "어떤 문제가 있어도 상관 없어요." 내가 찾으려는 건 내가 선택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일자리이지 좋은 직장이 아니예요." 라몽의 문제를 남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 그 런 게 도대체 내 속의 어디에 잠들어 있었던 것일까. 나의 말을 듣고 나서 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평상시의 내가 전혀 아닌 듯한 변화 를 곤욕스러워하는 건지 이해하기 위해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침묵이 나에게는 왠지 모르게 부담스럽게 느껴져서 조바심을 치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알았어. 사장에게 결재 올리고 결정나면 연락할게." 소제목 : 아줌마? 오후 1시 40분. 오장주 형에게 일자리를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건네고 나서 나는 곧 장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오후에 함께 시장으로 가겠다고 한 라몽과 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내가 집으로 들어섰을 때 그녀는 자신 의 배 위에다 알라바마를 올려놓고 소파에 누워 있었고, 어미의 품에 안긴 듯 알라바마는 그녀의 배 위에 잠잠하게 엎드려 있었다. 얼핏 나는 그 풍경을 낯선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잠시 뒤에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푸근하게 가라앉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아무 준비도 안했는데, 이렇게 빨리오면 어떻해?” 알라바마를 바닥에 내려놓고 소파에서 일어나며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늦게 오는 게 문제지 빨리 오는 것도 문젠가?” 빙그레 웃으며 나는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나갔던 일은 잘됐어?” 밝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그녀는 물었다. “부탁은 했는데...... 기다려봐야지 뭐.” “어떤 일인데?” 고개를 갸웃하며, 사뭇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물었다. “출판사.” “그 선배라는 사람이 근무하는 출판사?” “그렇지 뭐.”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겨주며 나직한 목소리로 나는 대답했다. “혼자 류를 기다리며 생각한 건데......”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그녀는 발밑을 내려다보았 다. 알라바마가 그녀와 내 다리 사이로 들어와 흡사 울타리 안에 갇 혀 있는 것처럼 빙빙 맴을 돌고 있었다. “무슨 생각?” “응, 류가 취직하게 되면 내가 아줌마 같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고개를 들고, 다소 엉뚱한 표정으로 그녀는 말했다. “아줌마?” 무슨 소린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류가 출근하면 난 하루종일 남편 직장 나간 아줌마처럼 집안일 하 고, 빨래 하고...... 그러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잖아?”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녀는 말했다. “그런 게 어때서? 심심해질까봐 걱정스러운 거야?” “나...... 기다리는 거 잘 못한단 말야.” 소제목 : 징그러워 “그럼, 영원히 아줌마는 못 되겠네?” 빙그레 웃으며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줌마, 아줌마, 그러지 마. 징그러워.” “징그러워지지 않을 때까지 연습해 봐. 그러다보면 아줌마가 돼 있 을 거야.” 내가 말을 끝내자마자 치이, 하는 소리를 내며 그녀는 등을 돌리고 싱크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수도꼭지를 돌리며, 등을 보인 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였다. “아직 아침 먹은 거 설겆이도 안 해놨단 말야.” “흠, 라몽이 아줌마 되면 밥 한끼도 제대로 얻어먹기 힘들겠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혼잣말을 하듯 나는 중얼거렸다. “아냐, 그런 건 잘 할 수 있어!” 갑자기 등을 돌리고 쏘아부치듯 그녀는 말했다. “그럼 뭐가 문제야?” 뭔가가 좀 이상한 식으로 꼬여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 녀를 향해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수돗물 쏟아지는 소리가 갑작 스럽게 증폭돼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등을 보인 채, 나의 물음에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래?”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상태 그대로 거의 방심을 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등을 돌리며 그녀 가 내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우는 건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내 가슴에 안긴 채, 아주 가만히 숨을 가다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녀를 부드럽게 감싸안으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 중요한 건......” 발뒤꿈치에 이상한 느낌이 전해져와서 나는 말을 중단했다. 그녀를 가슴에 안은 채, 간신히 고개를 돌려 나는 밑을 내려다보았다. 알라바 마가 내 발뒤꿈치에다 머리를 들이대고 연해 낑낑거리고 있었다. 느 닷없이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간지러움을 느끼면서도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중요한 건 라몽이 마음의 평안을 되찾고 새로운 희망을 회복하는 일이야. 희망이 뭔지, 그런 건 나도 아직 모르지만...... 라몽을 보면 언 제나 그런 생각이 들어. 그런 생각이 들기 때문에 나도 열심히 살아 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사소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런 게 중요 한 거라는 생각이 들어.” 알라바마를 떼어내기 위해 연해 발목을 움직이며 나는 간신히 말을 끝냈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녀가 내 가슴에다 긴 한숨을 내쉬고 나서 이렇게 입을 열었다. “난 왜 이렇게 기다리는 일을 못하는 걸까?” 소제목 : 예고 없이 날아든 침해 “차츰 익숙해질 거야. 이제 그만 준비해.” 잠시 라몽을 가슴에 안고 있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나는 입을 열었 다. “준비?” 가슴에 대고 있던 얼굴을 들어올리고, 사뭇 의아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나를 보았다. “시장 간다며?” “아, 참!”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내 품을 벗어나자마자 그 녀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가 수건과 속옷 을 꺼내들고 다시 나온 그녀, 윙크하듯 나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고 나서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샤워를 하는 동안, 나는 소파에 앉아 알라바마와 놀아주었다. 앞다리를 들어올려 곧게 세우기도 하고,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가볍게 튕겨주기도 했다. 떨어질 듯 떨어질 듯 아슬아슬해 보이기도 했지만, 끝끝내 떨어지지 않으려고 놈은 앞발과 발톱을 이용해 내 청바지의 허벅지 부분을 긁으며 몸을 연신 좌우로 움직였다. 트루 로맨스. 어떤 동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문득, 참으로 오랜만에 그 영화 음악이 뇌리를 스쳐갔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알라바마를 가슴에 안고 오디오가 있는 곳으로 나는 걸어갔다. 파워 앰프를 누르 고 음반을 꺼내 트레이에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를 때, 머리에 노란 수건을 두른 라몽이 욕실에서 나왔다. 거의 동시에 상큼한 마림바 연 주로 시작되는 주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__ You’re so cool ! 노란 수건을 풀어 젖은 머리를 감싸던 라몽이 동작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미묘한 전류 같은 게 그녀와 나를 관류하는 것 같 았다. 초점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말없이 그녀와 나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영혼의 은밀한 깊이로 그녀와 나는 교감하고, 그것이 산 만한 세상을 밀어내고 그녀와 나 사이의 형언할 길 없는 정밀로 번져 나가는 것 같았다. 삐-삐-삐-삐-삐-삐-삐-삐 그때 라몽의 방에서 느닷없이 호출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깊은 정밀 과 은밀한 교감의 세계가 한순간에 와해되고,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 녀와 나는 전혀 다른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놀란 눈빛 으로 나는 긴장된 눈빛으로, 그 순간 예고 없이 날아든 침해를 떨리 는 몸짓으로 정신없이 당혹스러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 뭐지?” 찰라처럼 뇌리를 스쳐가는 악몽의 기억을 억누르며 가까스로 나는 입을 열었다. “......” 소제목 : 말 못할 곳에서 온 호출 순간적으로 절망스런 표정이 된 그녀, 머리를 감쌌던 수건을 내리고 힘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등을 돌리는 그녀의 머릿결에서 뚝, 뚝, 물방울이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내 렸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끼며, 알 수 없는 인력에 이끌리듯 나 는 그녀가 들어간 방문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았다. 이 순간, 누가 그녀를 호출하는가.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숄더백을 여는 라몽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숨 을 한껏 깊이 들이마셨다. 가방을 열고, 잠시 망설이는 듯한 자세로 그녀는 서 있었다. 방관동으로 돌아온 이후, 거의 한번도 그녀를 무선 으로 호출하는 사람은 없었다.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한동안 방심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알라바마를 사러갔던 그날, 라몽이 무선 호출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가 정을 그녀와 헤어져 있던 근 두 달 동안 나는 너무나도 여러 번 했었 다. 그때 무선 호출기가 그녀에게 없었다면? 무선 호출기에 대한 이상한 증오심이 내 속에는 분명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온몸이 떨리는 걸 느끼며, 등을 보인 채 그녀가 호출기를 꺼 내 자판을 확인하는 동안 나는 움직임 없이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호출기를 손에 든 채, 확인이 분명히 끝났을 텐데도 그녀는 이내 내쪽으로 등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지?” 냉랭하면서도 빳빳하게 긴장된 목소리로 나는 물었다. 손에 들었던 호출기를 가방에 넣고, 어깨를 늘어뜨린 채 갑작스럽게 맥진해진 모 습으로 그녀는 돌아섰다. 거의 절망적인 상태로 일그러져 있는 그녀 의 표정을 보자 나도 모르게 울컥,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누구냐고 묻잖아, 지금!” “류......”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말해.” “...... 전화 좀 할게.” “어디루?” 여전히 냉랭한 어조로 나는 물었다. “......” 자신 없는 표정으로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말 못할 곳에서 온 호출인가?” “......” “티모시 기획...... 또 거기야?” 거의 처음부터 그곳을 표적으로 삼고 있었던 사람처럼 아무런 망설 임도 없이 나는 물었다. 소제목 : 할 말 있어? “......” 머리를 숙인 채, 대답 대신 그녀는 아주 조금 머리를 끄덕였다. “정말 어이가 없군.”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나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류......” 고개를 들고 애원하는 눈빛으로 그녀는 나를 보았다. “......” 증오심에 가득찬 눈빛으로, 초점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나는 그녀 를 노려보았다. “...... 미안해.” 나의 눈빛을 확인하고 난 직후,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녀는 상당히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구체적으로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그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곧장 나를 지나쳐 거실의 전 화기가 있는 곳으로 갔다. 미, 안, 하, 다, 구? 굳은 듯이 등을 보이고 선 채로 나는 그 말을 속으로 연해 곱씹었 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미안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한 게 아니라, 도무지 이럴 수는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단단히 사로잡혀 버린 것이었다. 그동안의 인내와 의지와 자기 다짐이 한순간에 허물 어지고, 오랫동안 돌보지 않은 마음의 묵정밭으로 시려운 삭풍이 떼 를 지어 몰려드는 것 같았다. “...... 여보세요.” 빙벽처럼 굳어가는 마음으로 나는 그녀가 전화 거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를 향해 쉽게 돌아서지 못하는 마음인데, 그때에도 귀는 마냥 열 려 나를 배신하는 것 같았다. “...... 네...... 지금요?...... ” 이제 더이상 파종할 수 없는 불모의 땅에 잡초 무성해지기 전에, 어 떤 식으로든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는 굳게굳게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 알았어요...... 하지만, 네...... 그럼 그렇게 할게요.” 그제서야 딸깍,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의식의 제어에도 불구하고, 안간힘을 다해 나는 천천히 거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전화 를 끊고 나서 더욱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는 나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 다. “할 말 있어?” 지극히 냉랭하고 낮은 목소리로 나는 입을 열었다. “류, 그게 아니고......” “길게 말할 거 없어. 간단히 용건만 말해 봐.” 소제목 : 옷을 벗을 수 있는 용기 “...... 미안해.” 고개를 반쯤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미안...... 하다구?”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거의 자제력을 상실한 목소리로 나는 되물었다. “...... 미안해.” “미안하다는 건, 다시 그곳으루 가겠다는 건가?” “......” 두어 번, 대답 대신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인간도 아니군...... 도대체 거긴 무엇 때문에 다시 가겠다는 거지? 그렇게 당하고, 그러고도 아직 미련이 남아 있는 건가?” 거의 멸시하는 듯한 어조로 나는 소리쳤다. “미안해. 막지 말아줘.” 고개를 들고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는 나를 보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그렇게 망가지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거야? 나 하고 약속도 했잖아?” 그녀의 어깨를 잡고 정신 차리라는 시늉으로 나는 마구 흔들어댔다. “나도 모르겠어. 해결해야 할 일도 남았고, 암튼 가봐야 할 거 같애.” 나의 감정적 난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점점더 냉랭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가서?”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 하는 표정으로 나는 물었다.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했잖아.”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는 대답했다. “해결해야 할 일? 그래, 누드 사진집을 마저 찍어주고 오겠다는 거야? 알몸 으로 카메라 앞에 서서 온갖 포즈 잡아 주고, 그런 식으로 스타에 대한 갈증 을 해소하겠다구? 차라리 알몸으로 거리로 나가보시지 그래?”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철썩, 그녀의 손이 세차게 나의 뺨을 후리고 지나 갔다. 홧홧한 기운이 뺨에서 느껴지고 그녀는 한껏 독오른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고 서 있었지만, 그런 걸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스타가 되기 위해서라면 몸도 수치심도 양심도 다 버려야 하는 거라고 믿고 있는 거 아냐? 스타로 키워 주겠다는 말만 해주면 그게 누구이든, 그곳이 어떤 곳이든 시도 때도 없이 옷을 벗을 수 있는 용기 가 있어야 하는 거라고 믿고 있는 거 아니냐구?” 소제목 : 창녀 같은 계집 “......” 방금 전에 독을 마신 사람처럼 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녀는 연신 몸을 떨어댔 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이었지만, 어찌된 셈인지 그녀의 그런 모습 을 보며 나는 묘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좀 더, 좀 더, 하는 소리가 독려처 럼 가슴 속에서 울려퍼졌으나, 한순간 뒤에 등을 돌리고 뛰듯이 그녀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스타가 되고 싶다는 것과 창녀가 되고 싶다는 게 도대체 어떻게 다른 거지 ?” 쾅, 소리가 나게 방문이 닫힌 직후, 방문 앞에 서서 나는 미친 듯이 소리쳤 다. 거의 발악적인 심정이 되어 있었고, 뭐가 어떻게 되든 이제 더이상 인내 심 따윈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내로는 더이상 감당할 수 없는 여 자라는 단정을 내리고, 그것을 극단으로 몰고가 그녀와의 관계를 깨끗이 청산 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발광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이이었다. 라몽. 이제 더이상 그녀는 내 진실한 사랑의 대상도, 이해의 대상도, 동반의 대상 도 아니었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으로 눈을 뜨던 사랑의 기억도 헛된 환상으로 태를 바꾸고, 이제 그녀는 더러운 마성에 사로잡힌 악령의 소유자 이외에 다 른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엇 때문에 흥분하는가, 그녀에 대한 감정적 매도가 극에 달해 나는 내 자신의 흥분을 스스로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타가 되겠다는 무지몽매한 욕망에 사로잡혀 모든 걸 다 잃고, 종내에는 병 든 심신밖에 남을 게 없을 거라는 끈덕진 마음의 저주로 나는 내 자신을 위로 했다. 중심을 잃고 거대한 공혈(空穴) 속에 내가 서 있는 것 같았지만, 그 공 허감이 차라리 후련하게 느껴졌다. 지상의 어떤 여자를 만나도 라몽보다는 나 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 그녀와 헤어지지 않으면 남겨지는 건 오직 마 음의 지옥뿐일 거라는 단정에 의심이 있을 수 없었다. 창녀같은 계집! 이윽고 방문이 열리고 거실로 나서는 라몽을 싸늘한 눈빛으로 나는 노려보았 다. 가방을 어깨에 메고, 손에는 청쟈켓을 들고 밖으로 나와 스치듯 그녀는 나를 보았다. 얼핏 냉기가 가득 밴 듯한 눈빛이었으나, 더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절망과 불안과 원망의 빛이 뜨겁에 이글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려 나 어차피 이젠 끝장난 마당이라는 생각으로 나는 독하게 말을 뱉았다. “이제 더이상 이곳은 너의 놀이터나 휴게소가 아니야. 가는 건 네 마음이지 만, 나를 털끝만큼이라도 생각한다면 이제 두 번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말 아줘.” “......” 신발을 신으려고 현관에 서 있던 그녀, 나의 말을 듣고 나서 갑작스럽게 굳 어버렸다. 등을 보이고 선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이분도 채 안 될 시간이었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장구한 세월 처럼 버겁게만 여겨졌다. 이윽고 등을 돌리고, 백짓장처럼 희게 질린 얼굴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알았어, 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 소제목 : 몇 점의 낙엽 마음의 지옥. 라몽이 나간 직후부터 나는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마시기 시작 했다. 마음에서 눈을 뜨는 또다른 자아를 느끼며, 이것이 정말 오류인 가, 이것이 정말 오류인가, 내 스스로도 헤아리기 어려워 깊은 침잠의 시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꿈인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 보려던 아침의 감정은 그때 이미 수세기 전의 역사처럼 희미하게 빛 이 바래져 있었다. 취직?__ 그런 걸 하려 했다니, 정말이지 하느님 맙 소사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리 자신을 억누르려 해도 자신의 욕 망과 결부된 문제에서는 털끝만큼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계집을 위해 도대체 어떤 희생을 나는 감내하려 했던 것일까. 허망하게 허물어진 마음의 중심. 내 속에서 꿈틀거리는 또 하나의 자아로 나는 불안과 초조가 범벅된 시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위악적인 증오심으로 라몽을 무시하려 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의 균형은 더욱 엉망이 되어갔 다. “정말, 진심이었을까, 그게?” 내가 그녀에게 보인 반응이 지나친 게 아니었을까, 하는 반대급부의 자괴감으로 나는 점점더 초조함 심정이 되어갔다. 티모시 기획, 윤인 준이라는 인간에 대한 증오심까지 가세하여 잠시도 마음 편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안돼, 이대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반쯤 마신 캔맥주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무작정 소파에서 일어나 나는 상처입은 들짐승처럼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라몽에 대한 분노와 라몽에 대한 애정이 경계없이 뒤섞인 거라면, 남겨지는 문제는 전적 으로 내 몫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인준, 어쩌면, 그 인간!” 라몽과 내 고통의 핵을 찾아냈다는 표정으로 우뚝, 나는 걸음을 멈 췄다. 왠지 모르게, 라몽이 오늘 다시 그 인간을 만나면 모든 게 끝장 날 것 같다는 섬뜩한 예감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나는 서둘러 내 방 으로 들어갔다. “그래 가야 돼, 가야 하는 거라구!” 테이블 위에 놓인 수첩을 집어들고 나는 다시 거실로 나왔다. 양희 진의 호출 번호를 확인하고 나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차례대로 버 튼을 누른 뒤에 털썩, 소파에다 던지듯 몸을 묻었다. “윤인준......” 이제 더이상 내가 라몽의 그림자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 을 하며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차피 파국이 올 거라면, 비켜 서 있었던 게 오히려 오랜 뒷날의 상처로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아뜩 한 예감! 문득 고개를 들고 창밖을 내다보자, 몇 점의 낙엽이 바람에 불려 대각으로 느리게 창을 지나가고 있었다. 소제목 : 티모시라는 카페 “오류씨?” 양희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호출을 하고 나서 이삼분쯤 지 난 뒤였다.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녀는 단박 내 이름을 입에 올렸다. “아, 금방 전화를 걸어주셨군요. 지금 어디 계시죠?” 떨리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나는 물었다. “집인데...... 왜요?” “간단히 말하죠. 티모시 기획의 위치 좀 알려 주세요.” “티모시...... 기획요?” 어이가 없다는 투로 그녀는 되물었다. 되묻고 나서도 여전히 미심쩍 다는 어조로 그녀는 곧이어 다시 입을 열었다. “티모시 기획은 왜요?” “이유는 묻지 말고 위치만 알려 주세요.” 다급하고 절박한 어조로 나는 말했다. “라몽 때문에 그런 거예요?” 서늘한 목소리로 그녀는 물었다. “라몽이 아니면 제가 티모시 기획을 왜 묻겠어요.” “거기 가도 별로 좋은 결과는 못 얻을 거예요. 그리고 윤인준이라 는 그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예요.” “그런 건 제 문제니까 걱정 마세요.” 주먹을 불끈 쥐며 나는 말했다. “근데 거기 가서 뭘 어쩌려는 거죠?” “뭘 어쩌려는 거냐구요? 그 인간이 두번 다시 라몽을 찾지 못하게 해야죠.” “거기...... 윤인준만 있는 게 아녜요. 몇 명의 패거리들이 같이 있을 텐데...... 정말 괜찮겠어요?” 여전히 걱정스럽다는 어조로 그녀는 물었다. “걱정 마시고 위치나 알려 주세요.” “정말 가야 돼요? 안 가면 안 되는 거예요?” 안타깝다는 어조로 그녀는 연해 물었다. “제가 지금 농담 하시는 줄 아세요?”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나는 다소 언성을 높였다. “정말 안 가는 게 좋을 텐데...... 정 그러시다면 할 수 없죠. 거기서 지옥을 만날지도 모르지만...... 암튼 암운동으로 가서 티모시라는 카페 를 찾아야 하는데......” 소제목 : 마음이 지옥인 자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거의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그녀는 카페 <티모시>의 위치를 차근차근 내게 알려 주었다. 손이 떨리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그녀가 불러주는 도로, 빌딩, 골목, 편의점 이름 따위를 또박또박 수첩에다 받아 적 었다. 카페 티모시.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소파에 몸을 묻고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거센 회오리를 예감하는 자들의 나른한 눈빛 그대로, 한동안 의식의 정돈 상태에 빠져 불규칙한 호흡을 가다듬었을 뿐이었다. 누군가 키만큼 자란 억새밭으로 뛰어들어 정신없이 낫을 휘둘러대는 실루엣, 혹은 빛의 와중에서 흑요석 같 은 어둠이 느닷없이 팽배하는 것 같았다. __ 잃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너는 얻지 못하리라. 이명처럼 나는 또렷하게 그런 소리를 듣기도 했다. 내 속에 누가 또 있는가 . 눈을 감고 머리를 흔들어도 그런 소리는 좀체 스러지지 않았다. __ 어차피 얻지 못하리니 더는 잃을 것도 없으리라.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나는 눈을 떴다. 더이상 망설여서는 안되다는 준엄 한 경고의 소리를 얼핏 들은 것 같았다. 바람소리였는가. 가을날의 금빛 잔광 이 서편 창유리로 밀려들어 거실 바닥을 널찍하게 점령하고 있었다. 문득 밖 이 아니라 거기, 금빛 잔광의 면적 속으로 들어가 주검처럼 눕고 싶다는 충동 이 서늘하게 등줄기를 훑고갔다. __ 네 마음 닿는 모든 길의 부질없음. 어금니를 악다물고 간신히 방으로 들어갔다. 옷장을 열고 거기서 제법 두툼 한 반코트를 꺼내 입었다. 날씨 때문인가, 마음의 한기 때문인가. 옷을 입고 나서도 나는 아주 잠시 어깨를 움츠리고 서 있었다. 침침한 눈과 먹먹한 귀 의 지옥인 자의 몸을 이끌고 넋나간 듯한 표정으로 나는 유령처럼 방을 빠져 나왔다. __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 마음의 소리에 홀린 채 나는 현관까지 걸어갔다. 가느다란 신음소리 같은 게 연해 귓전으로 밀려들었지만, 그것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 채였다. 신발을 신고 나서 뭔가가 미심쩍어 다시 한번 등을 돌리고 실내를 일별했을 때, 그 때 비로소 시야로 밀려드는 살아 있는 생물체가 있었다. “아...... 알라바마.”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나는 중얼거렸다. 알라바마, 그놈이 소파 앞에서 연해 낑낑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 기만 할 뿐, 무슨 이유 때문인지 평상시처럼 내쪽으로 다가올 기미는 전혀 없어보였다. 잠시 선 채로 놈을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어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알라바마, 어쩌면 너는 내 마음을 다 읽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소제목 : 오빠, 어디 아파요? 내가 암운동에서 택시를 내린 건 땅거미가 내릴 무렵이었다. 청운대 학을 지나고 관서빌딩을 지나, 양희진이 일러준 대로 50미터 전방의 삼거리에서 하차한 것이었다. 요금을 계산하고 우측으로 방향을 꺾자 다양한 모양의 건물들이 자신들의 자태를 서로 뽐내듯 들쭉날쭉 늘어 서 있는 게 보였다. 암운동, 티모시, 라몽과 윤인준. 내리는 어둑발과 터져오르는 네온사인의 화려한 불빛을 보며 나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왠지 모르게 어깨가 늘어지고 온몸이 맥진해지 는 것 같아서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으며 흔들리지 마, 흔들리지 마, 하고 나는 연 해 중얼거렸다. 벤츠 남자. 전면을 통유리로 처리한 카페의 푸른 네온사인이 이상한 마력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뭔가,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망 설임이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게 했다. 통유리 안쪽의 실내는 굉장 히 넓은 공간이었지만 시간이 일러서인지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어두워질 때까지......” 느닷없이 등을 돌려 나는 <벤츠 남자>로 들어갔다. 수첩에 적힌 대 로라면 카페 <티모시>는 그곳으로부터 200미터 정도의 거리에 위치 하고 있을 터였다. “......?” 실내 좌측의 벽쪽으로 다가가자 게스 청바지에 회색 셔츠, 그리고 푸른 체크 무늬의 조끼를 입은 갓스물쯤의 여자애가 메뉴판을 들고 다가와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키는 별로 크지 않았지 만, 무심결에 보아도 굉장히 깜찍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영문을 몰라 다소 긴장된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자, 고개를 갸웃하고 나서 그 녀가 가볍게 입을 열었다. “오빠, 어디 아파요?”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오빠’라는 호칭을 듣 고 나서도 나는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아파 보여요?” “네, 얼굴이 백지처럼 하얘요.” 내 이마 위에 금방 손이라도 얹을 듯한 자세로 그녀는 말했다. “아니 아픈 건 아니고......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요.” “그럼 뭘로 드실래요?” 아픈 거 아니면 됐다, 하는 표정으로 그녀는 밝게 웃으며 물었다. “위스키 스트레이트...... 더블로 주세요.” 소제목 : 술이 그렇게 고팠어요? “더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하고 나서 그녀는 등을 보였다. 그녀가 돌아가고 난 직후, 의자에 편안하게 몸을 묻고 나는 밖을 내 다보았다. 도로, 건물, 가로수, 붉은 벽돌담장 따위들이 대책없이 먹보 라빛에 먹혀들어가고 있었다. 먹혀들어가면서, 보는 나로 하여금 이상 한 평안함을 느끼게 했다. 속 깊은 가을 강의 잔물결, 때로는 미진한 바람에도 거부하는 몸짓을 보이지 않고 하롱하롱 떨어져내리는 가을 잎새의 담백한 하강이 느껴지기도 했다. 잘못 생각한 건가. 아니라고, 나는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내가 라몽을 사랑하는 것과 어리석은 인내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한번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위스키...... 많죠?” 예의 깜찍한 표정을 지으며 여자애가 위스키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 았다. 나에 대한 배려로 특별히 술을 많이 따라왔다는 얘기라서 나는 웃음을 지으며 잔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많네?” 씨익, 치아를 드러내고 웃으며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거, 외제 양주예요. 손님들에게 주는 건 썸씽인데, 제가 몰래 슬 쩍해 온 거예요.” “그럼, 이 집은 얼마 안 가 망하겠네?” 잔을 들어올리며 농스런 표정으로 나는 그녀를 보았다. “아이 참, 좋은 위스키 한 잔 슬쩍했다고 이런 집이 흔들릴 거 같 아요?” “암튼 고마워요.” 내 말을 듣고 나서 그녀가 무릎을 살짝 접었다 폈다. “잠깐만요.” 잔을 손에 들고, 마악 등을 돌리려는 그녀를 나는 불러세웠다. “왜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보고 나서 나 는 위스키잔을 단번에 비워버렸다. 말 그대로 ‘원 셧’을 해버린 것 이었다. “어머나! 그 독한 걸......” 벙그렇게 입을 벌리고 거의 말문이 막힌 듯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 녀에게 나는 곧장 빈잔을 건넸다. “똑같이 한잔 더요.” “술이...... 그렇게 고팠어요?” 멍한 얼굴로 잔을 건네받으며 그녀가 물었다. “마음 흔들리기 전에 빨리 주세요.” 소제목 : 마음이 아픈 게야 멍하니 서 있던 여자애, 자신도 덩달아 마음이 다급해진 듯 잔을 들고 재빨 리 등을 돌렸다. 다시 한번 먹보라빛이 내려앉는 밖을 내다보며 이게 마지막 이야,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마음의 지옥, 이제 더이상 아무것으로도 나는 타오르지 않으리라, 있는 힘을 다해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그때 문득, 나도 모르게 뇌리를 스쳐가는 한 편의 시가 있었다. 나는 이름붙일 것이다 그대가 있었던 그 성을 사막이라고 그 목소리를 밤이라고 그대의 얼굴을 부재라고 그대가 불모의 땅에 쓰러지게 될 때 나는 이름붙일 것이다 그대를 데려간 번갯불을 허무라고 죽음은 그대가 사랑했던 나라 나는 간다, 영원히 그대의 어두운 길을 통해서 나는 부순다, 그대의 욕망 그대의 형태, 그대의 기억을 나는 연민을 품지 않는 그대의 적 나는 그대를 싸움이라고 이름 붙일 것이다 나는 그대에 대해 싸움의 자유를 가질 것이다 나는 또한 가질 것이다 내 손에 그대의 꿰뚫어진 어두운 얼굴 내 마음 속에 천둥 치고 비바람 훤히 비치는 그런 나라를 여자애가 가져온 위스키를 나는 다시 한번 단숨에 비워냈다. 이제 더이상 망 설여서는 안된다고 내 자신에게 다짐을 주며, 그것을 단숨에 비워내고 다시 한번 빈 잔을 그녀에게 건넸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가져온 석잔째의 위스키 를 비우고 나서, 굳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의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던 여자애가 돈을 받아들며 이렇게 중얼거렸 다. “그래, 보나마나 마음이 아픈 게야.” 소제목 : 그 성을 사막이라고 <벤츠 남자>에서 나오자 썰렁한 바람이 끼치듯 얼굴을 덮어왔다. 뜻없는 눈 길로 허공을 한번 올려다보고 나서 나는 위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삼삼오오, 밝고 경쾌한 몸짓으로 지나가는 젊은 애들이 기우뚱,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 은 것처럼 보였다. 너무 마신 건가? 눈을 흡뜨고 네온사인이 흐느적거리는 전방을 노려보았다. 광기를 닮은 네온 의 불빛 속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이 비로소 오롯이 떠올라왔다. 크게 심호흡 을 하고 나서, 오직 편의점 불빛에다 시선을 고정시키고 나는 걸음을 옮겨놓 기 시작했다. __ 편의점 앞에서 걸음을 멈추면 좌측으로 꺾어지는 골목이 나타날 거예요. 편의점 앞에 이르자 양희진의 말대로 그리 넓지 않은 골목이 나타났다. 골목 양옆으로 주차해 놓은 몇 대의 차가 보였고, 그 안쪽은 길고 깊고 캄캄한 어 둠이 들어차 있었다. __ 골목 입구에서 보면, 오 미터쯤 앞에 걸린 자그마한 <티모시> 간판 불빛 이 보일 거예요. 골목은 골목인데, 그녀의 말과 달리 <티모시>라는 간판 불빛은 보이지 않았 다. 다소 긴장된 기분으로 어쨌거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골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몇 걸음 옮겨놓은 뒤에, 골목 바깥 쪽의 희미한 불빛을 받아 좌측의 아크릴 간판을 간신히 식별할 수 있었다. “근데, 어째서 불이 없는 거야?” 아크릴 간판에는 불이 들어와 있지 않았다. 간판은 건물로부터 사오 미터쯤 바깥 쪽으로 나붙어 있었고, 건물과 간판 사이에는 주차장으로 쓰임직한 공 지가 있었고, 거기에 두 대의 승용차가 주차돼 있었다. “티모시......” 때 아닌 한기를 느끼며 나는 공지로 접어들었다. 건물 전면에는 안이 들여다 보이는 가로형 철제 셔터가 내려져 있었고, 좌측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만 작은 보안등 하나가 밝혀져 있었다. 좀더 앞으로 나가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에 <카페 티모시>라는 아치형 간판이 나붙은 게 다시 보였다. 계단 앞에 서서 고개를 들고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얼핏 사오층쯤으로 보이 는 건물의 꼭대기층에서만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을 뿐, 다른 곳에서는 아무런 불빛도 새어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대가 있었던 그 성을 사막이라고......” 나도 모르게 자꾸만 움츠러드는 어깨를 의도적으로 넓게 펴며, 아무리 봐도 영업을 할 것같지 않은 지하 계단을 향해 이윽고 나는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 했다. 소제목 : 이제 들어가는 거야 티모시로 내려가는 계단 통로는 지나칠 정도로 협소했다. 열 개 정 도의 각진 계단을 밟고 내려가자 90도로 통로가 꺾어지며 다시 대여 섯 개 정도의 계단이 나타났다. 통로가 꺾어지는 지점에서 걸음을 멈 추자 희미한 백열전구 불빛이 밀려나오는 유리 출입문이 보였다. “티모시......” 다시 대여섯 개 정도의 계단을 밟고 내려가며 바짝 긴장된 표정으로 나는 중얼거렸다. 유리문 위에 다시 <카페 티모시>라는 상호가 나붙 어 있었지만 간유리라서 실내가 들여다보이지는 않았다. 허리를 굽히고, 염탐을 하러 온 사람처럼 나는 유리문 가장자리의 틈을 이용해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실내의 중앙 부분으로만 그리 밝 지 않은 조명등빛이 떨어져내리고 있었고, 그 조명권 안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주변의 탁자 위에 의자들이 올려진 걸로 미루어 영업을 하는 것 같진 않았고, 어깨를 늘어뜨리고 멍하니 앉아 있는 걸로 보 아 실내에 다른 사람이 더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라몽......” 아랫배에다 잔뜩 힘을 주고, 모노 드라마를 하는 배우처럼 그로데스 크하게 앉아 있는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나는 중얼거렸다. 얼 핏 그녀를 라몽으로 착각한 때문이었다. “아.” 혼돈을 느끼게 하는 빛과 어둠 속에서, 가까스로 그녀가 라몽이 아 니란 걸 알아차리고 나는 묘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부딪 쳐야 할 일, 망설일 필요없이 곧장 안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하 며 나는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래, 이제 들어가는 거야.” 유리문을 가볍게 두어 번 두드리고 나서 나는 안으로 들어섰다. 실 내의 한복판, 희미한 조명권 안에 앉아 있던 여자가 질겁을 하듯 자 신의 두 눈을 양손으로 가렸다. “죄송합니다만......” 여자의 반응에 놀라 나는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눈을 가 렸던 양손을 조심스럽게 내리고 경계의 기색이 역력한 눈빛으로 여자 가 나를 보았다. 삼사 미터쯤 되는 거리였지만, 그 정도의 거리에서도 여자의 눈 부위 가 검푸르게 부풀어 있다는 걸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멍자 국을 보는 순간, 느닷없이 라몽이 방관동으로 돌아오던 날의 몰골이 섬뜩하게 뇌리를 스쳐갔다. “여기 혹시 라몽이라는 사람 오지 않았나요?” 바짝 긴장된 표정으로 나는 물었다. 소제목 : 몽이, 없어요, 여기! “하아, 훠?”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때 분명 내 귀에는 그런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인지 아니면 실내의 다른 공간에서 흘 러나온 말인지도 그 순간에는 제대로 분별을 할 수 없었다. “라, 몽, 이라구요. 라몽!” 안타까운 표정으로 또박또박 나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몽이를 찾아온 거예요?” 손을 완전히 내리고, 너무나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여자가 천천히 의 자에서 일어났다. “네, 그녀가 지금 여기 있나요?” 한때의 라몽같은 몰골로 그녀가 이 음산한 카페에 앉아 있는 이유가 무 엇인지, 어째서 보이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인지, 떠오르는 의구심을 가까 스로 억누른 채 나는 유령처럼 서 있는 그녀에게 되물었다. “몽이, 없어요, 여기.” 느닷없이, 거의 기계적으로 그녀는 대답했다. 각본에 나와 있는 대사를 아무런 감정 처리도 없이 그대로 내뱉는 것 같았다. “그럼 몽이가 오늘 여기 오지 않았다는 건가요?” “......” “지금 저에게 뭔가를 속이고 있는 건가요?” “......” “그럼 무엇 때문에 당신은 여기 혼자 있는 거죠?” “없어요, 여기! 몽이, 없다구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발작을 일으키듯 그녀는 소리를 내질렀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출입문 쪽으로 나는 한걸음 물러났다. 여자는 그때 얼굴을 감싸쥐고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고, 한차례 감정적 폭풍을 치러낸 사람처럼 어깨를 들먹이며 느리게 몸을 뒤틀어대고 있었다. 실성한 여잔가? 순간적으로 그런 의구심이 뇌리를 스쳐갔지만 도리없다는 생각으로 나 는 등을 돌렸다.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갑작스럽게 의식의 초점을 잃어 버린 사람처럼 나는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때, 다급한 목소리로 여 자가 나를 불렀다. “잠깐만요!” 내가 등을 돌리자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사이를 두고 뭔가를 망설이는 듯한 눈빛으로 서 있던 그녀, 뭔가를 부정할 때처럼 두 어 번 고개를 가로젓고 나서 느리게 내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 했다. “누구세요?”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내쪽으로 다가온 그녀, 거의 속삭이는 듯한 소리로 엉뚱한 질문을 내게 건넸다. “전...... 몽이 남자친구예요.” “남자 친구?” 검푸르게 부풀어오른 눈으로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몽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거죠?” 기대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정말...... 몽이를 사랑하시나요?” 무슨 동문서답인가. “제발 부탁이예요. 알고 있으면 장소만 얘기해 주세요. 난 몽이를 찾으 러 여기까지 온 거라구요. 여기가 무엇을 하는 곳이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요. 그냥 몽이 있는 곳만 알려 주면 된다니까요.” “정말 상관 안해요?” 갑자기 독기가 가득 서린 듯한 눈빛으로 그녀가 나를 노려보았다. “상관 안해요.” “좋아요. 그럼 오 층으로 올라가보세요.” 소제목 : 그래,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오...... 층요?” 좀전, 입구에서 올려다본 마지막 층의 희미한 불빛을 떠올리며 나는 되 물었다. 거의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그때 여자는 고개를 떨구고 다시 어 깨를 들먹이기 시작했다. “암튼 고마워요.” 더이상 대답을 기다릴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판단으로 뱉듯이 말을 던 지고 나서 나는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왔다. 몽이를 미워하지 마세요, 어 쩌고 하는 소리가 얼핏 등 뒤에서 들린 것 같았지만, 이제 더이상 그런 걸 괘념할 만큼 나에게는 여유가 없었다. 내려온 계단을 다시 뛰어 올라가려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나는 우 뚝 걸음을 멈췄다. 입구에 내려진 철제 셔터! __ 다시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재빨리 등을 돌렸다. 예상했던 그대로, 카페 <티모 시> 출입문으로부터 우측 방향으로 열린 내부 통로가 따로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계단의 철제 가드를 한손으로 잡고 나는 두 칸 세 칸씩 계단을 뛰어올 라갔다. 건물의 마지막 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 었지만, 그곳을 알려주던 여자의 멍든 얼굴과 라몽의 얼굴이 겹쳐져서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만약 다시 한번 라몽에게 손을 댄다면......” 삼층에서 사층으로 꺾어지며 나는 중얼거렸다. “그래,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마지막 층으로 꺾어지는 어둠 속에서 나는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캄캄 한 어둠 속, 칼로 벤 듯한 틈새에서 노란 빛줄기가 밀려나오고 있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나는 불빛이 새어나오는 좌측의 출입문 앞으로 다가갔 다. 붙이듯 출입문 위에다 귀를 갖다대고, 숨을 죽인 채 안에서 들려오 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런 씨발년!” 짧게 한 마디 튀어오르고 잠시 사이. “야, 너 자꾸 사람 독 오르게 할래?” 욕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이었지만 욕을 듣는 대상이 누군인지를 나로 서는 금방 알아차릴 수 없었다. “씨발년아, 기왕 할 거면 확실하게 해얄 거 아냐? 상판을 그렇게 구기 고 있으면 어떤 놈이 흥이 나?”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엇쭈, 이것봐라! 이쪽으로 못 돌아? 이런 니미랄년!” 순간적으로 퍽, 하는 소리가 들리고 악, 하는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때리지 마아! 제발 때리지 말란 말야!” 발악하듯 울부짖는 여자의 목소리...... 오오 하느님, 맙소사! 그게 라몽의 목소리란 걸 알아차림과 거의 동시에 퍽, 눈앞에서 푸른 불꽃이 튀어오 르는 걸 나는 보았다. “라몽, 나야! 어서 문 열어!” 미친 듯 소리치며 나는 주먹으로 출입문을 두들겨댔다. 안에서 이거 뭐 야, 어쩌고 하며 몇 명의 남자 목소리가 다급하게 튀어올랐다. 우왕좌왕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리다가 느닷없이 한 사내의 악에 받친 듯한 목소리 가 터져올랐다. “잇 쌍년, 네가 열어!” 그 소리와 거의 동시에 나는 출입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폭사하듯 한순 간에 어둠이 흩어지고, 거기 밀폐돼 있던 실내의 풍경이 파편처럼 제멋 대로 내 시야에서 튀어올랐다. 비디오 카메라, 조명판, 침대, 알몸에 이제 막 바지에다 다리를 밀어넣는 사내...... 뿐만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몸에 걸치지 못한채 침대 위에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앉아 연신 몸을 떨고 있는 그녀, 포르노 배우가 되어 있는 라몽! 아. 세 명의 사내와 라몽, 실내의 기물이 한데 뒤엉겨 순식간에 모든 것은 중심을 잃고 제멋대로 나뒹굴기 시작했다. 뭔가 뜨끔한 게 허리와 등판 과 안면으로 날아들고, 내 허우적거림의 반경으로도 가끔은 둔탁한 무엇 인가가 걸려들었다. 죽여, 씹새끼, 잡아, 따위의 말이 부서지고 으깨지고 짓이겨지는 동안, 그 실내에서 일어난 정말 중요한 변화를 나는 알아차 리지 못했다. 라몽이 흔적도 없이, 정말 감쪽 같이 사라져 버렸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소제목 : 세상의 끝 강 위쪽에서 싸늘한 바람이 불어내려왔다. 터지고 부어오르기 시작 한 얼굴에 바람이 끼쳐 다소나마 통증을 잊게 해주는 것 같았다. 강 물 위에서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는 불빛, 아무리 고개를 흔들어봐도 그것들이 난장의 발광처럼 보여서 나는 비감스러웠다. 어떻게 강까지 왔는가. 불과 한두 시간 전의 일이 바로 몇 분 전의 일처럼 내 눈앞에서는 여전히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얻어터진 입술과 화끈거리는 얼굴을 제 외한다면, 카페 <티모시>의 마지막 층에서 있었던 일을 아마도 나는 거짓말이나 꿈속의 일로 치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서너 명의 사내 들에게 달겨들어 짧은 순간 엎어치고 메치다가, 문득 눈을 떴을 때 그 공간에는 나 혼자만 남아 있었다. 다시 카페 <티모시>가 있는 지 하로 내려가봤지만, 거짓말처럼 거기에는 칠흑같은 어둠만 들어차 있 었을 뿐이었다. 나에게 오층으로 올라가 보라던 여자도 없었고, 희미 하던 조명도 없었고, 출입문도 걸려 있었다. 라몽은 어디로 갔는가. 휘청거리며 강까지 걸어오는 동안 나는 내내 그 생각 한 가지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왜 갔는가, 왜 봤는가...... 아무리 후회를 해봐도 이 미 때는 늦어 있었다. 자신의 욕망에 스스로 노예가 되고, 그 노예를 부리는 인간들에게 걸려들어 기어이는 전락의 극에까지 다다른 라몽 의 알몸, 그것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로 나는 내 눈을 멀게 하 고 싶었다. 이제 두번 다시 나는 라몽을 보지 못하리라. 어금니를 악다물며 나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오라고, 오라고, 어서 이곳으로 오라고, 강물 위에서 흐느적거리는 불빛이 연신 내게 손짓 을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정말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고, 그것을 물리칠 만한 내 정신의 뿌리는 이미 허공으로 떠올라 있었다. “너에 대한 사랑이 결국은 내 삶의 뿌리에 닿아 있었구나.” 뜨겁게 밀려나오는 눈물을 방치한 채, 실성한 사람처럼 나는 중얼거 렸다. 그때, 철교 아래쪽에서 검은 실루엣 하나가 느리게 흐느적거리 며 내가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룽지는 눈물을 닦아내 고 나서 나는 긴장된 눈빛으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식별이 가능해질 때까지 나는 움지이는 물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 다. 좌우로 흔들리는 것으로 미루어 술에 취한 사람이지 싶었지만, 어 쨌거나 사람 없는 강변이라서 긴장감을 누그러뜨릴 수 없었다. 이윽고 둑에 세워진 보안등빛 속으로 움직이는 물체가 들어왔고, 그 것과 거의 동시에 나른한 심정이 되어 나는 고개를 떨궜다. 혹시나, 행여나, 하던 기대감에 느닷없이 찬물이 끼얹어지는 것 같아서였다. 손에 술병을 든 남루한 차림의 사내가 가까스로 보행을 유지하며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나는 계속 고개 를 숙이고 있었다. “오, 반가워! 여기 내 친구가 있었구나.” 혀 꼬부라지는 소리가 우측 어깨위로 떨어져내렸지만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봐 형씨, 한잔 어때? 취해 있으나 깨어 있으나 어차피 인생은 꿈 같은 거라구.” 사내가 내 우측에 걸음을 멈추고 있었지만 나는 계속 고개를 들어올 리지 않았다. “이봐, 내 말 안들려? 도대체 뭐가 그렇게 괴로운 거야, 응?” 잠시 나의 반응을 기다리다가 사내는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노스트라다무스를 아나? 오래잖아 지구가 멸망하게 될 거라 는 얘길 들어봤냐구? 지금 이 세상은 이미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어. 흐흐, 그러니까 너도, 나도, 그도, 그녀도...... 다 죽을 거란 말이지. 왜 냐구? 왜냐하면... ... 다 죽어야만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지. 다 죽어야만...... ” 꿀꺽, 꿀꺽, 사내의 목구멍으로 술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때를 놓치지 않고 낮고 은밀한 목소리로 나는 이렇 게 입을 열었다. “꺼져......” “꺼...... 지라구? 이젠 친구도 필요 없다는 거야?” 사내의 말을 듣고나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처음에는 멀 거니, 그 다음에는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내려다보던 부랑자 같은 사 내, 이윽고 긴장된 눈빛으로 허리를 반쯤 굽히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 았다. “으......” 짓이겨지고 으깨진 내 얼굴을 확인하고 난 사내가 놀란 표정으로 한 계단씩 뒷걸음질을 치며 뒤로 물러났다. 서너 걸음쯤 물러난 뒤에 재 빨리 등을 돌리고, 자신이 걸어내려온 쪽으로 그는 또다시 휘청거리 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훠이훠이, 다시 한번 실루엣이 되어 어둠 속으로 잦아들어가는 그를 보다가, 뭔가에 씐 사람처럼 몽롱한 표정으로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 다. “그래, 맞아...... 지금은 세상의 끝이지.” 소제목 : 라, 몽, 시 (마지막회) 깊은 비애가 지층으로 뿌리를 내리는 밤. 내가 집으로 돌아온 건 자정무렵이 거의 다 되어서였다. 그때껏, 금 방이라도 허물어져내릴 것 같은 육신을 아주 간신히 지탱할 수 있었 던 건 오직 비애의 힘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밤은 천연덕스럽게 깊어가고 있었지만, 세상에 대한 나의 단절감은 이미 강철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이제 다시는 라몽을 보지 못하리라. 그게 단절의 끝이라는 생각을 신념처럼 되새기며 나는 간신히 계단 을 올라갔다. 출입문 앞에 이르자 가느다란 속울음, 그런 게 아주 먼 세상에서 전해져오는 메시지처럼 희미하게 내 귓전으로 밀려들었다. 출입문 위에 이마를 대고 아주 잠시 그 소리의 정체를 헤아리기 위해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알라바마......” 출입문 안에서 알라바마가 낑낑거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출입문에 키를 꽂았다. 여러 시간 동안 허기와 외로움에 지쳐버렸을 놈이 안쓰러웠지만, 일종의 깨달음처럼 그 순간 나는 전 혀 엉뚱한 결론을 내렸다. 이제 날이 밝으면, 라몽처럼 너도 나를 떠나야 하리.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저마자, 문 안쪽에서 낑낑거리던 알라 바마가 사정없이 내 발목으로 달겨들어 온몸을 비벼댔다. 꼼짝 않고 선 채, 알라바마 때문이 아니라 실내에서 후끈하게 끼쳐오는 이상야 릇한 냄새 때문에 나는 전율했다. 얼핏 알라바마의 오물 냄새인가 하 는 생각을 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둠이 들어찬 실내의 한가운 데로 나는 시선을 고정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둠 속으로 떠오르는 설원. 견고한 어둠을 밀어내며 부력을 받은 것처럼 가볍게 떠오르는 설원 을 그 순간 나는 보았다. 설원만 본 게 아니라 그 설원의 주인까지도 나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자기 피의 본향으로 돌아와 비로소 몸져누운 영혼, 그것의 지치고 병든 휴식처럼 그 순간의 설원은 이를 데 없이 고요하고 평온해보였다. 저 무한한 화평의 세계. 어둠이 완전히 눈에 익을 때까지 나는 움직임 없이 라몽의 설원을 내려다보았다. 실내를 가득 메운 역하고 비릿한 내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불을 밝혀 그 화평의 세계를 깨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둠 속에 꼼짝 않고 선 채, 깊고깊은 어둠의 속내를 나는 온전하게 눈에 익혀 갔다. 반쪽의 설원에 누운 라몽.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마지막에 나는 그런 걸 눈에 익힐 수 있었다. 어찌된 셈인지 그녀가 누운 설원의 반 정도는 이미 검푸른 어둠에 동화돼 있었고, 나머지 반쪽에만 순백의 여운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 기 때문이었다. 라몽은 정확하게 그 중심에 누워 있었고, 그 육신은 어둠과 순백, 동화와 여운의 묘한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호흡을 멈추고 떨리는 손으로 나는 벽에 부착된 스위치를 눌렀다. 두서너 번의 예광이 스쳐간 뒤에 퍽, 한순간의 폭발처럼 모든 것이 어둠 밖으로, 빛의 와중으로 튀어나왔다. 거의 동시에 나는 섰던 자리 에 풀썩, 맥없이 주저앉았다. 그 순간, 이 거대한 세계가 무화되어 백 광의 보이지 않는 흡반으로 쏜살같이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라몽......” 속삭이듯 나는 그녀를 불러보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어 다시 한번 불러보았다. “몽아......” 온몸이 떨리고 순간순간 정신이 아뜩해지는 것 같았지만, 어금니를 악다물고 나는 무릎걸음으로 엉금엉금 라몽이 누워 있는 반쪽의 설원 으로 기어갔다. 그녀가 누운 좌측편의 옥양목은 빈틈없이 피에 젖어 있었고, 그녀의 몸을 경계로 그 반대편은 여전히 흰빛으로 남아 있었 다. 피는 왼쪽 손목에서 밀려나와 좌측 옥양목을 적시고, 마루를 적시고, 욕실 입구까지 흘러가 있었다. 그녀의 몸은 백짓장처럼 희게 탈색돼 있었고, 거의 맑고 투명한 기운으로 옥양목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었 다. 얼굴에는 화장기 한 점 남아 있지 않았고, 표정은 이를 데 없이 평온해보였다. 일체의 군더더기를 벗어던지고 무한한 자유를 알몸으 로 과시하고 있었지만, 오직 한 가지 그녀의 몸에 남겨진 마지막 장 식이 있었다. 5월의 허공에서 찬연하게 펄럭이던 흰 스카프. 지상에서의 마지막 치장처럼, 그때 화류시장에서 나로 하여금 증발 을 목격하게 만들던 그 스카프가 그녀의 목에 단정하게 매어져 있었 다. 스카프도 알몸도 피에 젖지 않아 눈을 뜨고 보기엔 지나치게 화 사한 구석이 있었다. 호흡을 멈춘 채, 거의 넋을 잃은 표정으로 나는 꽃보다 아름답고 독보다 강렬한 그녀의 주검을 내려다보았다. 명치 끝에서부터 뭔가가 꾸물럭꾸물럭 온몸을 뒤틀고 올라가 머리를 저리게 하고, 그것이 다시 온몸으로 번져나가 놀라운 환각을 몰고왔 다. 만화방창한 화원을 보았는가, 자옥한 물안개 속으로 피어오르는 내 시원의 그리움을 보았는가. 속이 울렁거리고 이를 데 없이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벽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들자, 맞은편 벽에 걸린 거울 위에 붉은 립스틱으로 단정하게 쓴 글씨들이 거의 선정적인 기 운으로 내게 달겨들어 온몸을 뒤틀게 만들었다. __ 류, 이 세상에서 내가 류만큼 사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류도 그만큼 날 사랑한 거지? 난 너무 행복해. 안녕. 벽에 등을 기대고, 소리없이 웃으며 나는 뜨겁고 맑은 눈물을 흘렸 다. 비로소 긴 터널의 바깥, 빛의 성전에 다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어서였다. 해맑은 그녀의 웃음, 경쾌하고 탄력적인 동작 하나하나가 행진을 하듯 연해 내 눈앞을 스쳐갔다. 선연한 감성의 물줄기가 뇌수 로 치솟아 맑은 증류의 샘을 만드는 것 같았다. 견딜 수 없는 무엇인 가가, 원천(源泉)을 가진 대지에서처럼 하염없이 내 속에서 샘솟기 시 작했다. 아무리 피로 쓰고 피로 울어도 미친 사랑의 노래 홀로 외로운 너와 함께 세상은 잠들었으나 잠들어 다시는 눈뜨지 않는 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지막 사랑이라고 술잔 맞부딛칠 때마다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반딧불처럼 네가 꾸던 꿈 속에서 나는 언제나 행복한 미완이라도 좋았다. 이제 네가 잠들고 싶어하던 설원까지 삭풍 가르고 함께 가면서 죽는 날까지 내가 너의 설원이 되어 한없이 한없이 詩로 남아 낮아지리.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나는 다시 라몽의 화사한 잠을 향해 다가 갔다. 그녀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 왼편의 흥건한 피를 오른손 중지에다 찍었다. 맑고 뜨거운 눈물이 다시 흘러 툭, 투둑, 소리를 내 며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흔들림 없이 나는 피가 찍힌 중지를 오른 편의 흰 옥양목 위로 옮겨갔다. 내 속에서 증류된 최초의 시, 그것을 그곳에 옮기기 위해 떨리는 손을 가누며 가까스로 제목을 적을 수 있 었다. __ 라, 몽, 시 << 끝 >>